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부용 |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워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 노들강변 : 박부용 >
흥겨운 세마치 장단에 맞춰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처럼 어깨춤이 절로 출렁이게 만드는 정겨운 가락이다. '노들강변'이라 하면 경기민요 가운데에서도 친숙하게 널리 알려져 있기로 손꼽히는 곡이며, 국악 방송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음악교과서에도 실리기까지 하는 대중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 '노들강변'은 사실 전래민요가 아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보통 민요들과는 달리, '노들강변'은 작사자와 작곡자는 물론 발표연도까지 정확히 밝혀져 있는 분명한 창작품이다. 사설과 가락은 민요, 특히 통속잡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개인적인 창작으로 음반 같은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노래, 이와 같은 것을 흔히 '신민요'라고 칭한다.
신민요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새로운 민요라는 뜻이니, 때로는 '경복궁타령' 같은 개화기 민요까지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창작과 유통 방면에서 이전 민요와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는 전형적인 신민요는 1930년대 유행가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신민요의 형성 과정에 대해, 192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일본 가요계의 신민요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당시 우리나라의 음악환경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음반 발매량이나 판매량에서 유행가보다는 전통음악의 비중이 훨씬 높았으므로, 새롭게 전래된 양식인 서양음악에 기반을 둔 유행가가 기존 전통음악과 접합함으로써 활로 개척을 시도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신민요의 초기 형태는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것보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민요에 가사를 새롭게 붙이거나, 곡조를 조금 양악풍으로 바꾸고 서양악기로 반주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유행가 가수들이 이러한 형식으로 신민요를 취입했는데, 예컨대 30년대 초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겸 가수였던 이애리수가 1932년에 '황성의 적'과 함께 발표한 '신아리랑'은 '구조아리랑'를 편곡해 가사를 새롭게 붙인 것이었다. '신아리랑'의 가사지를 보면 신민요가 아닌 유행가로 표기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신민요에 대한 개념이 아직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은 데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신민요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최초의 음반은 1931년에 나온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와 '녹슨 가락지'인 것으로 보인다. 홍난파가 작곡한 이 두 곡은 동요 가수들이 부른 것이라 본격적인 유행가 성격을 띤 신민요라 하기에는 다소 하자가 있지만, 이후 1933년 무렵부터는 유행가로서 신민요 작품의 발표가 활발해져서 하나의 쟝르로 확실히 자리잡게 된다.
|
문호월(작곡가) |
1934년 2월에 발표된 '노들강변'은 바로 이와 같은 신민요 정착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케레코드사 창립 1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된 '노들강변'은, 당시 오케의 중심 작곡가였던 문호월이 작곡하고 만담의 당대 일인자로 활약하던 신불출이 작사했으며, 경기민요 명창으로 이미 많은 민요 음반을 취입한 박부용이 불렀다.
그때 음반과 함께 나온 가사지가 지금까지 여러 종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음반이 재판을 거듭하며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더없이 흥겨운 가락도 가락이지만, '노들강변'의 독특한 멋은 가사 전체를 통해 유유하게 흐르는 달관한 듯한 무상감에서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흥겨운 가락과 무상한 사설이 절묘하게 어울린 데에 민요 명창의 구성진 목소리가 더해져서 절창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
신불출(우측), 신은봉 |
신불출은 유행가 작사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잡지에서 그가 지은 시조 작품이 자주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재주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상당했던 것 같다. 또한, 그가 취입한 많은 만담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과 비판의식, 그리고 월북을 택한 등의 이후 행적을 감안해 볼 때, '노들강변' 노랫말도 그저 흔한 신세타령으로만 흘려 버릴 수는 없을 듯하다.
한편, '노들강변'이 워낙 많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인지 1940년에는 재발매 음반이 나오기도 했고 동시에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곡이 발표되기도 했다. 선우일선의 뒤를 이어 30년대 말부터 신민요의 여왕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화자의 노래로 나온 '신작노들강변'이 바로 그것이다. '신작노들강변'의 곡조가 원작 '노들강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된 바 없지만, 노랫말은 작사가 조명암이 새롭게 지은 것이었다.
또, 이와는 별도로 오케레코드사의 대표적인 가수겸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원작 '노들강변' 가사에 째즈풍의 곡조를 새로 붙이기도 했는데, 코미디언이자 가수로 활약했던 이복본이 주로 공연 무대에서 많이 불러 지금까지도 이 또 하나의 '노들강변'이 원작 '노들강변'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
첫댓글 참 좋은글 올리셨네요 덕분에 민요 노들강변에 대한 이해를 더한층 하게 되였습니다.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