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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라(시 1:1-3)
계속해서 신앙생활의 근본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전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전도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사명입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정말 성도로써 믿음으로 이 땅에 삶을 산다면 가장 큰 사명이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천국가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말씀생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믿는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 일에 열심해도 그 삶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묵상하는 창세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창세기 12장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창12장 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고향과 친척, 아비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울타리를 떠난 양처럼 미래가 캄캄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붙잡혀 노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땅이 재산인데 자기 땅이 없이 나그네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결단합니다. 4절 상반절에서 보시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말씀에 생명을 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절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한 것은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갔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거짓 믿음입니다. 바울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경건이란 영어로 ‘godliness’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겉은 경건한 것같은데 실제는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건의 능력을 겸비한 신앙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앞에서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원동력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세상의 유혹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실한 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있으면 하나님을 가슴에 모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없으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내 마음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은 너무 중요한 신앙인의 생명줄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묵상이라는 말은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원어에도 보면 묵상이라는 말은 '굶주린 동물이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먹이를 먹고 먹었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묵상은 영혼의 양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입에 넣고 씹고 또 씹어서 단맛이 날 때까지 씹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내 삶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맞출 수 있는 나침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말씀묵상하는 시간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오랜 신앙생활을 했기때문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 앞에서는 절대로 그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일단 삶에 다가오는 사건을 믿음으로 해석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자기 육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제1 편에서 말씀묵상을 강조하고 말씀묵상을 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1-3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 묵상!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근본적인 힘을 제공해 줍니다. 복있는 삶이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삶의 외형도 풍성함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마다 다 형통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묵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1. 말씀묵상을 통해서 믿음이 성숙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묵상을 한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이 깨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자기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념은 어떤 한계에 부닥치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한계에 부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죄인들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다가 한참 일하다보니 화가 납니다. 언니가 일하는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옵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10:41-42,“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듣는 일이 이렇게 좋은 편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몇몇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말씀을 매일 읽고 녹음을 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말씀을 소리내어 읽는 것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영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2. 말씀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지혜는 삶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면 지혜가 있기에 세상의 유혹에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잠 3:13,14)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야고보도 지혜를 구하라고 했고,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이론적인 학문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지혜는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그것을 일상생활속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구별되는 참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 아닙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악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으므로 멸망의 길로 갑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분별하는 지혜,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겸손하고 항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본문 2절 말씀은 지혜를 얻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묵상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하는 자는 악인의 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앉지 아니하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뜻을 깨달으면 이러한 지혜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조급한 생각과 판단을 뒤로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묵상하십시오. 내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의지할 때는 실수하기 쉽습니다.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선택과 결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묵상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씀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셰익스피어가 인격에 대해 이같은 말을 했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꽃이 피지 못한다. 인격은 사상의 뿌리이다. 사상은 작으나 크나 그 사람의 인격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하나의 건축이다. 토대와 밑받침없는 사상은 허물어지기 쉽다. 꽃에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품격이란 것이 있다. 꽃도 그 생명이 생생할 때 향기가 신선하듯이 사람도 그 마음이 맑지 못하면 품격을 보전하기 어렵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향기가 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고약한 악취가 나기도 합니다. 무엇때문입니까? 그 사람의 인격때문입니다. 좋은 인격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높은 학식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악취만 날 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인격은 그 사람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고 봉사도 합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직분을 맡아 거룩한 사람처럼 살아가는데 세상 속에서는 참으로 힘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왜 직장에서, 가정에서 '당신은 정말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까? 왜 쉽게 타협하고 쉽게 화를 내는 것입니까? 왜 화평하지 못하고 관용하지 못합니까?
왜 긍휼과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체험하고 매일 동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말씀을 펴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우리의 영이 힘을 얻습니다. 말씀충만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그것은 예수충만입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영적 훈련을 시킵니다. 매일 새벽에 광주리를 가지고 나아가서 아침 이슬과 함께 떨어진 만나를 하늘 양식을 거두어 와서 그것으로 밥을 해서 먹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하늘양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31-35)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인 하늘의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말씀을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께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속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변화된 인격의 열매를 맺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깊은 묵상을 통해서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깊은 묵상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쉽게 화를 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형제와 화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묵상하는 자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묵상하는 자는 많은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골 1:10)"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묵상을 통한 풍성한 인격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말씀묵상을 통해서 복있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1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복이 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주야로,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코 말씀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 가슴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모신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생활은 말씀묵상입니다. 말씀묵상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복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 10:12,13절),“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묵상하는 자에게 주시는 유익의 네 번째가 바로 이러한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렇습니다. 강과 같이 흘러넘치는 은혜를 받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주시는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어떻게 임한다고 했습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이 어떤 땅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토가 메마른 광야와 험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땅의 토양은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연평균 강우량은 고작 600mm에 불과합니다. 이런 땅에서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흐르는 시내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곳에 심기어진 나무는 많은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내려질 축복입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나안정복전쟁에 나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형통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가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주시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형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순종할 때 얻어집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말씀묵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묵상은 신앙인의 필수입니다. 말씀묵상이 없이는 결코 믿음이 성숙될 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받는 복은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향기가 나고 주님의 모습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