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사적비
실학의 학풍을 일으킨 반계 유형원은 1622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673년 양력 5월 5일 전북 부안군 우반동에서 돌아가시니 유언에 따라 아버지 어머니 산소 아래 이곳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에 10월 27일 이장됐다.
본관은 문화이고 조선초 청백리였던 우의정 유관(柳寬1346-1433)의 9세 손이고 아버지는 흠(흠 1596-1623)이고 어머니는 여주 이씨 우참찬 이지완의 따님이다. 공은 두 살 때에 아버지가 옥사하는 슬픔을 당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성민(成民1569-1651) 슬하에서 자랐다. 할머니, 어머니, 할아버지 상을 연이어 당하여 이를 마친 후 32세 때(1653년)에 할아버지가 개간한 우반동에 내려가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은 19년에 걸쳐 반계수록 26권을 집필했다. 이 책의 핵심은 모든 백성이 기본적 삶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고, 국가 경영을 합리적으로 행할 수 있는 구체적 방책이었다.
공은 음풍영월을 일삼고 대체만을 논하는 당시의 선비, 관료들의 학문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전국의 상황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13권을 저술했다.
영조의 사부였던 양득중(1665-1742)이 영조(재위 1724-1776)에게 경연에서 주자어류 대신 반계수록을 강독하기를 상소하였고, 1770년 경상도 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동국여지지는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 신경준(1712-1781)에 의해 많이 인용되었다. 공의 실학적 학문은 이익과 정약용에 의해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연보는 안정복(1712-1791)이 상세히 작성했다.
개화기에는 법제의 기본 정신을 주창한 학자로, 식민지기에는 조선학의 중심적 학자로, 광복 후에는 천관우(1925-1991)에 의해 그의 실학사상 전모가 밝혀져 실학의 비조로 인정받게 되었고, 현재는 한국실학학회의 노력으로 국제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용인에서는 농민들이 반계숭모회를 조직하여 공의 정신을 실천으로 계승하고 있고, 부안에서는 호남실학을 일으킨 학자로 현창사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공의 묘비는 실무 정치가인 홍계희(1703-1771)가 비문을 짓고,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가 의연금을 모아 묘 앞에 비석을 1768년에 세웠다. 공의 탄신 400주년 되는 해에 묘소 안내의 비석으로 반계숭모회에서 세운다.
삼가 명(銘)을 올린다.
부모님 아래에서 바치는 효성은 영원하리라.
사랑은 인간을 넘어 사슴에까지 미쳤도다.
성실히 독서한 행실은 대덕군자요
학문의 업적은 경국제세의 대문자로다.
공익을 위한 마음씀 저 밝은 해와 같을지어다!
2022년 12월 일 문학박사 정구복이 짓다.
첫댓글 홍계희가 찬한 유형원선생의 비문에는 "서문"만 있고 비명이 없는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정구복박사가 "명"을 지어 홍계희 선생을 추모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박사의 비명을 통하여 유형원선생의 훌륭한 인격과 고매한 실학정신을 엿볼 수있어서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청계산)
홍계희의 글은 비음기입니다. 아마도 비명이라고 했다면 그의 글은 파손되었을 것입니다.
정조 대에 죄인으로 처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