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소설가로써 그는 각가지 수식어가 붙는 훌륭한 대 작가 이다.
보편적으로 그렇게 인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실이 그렇다.
그 박경리를 찾아갔다. 원주문학관은 이미 한번 둘렀고 유서 깊은
화개장터 부근 그의 작품 속 최 참판 댁을 찾으면서 부속 문학관을
관람하고 다시 보는 박경리를 말하고자 한다.
대저 소설가의 임무라면 많은 사람들 읽고 즐겁게 하는 것이 임무
라면 임무요 사명이다. 그런 임무라면 훌륭히 해낸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가로써의 면모를 살피면서 소설보다 더한 그네의 내
력에 더 놀라고 감격하게 된다. 박금아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김동리
선생이 추천을 하고 “경리”라는 아호를 주면서 필명이 된다.
경관 수려한 통영 땅에서 1926년 10월 28일 태어난 경리는 청마(靑馬)
동랑(東朗) 그리고 윤이상 등 쟁쟁한 예술 명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반열 오른 명사이기도하다.






일찍이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한 딸로써의 처녀가
격어야했던 고뇌가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던 그녀에게 아버지
재혼(再婚)은 평범하지 못한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중의
하나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憐憫)과 아버지를 경멸하게 되는 그 극단적 감정
들이 그를 고독하게 했을 것이었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행도라는 한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은 좌익으로 몰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남편 잃고 또 아들 까지 죽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평탄한 촌부(村婦)가 되고 싶은 소박한 꿈을
꾸는 새 색시였다는 그 시골 처녀가 이런 극단적 고뇌를 체험하면서
대작가로 변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절절한 인간
고독이 급기야 문학이란 신앙을 신봉하게 되고 그길로 증진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 사료된다.
그 고뇌와 울분 같은 것에 대한 배설 같은 것들이 문학으로 소통되는
결과가 되었으나 처음부터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 그가 그때는
문학인이 될 줄은 몰랐다. 또한 자신의 남편과 자식도 전쟁(戰爭)으로
잃었고, 한 점 혈육 딸 김영주는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 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는 한 번씩 창자가 끊어지듯이 울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그 동기의 처절했던 배경을 토로한다. 그 진한 고통과 고뇌가 문학으로
승화 할 수 있었던 그의 내력은 감히 죽음을 넘어선 감정 제어의 초인적
능력이 그 같은 대작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한다.
게다가 다시 겹치는 아픔은 1973년 시인 김지하를 사위라고 보았더니
노상 영창으로 들락날락하는 사람이라 이 또한 힘 든 고통이었다.
이 또한 무슨 청천의 벽력인가<토지> 1부를 집필하면서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오랜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 내고 다시 두 번이나 암(癌)에 걸려
수술했지만 그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한(恨) 많은 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차라리 인생이란 그런 수순을 밟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담담히 받아드리는
문학이란 행위가 매일 기도하는 종교 신봉의 형태와 같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그 갈갈 이 찢어진 인생 조각을 버리지 않고 올올이 바느질하여
그렇게 대작이라는 인생의 옷을 지어낸 그의 신앙이 이 처럼 추앙 받고
빛나는 업적이 되는 거였다.


내게 있어 그의 작가적 역량은 그저 여류로써 힘든 작업을 하는 작가란
정도였다. 그 수준을 당시의 여류 강신재 한무숙 한말숙의 문학수준 이란
평범한 인식이었다. 강신재. 한무숙 한말숙. 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나이의 여류 문인들 이었고 뒤에 등단한 박완서도 그런 연령의 여류 들이
었다. 다들 그만 그만한 학력과 괜찮은 형편들 이었는데 유독 박경리만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환경 이었다는 점이 우뚝 솟는 대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인 최 참판 댁을 실제처럼 꾸며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하동군의 업적이 또한 만만찮다. 부설 문학관도 훌륭하지만
평사리 전체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하며 경관도 너무 좋다.
살아 서러웠던 박경리, 이승의 끊을 놓고 돌아갔을 때 경리는 맞아주는
남편 김행도를 안고“여보 내가 돌아 왔소.”라고 하면서 이승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어 맞아주는 추천자 김동리가“경리 왔냐?”
하며 반겨 맞으면 “선생님! 선생님!” 하고 어린애처럼 부등 켜 안고
울었을 것이다.
그런 상념 속에 바라보는 평사리 하늘은 푸르고 늦가을 소소한 바람 부는데
인생은 하염없어라. 하는 생각에 공연히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의 작품은
정작 별로 읽어보진 않았으나 표류도는 읽은 기억이 있다.
헤어졌던 두 남녀가 서로 결혼 실패하고 다시 만난자리에서 넌지시 남자가
옛 애인 손을 잡으면서
“많이 늙으셨군요?”
“...........”
“제가 결혼 하자면?”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요.” 하던 구절이 선명히 기억된다.
오! 오! 박경리
그리고 그의 문학이여!
그의 인생을 조립 한 듯한 바느질이란 시를 올린다.
바느질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 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베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참고
강신재(康信哉)
1924년 5월 8일 ~ 2001년 5월 12일
출생지 서울 의사의 장녀로 서울에서 출생.
1932년 함경남도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1938년 서울로 이주해 덕수 소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경기여고를 거쳐 1944년 이화여전 가사과 2학년을
중퇴하고 결혼했다
데뷔 1949년 [문예]지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얼굴>
<정순이>를..문예지 단편 '얼굴', '점순이' 발표
한무숙(韓戊淑)
호는 향정(香庭) 1918년 10월 25일 ~ 1993년 1월 30일
한무숙의 아버지 한석명은 고등계 경찰을 거쳐 조선총독부
군수를 지낸 관리였다. 경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경남여자고등...
1937년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인 화가에게 사사해
그림을 그렸으나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면서 그림보다
글쓰기에 전념...
한말숙(韓末淑)
국악 명인인 5년 년하인 황병기와 결혼 한 한말숙은 17년 나이
위인 오빠를 선두로 오빠보다 두 살 아래인 정숙 언니, 연년생인
무숙 언니, 그리고 10년 만에 태어난 묘숙 언니가 있고, 그는
그 후 4년 만에 막내로 태어났다.
1957년 단편 '신화의 단애'로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신화의 단태' '이 하늘밑' '신과의
약속' '잃어버린 머플러' '여수' 등과 장편소설 '하얀 도정'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 '모색시대' 등을 펴냈다.
1960년대부터 해외에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해 단편 '장마(김동성
옮김)' '행복(백낙청 옮김)'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어 단편
선집 '거문고' '한 잔의 커피'가 출간되었으며 '덜레스 공항을
떠나며'가 2008년부터 출간 된다.
장편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는 1983년부터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8개 국어로 번역소개 되었다.
첫댓글 검농의 또 다른 눈을 보는 것 같군요. 하동의 최참판댁을 본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닐진대 대부분 토지의 뜻을 깊이 새겨보지 못했는데, 그 기억력, 그 관찰력 삼구에서 외길을 파면서 깊숙히 자기위치를 지켜온 손꼽아야 할 몇분이십니다.
늘 해보고 싶은 文學紀行! 검농형의 베테란 정신 존경합니다.
금송형 일이 묘하게 되었군요.형께 보내 드린 아우의글 사진을 읽지 않으셨기로 피곤하신것 같아 지우고 일송 형께 보냈더니 이중으로 올려 졌군요. 날카로운 정암형의 지적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 칠 뻔 하였습니다그려. 너무 감사하고 죄송 스럽습니다.실수 용서하십시요. 석포형의 늘 가져주시는 관심 참 고맙습니다
금송! 참 젊잖으시다. 인격자다 . 쓸적 이름만 바꿔 놓으셨구료.그런 처신이 실수를 원색적으로 지적하기 보다 더 큰 자기반성의 기회를 자연스럽게 주시는군요. 수준 이하의사람과 수준 이상의 사람이 함께사는 세상을 형처럼 그렇게 교화 시키는 인격이 돋 일뿐이지요 정암형은 두군데 올린것을 아름다운 友誼라고 표현 해주는 그의 인격도 높이 살만 하구요. 아무리 소생이 수준 이하라도 그 정도면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지요. 금송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