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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9일 수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한다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이야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참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듣다 보면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앞으로 행복하게 될 것이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이 과연 위로가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곧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루카 6,24-25)로 후반부의 가르침을 시작하시며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행복에 취해 있는 사람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감사함을 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불행해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모든 순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행복하였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하느냐며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앞으로 행복해지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하며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모든 순간은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지금 행복하십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4가지 행복과 4가지 불행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가만히 묵상해보니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역설의 행복이요, 역설의 불행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음을 그칠 수가 없으며, 미움과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고, 깔깔 웃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있으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들 지금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 좋은 세상 즐기고 만끽하고 오라고 소풍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행복한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반드시 원인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룰 것 다 이루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갖출 것 다 갖추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지금 너무 높이 올라가 있어서, 지금 너무 큰 사람이어서, 지금 너무 호의호식하다 보니 그렇지 않을까요?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 아직 때가 아닌데 초고속 승진을 통해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운지 모릅니다. 나중에 감당해내야 할 몫일 얼마나 큰 것인지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람들, 인기 절정의 스타들,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CEO들의 인생이 마냥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절정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하늘을 찌릅니다. 어찌 보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 조건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산상수훈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그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 역설의 행복, 결핍을 통한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좋은 표시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돌아보니 부끄럽고 자주 지난 삶이 후회된다면 그것은 행복이 멀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에게 직접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역사를 통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하느님께 희망을 걸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편이 되시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십니다.
부유한 사람들, 그들이 쌓아 올린 부 때문에 맨날 행복해할 것 같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언젠가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가난 때문에 너무 힙겹습니까? 지금 굶주리고 계십니까? 홀로 돌아서서 속울음을 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조만간 당신 자비의 손을 펼치시며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이며 든든한 산성이요 성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맺어 온 소중한 인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을 만났습니다. 16년 전, 30일 피정을 함께했던 신부님들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선배라고 점심을 자주 사 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점심을 사려고 했는데, 후배 신부님들이 한사코 말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예전에 많이 사 주셨으니, 이제는 저희가 사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함께 기도하고, 함께 웃고, 서로를 격려했던 인연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작은 마음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감사와 사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건네는 따뜻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40년 넘게 복음화 학교를 위해 헌신하신 선생님도 만났습니다. 이제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지내셔도 될 나이입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맡았던 자리를 후임 선생님에게 기쁘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일을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또 다른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아직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바오로 사도가 생각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를 믿음직한 후임자에게 맡기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났습니다. 편안함보다는 복음이 필요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마음과 열정은 여전히 청년 같았습니다. 사람의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가슴이 뛰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넘게 본당 사목회장을 맡아 헌신하셨던 형제님도 만났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본당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능력을 봉헌하였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수고도 많았고, 마음 아픈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님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모습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분들을 만나면서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돌려주는 사람, 자신의 자리를 기쁘게 후임자에게 내어주는 사람, 새로운 복음의 밭을 찾아 떠나는 사람, 한결같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고백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직접 빵을 내려 주시기보다 빵을 나누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슬픔을 단번에 없애 주시기보다 곁에서 함께 울어 주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길을 잃었을 때 하늘에서 큰 표지판을 내려 주시기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길을 알려 주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돌아보면 저의 삶에도 희망이 되어 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부모님과 가족이 있었고, 신학교의 동료들이 있었으며, 함께 사목했던 사제들과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통하여 저를 위로하셨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가 되고 나서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큰 성당으로 가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조건이 채워질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하는 자리를 얻어도 또 다른 바람이 생겼고, 부족한 것이 채워져도 새로운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행복을 미래의 어느 날로 미루어 두면 우리는 오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행복은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충실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행복도 특별한 조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시선을 위에 있는 것에 두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마음은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욕심과 욕망, 출세와 성공, 권력과 명예가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자신과 이웃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그 끝에는 허무만 남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전혀 다른 행복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배척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과 절망,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감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그 자리에서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가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서도 은총을 발견합니다. 아침에 눈을 뜬 것, 함께 식사할 사람이 있는 것, 전화해서 안부를 물을 사람이 있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은총입니다. 거창한 일을 해야만 희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주는 것, 지친 사람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들어 주는 것, 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돌려주는 것, 공동체를 위해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받아 살아갈 때, 우리도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친절을 건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작은 사랑을 통하여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행복과 불행>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을 낳으니 행복
행복을 낳지 못하니 불행
나 있으니 행복
나의 것만 있으니 불행
너 있으니 행복
나만 있으니 불행
함께하니 행복
홀로니 불행
믿으니 행복
믿음 없으니 불행
바라니 행복
바람 없으니 불행
사랑하니 행복
사랑 없으니 불행
나아가니 행복
멈추니 불행
행복을 낳으니 행복
행복을 낳지 못하니 불행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er Claver)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 콜롬비아(Colombia)
활동연도 : 1580-1654년
같은이름 : 끌라베르,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교 베르두(Verdu)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602년 8월 7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604년까지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는 마요르카(Mallorca) 섬의 몬테시온 예수회 대학에서 1608년까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같은 예수회원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0일) 수사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성 로드리게스 수사는 그에게 신대륙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1610년 그는 관구장의 지시로 다른 3명의 예수회원들과 함께 콜롬비아 카르타헤나(Cartagena) 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16년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콜롬비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성 클라베르는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콜롬비아 인디오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였고, 정기적으로 수용 막사를 방문하여 나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보아 주면서 그들의 벗이 되었다.
성 클라베르는 40여년 동안 흑인 노예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세례를 준 흑인 노예만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루 종일 노예들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었고, 카르타헤나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의 영적 자녀가 될 정도로 전 생애를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였고 또 기적하는 능력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하였다. 그는 1650년에 전염병에 걸렸다가 곧 회복되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1654년 9월 8일 카르타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5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뒤,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를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흑인의 사도로 불린다.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Mary de la Cabeza)
활동년도 : +1175년
신분 : 과부
지역 :
같은 이름 : 또리비아, 메리, 미리암, 토리비아
에스파냐의 토레존(Torrejon)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는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5일)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를 돕는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남편 못지않은 신심과 가난을 실천했기 때문에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아우도마로 (Audomarus)
활동년도 : +595-670년
신분 : 선교사, 주교
지역 : 테루안(Therouanne)
같은이름 : 아우도마루스, 오도마로, 오도마루스, 오메르
오메르(Omer)라고도 불리는 성 아우도마루스(또는 아우도마로)는 프랑스의 쿠탕스(Coutance) 교외에서 출생하였고, 부모가 사망한 후에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 3월 29일)의 지도를 받으며 뤽세이유(Luxeuil)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이곳에서만 거의 20년을 머문 성 아우도마루스는 테루안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내의 이완된 신앙과 윤리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구호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는 성 뭄몰리누스(Mummolinus, 10월 16일)와 성 베르트란드(Bertrand, 1월 24일) 그리고 성 베르티누스(Bertinus, 9월 5일)와 함께 시티으(Sithiu, 오늘날의 생베르탱)에 수도원을 세워 프랑스의 영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가 행하는 수난에 대한 강론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만년에 그는 맹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