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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동체가 주는 유익(히10장24 25)
성경본문:히브리서 10:24-25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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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가?
지난 M-Vision Project를 통해 저에게는 참 의외의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 성도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부담스러워할까?’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꼭 해야 할까?’
저는 목회하면서 목자로서, 교회의 리더로서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교인들이 가장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그래서 좋은 목자란 목회자 중심이 아니고, 교인 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언젠가 <시카고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한 이야기를 저는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는 교인들을 위하여 복음 이외에 모든 것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나무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된 것이죠. 소그룹 모임이 “‘복음’과 관계있는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인들을 바꾸어서라도 가야만 하는 목표가 분명한가?’ 그리고 ‘그 목표는 목회자인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구별은 만나 교회의 사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구별이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지를 판단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속에 내려진 결론입니다.
우리가 나무공동체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잘못 생각하게 한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공동체는 ‘모임’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 모임을 통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그룹 모임이기에, 이것은 설득과 권면의 차원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사역이었다면, 나무 공동체는 우리 삶에 대한 문제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다루는 사역입니다.
여기서 잠깐 모르는 분을 위해 나무 공동체를 소개하겠습니다.
교단마다 교회마다 소그룹 모임이 있지만, 그 명칭이 조금씩 차이가 있고, 그 이름에 따라 모임의 특성이 조금씩은 다른 것 같습니다.
만나 교회에서는 ‘나무’라는 소그룹을 통해 풍성한 삶과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사역의 목적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고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열매의 씨앗은 또 다른 나무를 만들어 갑니다.
만나 교회에서는 나무를 이루는 구성원을 ‘열매’라 부르고, 그 나무를 잘 가꾸어 나가는 사람(인도자)을 ‘나무 리더’라고 부릅니다. 이 나무가 모여서 동산을 이루는데, 만나 교회에는 청년동산과 새가족 동산을 포함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이름을 딴 동산이 있습니다.
각 동산에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사님과 동산을 지키는 평신도 ‘동산지기’가 있고, 동산 구역마다 책임지는 ‘코치’ 그리고 동산구역 안에 나무 리더와 열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 각 나무에는 다음 나무를 책임질 인턴을 교육하고 있으며, 건강한 나무는 새로운 리더와 함께 번식해 나갑니다. 그런 나무 공동체가 만나 교회 안에는 624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풍성한 만남과 열매를 위해 다양한 나무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왜 나무가 필요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떠올랐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서로’라는 말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서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 공동체를 통해 ‘서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돌아보아’ 그 누군가 함께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로 돌아본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서로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면 정말 쉽지 않은 관계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 한 정거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히지 않았습니다. 5분여를 기다렸는데도 문이 닫히지 않으니까, 궁금하여 이 사람이 밖을 내다보는 순간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사람의 목이 문에 끼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하하하하” 웃는 것입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니 문에 목이 껴서 아플 텐데 뭐가 좋아서 웃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글쎄,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문에 목이 끼었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함께하는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은 적이 없나요? 오늘 말씀 중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서로 돌아보는’ 이유가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공동체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바꿔줄 만한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나무 공동체”가 만나 교회의 사명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무 공동체를 통해 우리의 소속감을 분명히 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것입니다.
우리 나무 공동체의 승리는 무엇인가요? 결국, 예배, 훈련, 섬김의 부르심에 합당한 소그룹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개인적 예배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만남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서로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을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우리를 훈련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시지 않나요?
우리 삶에 가장 축복된 일이 무엇일까요?
신앙 안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내 삶이 바뀐 그런 이야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만남 말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에게는 1994년 여름 어느 수련회에서 만났던 목사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유학시절 공부하며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였습니다.
“김 목사! 한번 포기하면 또 다른 일을 만날 때 포기하게 되는 거야. 힘들지만, 끝내세요.”
그 말 하나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죠.
그 다음부터 계속 이어진 그분과의 관계는 이제 제 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그때 그 목사님을, 그 교회를, 그 부부를, 그 장로님을….” 같은 이야기들이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섭리적 관계와 삶을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섭리적 관계는 예배 공동체보다는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그룹은 ‘예배’가 아닙니다. 누군가 설교를 하거나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도 아닙니다.
혹시 인도자(리더)들에게 그런 부담이 있다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는 여러분보다 제가 더 전문가고, 성경공부는 목사님들이 여러분보다 훨씬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일은 목회자들보다 세상의 삶을 살며 믿음을 지켜나는 여러분의 믿음의 선배들이 더 잘하고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를 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처음 신앙생활을 하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회사에서의 회식은 너무나 힘든 자리었다고 합니다.
술자리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인식이 되어있었으면 좋을 텐데,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하죠.
그때 한 신앙의 선배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답니다. 회식자리에 가면 꼭 기도를 하되 오래 하라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권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정하게 될 거라고.
시어머니가 같은 교회의 권사인 어떤 며느리는 어느 날, 나무 공동체 모임에서 너무나 어렵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답니다.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 시어머니가 집에서는 자신을 너무너무 힘들게 하는데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노라고.
그때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신앙의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를 받았노라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하므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노스포인트 교회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섭리적 관계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개방형 그룹이 아닌 폐쇄형 그룹을 중심으로 모델을 세웠다. 성인 그룹을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신 우리는 혼신을 다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가꾸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그룹’의 성인들은 2년 동안 함께 지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교육부 사역에서도 우리는 섭리적 관계를 유발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
예컨대 초등학교 1학년 반을 인도하는 성인은 그 아이들이 5학년이 될 때까지 그들과 (또한, 학부모들과) 함께 지낸다. 그러면 장기적 관계의 가능성이 생겨날 뿐 아니라 주말 시간 이외로까지 영향권이 확대된다.
외부인인 당신은 그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음악과 실내의 열기라고 생각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룹 리더들 때문에 환경이 특별해지는 거라고 당신에게 말해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참다운 교회의 기능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에 대한 생명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돌아보는 사람들의 유익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이 참 좋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돌아본다”는 것은 피상적 만남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진지한 만남으로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서로”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죠.
‘서로’라는 공동체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나 교회의 나무공동체가 ‘사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공동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 세상의 모든 지체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 있는 “지체의 비유”를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우리 몸의 어떤 것도 서로에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란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갑니다. 호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가 자리에 드릴을 가지고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자리에만 구멍을 뚫으니까 염려하지 마!”
그런데 정말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요?
죄는 절대로 혼자 짓지 않습니다. 공동체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영향력이 확산됩니다. 이 땅의 문제는 한 사람의 부정적 영향력으로 망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하고 추하고 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조차도 우리가 붙들어 주므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4장 9~11절입니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공동체란 좋은 일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험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순간은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죄의 위협 아래 있을 때이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춥고 서러운 곳일 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자멸하는 것이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악의 위협 가운데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을 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냈던 편지를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2~7절의 말씀입니다.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마도 빌립보 교회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이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편지를 쓴 것 보면,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절에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말한 것을 보니, 그들 가운데 기쁨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 공동체에 사도 바울이 권면한 것이 무엇이냐면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조금 더 양보하는 마음, 조금 더 배려하는 마음, 조금 더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상해 코스타에서 가수 션과 함께 며칠을 보낼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부부가 살다 보면 화가 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화를 그 날이 가기 전에 풀어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화난 모습이 아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주님의 가까우심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이 가까워져 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사람이고, 우주적으로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보게 될 텐데 말입니다. 서로에게 민망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Action Plan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에도 같은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모이기를 더욱 힘쓰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역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우리가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공동체가 좋아지리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모임은 서로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연예인 중의 하나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노총각입니다.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아버지! 결혼하면 좋아요?”
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연애는 서로 만나서 좋은 것을 같이 하는 거야! 그러나 결혼은 서로 만나서 힘든 것을 같이 하는 것이지!”
참다운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가 되고 한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허물도 보고 어려움도 같이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자신만을 만족” 시키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지만, 서로서로 만나야 합니다. 만남의 횟수만큼이나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만남을 위해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 땅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옴을 감지하는 때입니다.
참아야 할 때입니다. 더욱 힘을 내야 할 때입니다.
지난 7월 교역자들과 함께 울산바위에 올랐습니다.
보통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힘든 산이 아니지만, 1년에 한 번쯤 운동화를 신거나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흔들바위에서 울산바위로 오르는 1km가 무척 힘든 구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산을 올랐습니다. 특히 교육부 전도사들은 교육부의 두 여자 목사님을 에워싸고 끝까지 올랐습니다. 도저히 오르지 못할 것 같았던 그 산을 모두 오르고 너무나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기 힘들 때는 이 산에 길을 놓은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책을 읽기가 힘들 때는 책을 쓴 사람도 있음을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함께 격려하며 함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Action plan이 될 듯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임은 무엇인지.
그 모임이 여러분에게 어떤 영적 유익을 주고 있는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모임에 참여해야 하는지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교회 전체를 리모델링했습니다. 교회의 숨어 있는 모든 공간을 다 찾아내 만든 것이 소그룹 룸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3층을 묵상하고 만날 수 있는 ‘북까페’를 만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 카페 파구스 10호점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원하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로, 여러 개의 소그룹 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커피를 사 먹지 않아도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의를 지켜줘야 합니다. 음식을 싸서 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제는 집에서 함께 모이기가 참 쉽지 않은 때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지난해 말에 다시 한 번 우리 교회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나 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교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모범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이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나무공동체 사역에서 ‘Action Plan’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언제일까요?
지난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건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28사단에서 있었던 구타 사망 소식이었죠. 4월 7일에 발생한 사망 때문에 전 군에 구타사고를 조사해 보니 무려 4,000건 가까이 보고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세상을 떠난 윤 일병을 바라보는 마음과 그를 때려서 죽게 했던 동료들 역시 한때는 피해자였고,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가 군목으로 근무하던 시절 첫 번째 임무가 사단 영창에 가서 면회하는 일이었습니다.
내무반에서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했던 한 형제가 화장실에서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 이후에 이 청년은 “관심사병”이라는 딱지를 달고 저와 오랫동안 함께 지나야 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시절 4건이나 되는 자살 사고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러한 구타 사고들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구타를 당하는 병사들이 문제가 있는 부적응자들이라고 생각했고, 그 친구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군에 갈 나이가 되니, 맞는 병사들이 더 걱정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이 절대로 어떤 규제나 원칙을 가지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국민일보 바이블 시론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누가 폭력과 관행의 고리를 끊을 것인가?” 누구나가 맞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고참이 되면 절대로 때리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받았던 고통의 씨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세상이 다 이렇게 돌아가도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기.”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가 꿈꾸고, 만나 교회의 사명이 “이 땅의 소망이 된다!”는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참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으로 격려하며 더욱 애쓰자는 말입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부는 고기의 씨를 말릴 수 없어도 낚시꾼은 고기를 멸종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에 중독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격려하고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나무 공동체를 통해 이 땅의 소망을 봅니다.
여러분이 참여하고자 하는 혹은 헌신하기를 원하는 소그룹에 표시해 봅시다.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여러분이 낼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를,여러분이 참여하고 싶은 소그룹은 어떤 것인지를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오늘 예배를 통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들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라게 될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