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21일(금) 52일째 #조선동아OUT 농성을 시작합니다.
동아일보 앞에서 어제는 전언론노조위원장 신학림샘이 피켓팅 하셨고 오늘은 새언론포럼의 박래부샘이 하십니다.
어제 조선일보 앞에선 조선투위위원장이신 성한표샘이 피켓팅 하셨는데 YTN플러스에서 촬영했습니다.
또 장지만샘과 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이신 김기준샘, 오산에서 매일 오시는 김병관샘, 더 멀리 아산에서 오신 언소주 회원이며 동행회원이신 황의대님, 박영호님이 피켓팅 해주셨습니다.
어제 2월 22일과 29일 광화문 토요집회를 홍보했는데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우선 2월22일은 집회없이 기자회견으로 대체되었으니 일정확인하십시오.
조선일보가 민족지였다거나 공과론 등의 증거로 1. 폐간, 2. 기사압수, 3. 4번의 정간을 홍보하니 그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강제 폐간이 아니라 적극 협력 폐간임을 알려드렸습니다.
요약하자면 현재의 조선일보 3대세습의 1대 방응모일때의 일로 비행기가 10만원할 때 100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임원은 총독부 홍보신문으로 승진 이직했고, 강제가 아닌 적극 협력차원이라고 기사로 알렸었습니다.
둘째 기사압수도 알려드렸습니다.
요약하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이전의 초기 친일경제인의 조선일보였을 때 중 사회주의 계열의 박헌영 등이 기자를 하던 1년 동안 90건의 기사압수가 있고,
매국노 2인자? 송병준이 장악하던 3년6개월 동안은 82건의 기사압수가 있는데,
현재 3대 세습의 1대인 방응모 8년간, 그것도 3년 정도 사이에 고작 23건이고, 그나마 36년8월부터 폐간된 40년까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번째인 4번의 정간을 알려드립니다.
결론을 미리 짓자면 3대 세습 현재 조선일보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첫 번째 정간은 친일경제인들이 창간하자마자 몇번의 기사압수를 당하다가 1920년8월27일 서울에 온 미국회의원단 일행을 환영하는 조선민중을 탄압하는 일본 경찰을 비난한 사설인 (자연의 화)라는 논설로 1주일 간의 정간 처분을 받습니다.
두 번째 정간은 1차 정간이 풀리자마자 이틀 후인 1920년 9월5일 사이토 총독(문화통치를 천명한 총독)은 무슨 이유로 우리 신문을 정간을 시켰냐며 배일신문이 되겠다는 사설로 3달정도 정간되었습니다.
친일경제인이 사장일 때 두 번의 정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두 번째 정간을 풀기 위해 발행인 편집인을 모두 바꾸고 송병준에게 인수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연히 매국노 2인자답게 송병준의 조선일보 3년 6개월동안 82건의 기사압수는 있지만 정간은 없습니다.
그래도 매국노 송병준이 사장으로 있을 때 82건의 기사압수될만큼 강한 항일기사나 상세한 의열단 소식도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기자들이 많았고 편집권을 가지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결국 송병준이 경영을 포기할 정도였고, 그래서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가 전재산을 쏟아부어 매입하며 민족주의자 체재의 조선일보가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정간은 민족주의자인 월남 이상재사장일 때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들이 쓴 1925년 9월8일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로 일제의 조선통치에 대한 불만을 썼다가 정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에 압력을 못 이겨 박헌영 등의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 17명을 해고하는 조건으로 정간을 풀었습니다.
네 번째 정간은 민족주의자 안재홍 사장일 때인 1928년 5월9일 제남사변(장개석의 국민군을 견재하려고 일본이 군대를 보내 제남에서 전투)의 벽상관 - 다나카 내각의 대모험이란 사설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설은 제남사변은 일본이 발표한 남경정부의 약탈행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다나카 내각이 대모험적으로 침략한 것이라는 내용의 사설이라 133일간 정간되어 결국은 안재홍 사장이 해고되고, 신간회도 타격을 입었던 것이 4번의 정간 마지막입니다.
이렇게 친일경제인이 사장이거나 매국노 2인자 송병준이 사장일 때도 기사압수, 정간 등으로 탄압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의 기자들의 기개가 살아있었습니다.
물론 정간을 풀기위해 항일 기자나 주필이 해고되었지만 일제에 대항한 기자들의 기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33년 3월에 방응모가 기존인가를 없애고 새로 인가를 받아 만든 새로운 조선일보는 1933년 3월부터 1936년 8월까지 23건의 기사압수만 있었고, 정간도 없으며, 총독부의 신문 폐간령에 큰 돈을 받고 총독지로 이직하며 협력해야 한다며 신나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