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온고을교회 주일설교 – 황의찬 목사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살후 3:1~5
〈 나비효과 〉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여 읽다 보면 먼저 읽은 사람이 밑줄을 쳐 놓은 것을 봅니다.
이런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런 몰상식한 사람이 있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못됐다!’
이렇게 투덜거린다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귀가 간질간질하겠지요?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 귀가 간질간질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속담처럼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그 사람 귀가 간질간질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나비효과”라고 들어보셨지요?
사소한 것이 나중에는 엄청난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Lorenz, E.)가 처음 주장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참 어마어마한 이야깁니다.
☞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였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하루에도 몇 권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책을 읽는 중에 먼저 읽은 사람이 밑줄을 그어놓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중요한 대목을 표시해 둔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책, 저는 어차피 다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파악을 해야합니다.
요령이 생겼습니다. 밑줄 쳐 둔 부분을 따라 읽으니 시간 절약하면서 핵심파악이 됩니다.
‘하, 밑줄을 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밑줄 그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귀가 간질간질했을 겁니다.
그때 이후, 저도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 긋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좋은 버릇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마는, 뒤에 읽는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제 귀가 간질간질합니다. ☻
☞ 내가 그은 밑줄이 나중에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비효과입니다.
〈 거미줄의 이슬방울 〉
우리는 이렇게 누군지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삽니다.
한편 누군지 알고, 생사도 알면서, 서로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기의 기도가 ‘나비 효과’의 도화선이 되기를 평생 바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는 기도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들판에 나가면 밤새 거미가 거미줄을 쳐 놓았습니다.
거미줄에 아침 이슬 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습니다.
그 가느다란 줄이 이슬 방울을 매달고 있는 것을 보면 참 경이롭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기도와 희망으로 이슬방울처럼 영롱한 존재가 우리입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도무지 들고 있을 수 없어, 포기하고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지만,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쳐 놓은 밑줄을 보면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있습니다.
엊그제 택배기사의 선행이 보도되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물품을 배달하는데, 길 위에 두툼한 지갑이 떨어져 있습니다.
주워서 열어보니 현금 600만원과 신용카드가 들어있습니다.
배달해야 할 물건이 아직도 많은데, 그 사람은 경찰서를 찾아가 습득물을 신고했습니다.
현금 600만원,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때 어떤 심정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까?”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가 나에게도 좋은 일로 돌아오리라고 믿고 그리했습니다.”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쁜 생각도 더러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면, 내게 좋은 일이 돌아올 것이라는 양심’ 살아있습니다.
그 양심이 세상에는 살아 있습니다. 그 양심이 나비효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 예수의 이름으로 〉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가 개가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머니가 왜 집을 나서는지 이유도 모른체 치마폭을 붙잡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하여 가야만 했습니다.
열 살 짜리 아들을 밀쳐냈습니다. 아들은 시궁창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을 외면하고 개가했습니다.
개가하신 어머니의 삶은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아들이 나이 40이 넘어서 소문으로 어머니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오갈 데 없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삽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팽개치고 떠났지만, 어머니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삶이 힘들어 자식을 버리고 개가했지만, 아들의 행복을 빌어왔습니다.
어머니와 아들, 혈연이라는 끈이 있었지만, 사실, 그 끈보다 더 질긴 끈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 내가 읽는 책에 밑줄 그은 사람도 내 마음에 새겨질 수 있습니다.
☞ 내가 분실한 지갑을 찾아 준, 낯 모르는 사람도 내 삶을 돕고 있습니다.
☞ 지금 불어오는 훈풍은 지구 반대편 나비의 날개짓으로 일어난 바람입니다.
☞ 거미줄에 맺힌 이슬 방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영롱합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이 바람이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간절함을 가지고 염원합니다.
이러한 염원을 단순히 자신의 욕망으로 하지 않고 “믿음과 신앙”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 우리 기독교인들이 누구입니까?
마음 속의 간절함을 막연히 바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할렐루야~
〈 무엇을 기도(企圖 , 祈禱)해야 할까? 〉
☞ 이것이 세상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설계하셨습니다.
☞ 안 믿는 자들의 염원도 때로는 토네이도가 됩니다.
☞ 하물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따라 섭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자신의 정욕에 따라 기도(企圖)했습니다.
이 기도는 꾀할 ‘기’ 자에 그림 ‘도’자를 쓰는 기도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빌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의 기도는 이와 다릅니다. 글자는 같지만 내용은 다른 기도(祈禱)입니다.
빌 ‘기’자에 빌 ‘도’자를 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들이 자기 뜻이 아닌 예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단순한 기도(企圖)가 아닌, 바로 이 기도(祈禱)를 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기도 명령 합니다.
3장 1절 위에 보면 파란 글씨로 제목을 붙여두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데살로니가 남쪽 백여 키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져?’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면 분명히 달라진다”
① “내가 기도하면 달라집니다.”
② “우리가 기도하면 변합니다.”
③ “교회가 기도하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 문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입니다. 바울 사도는 3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 우리가 예수 믿은 것처럼 다른 이들도 믿게 하옵소서!(1절)
둘째,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주옵소서!(2~3절)
셋째,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소서(5절)
〈 기도 명령 3가지 〉
바울 사도의 기도 명령 3가지는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도 내 맘대로 기도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기도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 우리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꼭 여쭈어야 합니다.
“너는 이것을 기도하라!” 응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기도하면, 평생 해봐야 하나님이 꿈쩍도 안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 중에는 ‘이것을 기도하라’는 말씀을 찾기 위함이 있습니다.
마침 우리에게 “이것을 기도하라!” 그 말씀이 나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참 좋습니다. 아멘!
첫째, 너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었다. 이 영화가 널리 퍼지도록 기도하라!
(1절)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데살로니가 교회, 짧은 시간에 부흥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아 교회를 이뤘습니다. 이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 더 널리 퍼져나가도록 기도하라!”
둘째,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주옵소서!(2~3절)
(2~3절)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모든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로부터 믿는 자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주님은 이 기도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하셔도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소서(5절)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그 안에 거하기를 기도하라!
오늘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 3가지를 허락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마음껏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예배할 때, 주님은 이외에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세 가지 이외에도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생각나는 것을 분별하지 않고 기도(企圖)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예수 믿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뀝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충 바라는 기도에서 벗어나,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기도합니다.
〈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 〉
예수 믿기 이전 기도는 각자 자기가 바라는 것을 막연하게 비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에 누가 귀 기울여 들어주는지, 그 기도는 누가 성취시켜주는지 막연합니다.
단지 그리된다면, 자기에게 유익이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손을 비벼대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다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때 자칫, 실수를 합니다. 예수 믿기 이전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그대로 기도합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앵무새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형식을 차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예수 믿기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맨 끝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후렴구처럼 붙이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는, 기도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 이름’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이전 개인적인 욕심 끝에 주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후부터는 예수 이름으로 살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는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먼저 주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하라 하시는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 어떤 사람의 귀를 간지럽히는 기원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