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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수기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아온 미국에 계신 수기 작가의 형님 내외분과 수기작가 내외분이 국내에 계신 여러 친척 어르신들과 친지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친척분들과의 대화 중 미국에 사시다 한국 방문하신 그 형님 집에 있는 배나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형님 집 정원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배 수확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청솔모였다고 합니다. 원래 다람쥐과 동물인 청솔모는 소나무나 잣나무를 좋아하고 밤, 도토리, 잣 같은 것을 먹으며 지내는데 어찌된 청솔모인지 이 청솔모는 배 열매가 맺히면 떼 먹는 통에 배 수확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어느 해 어느 날 우연히 옆 집 고양이가 뒤 뜰에 나타났고 그 순간 작가의 형수님이 ‘청솔모도 쥐과 동물인데, 고양이가 천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날 이후 형수님은 고양이가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주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마트에서 고양이 사료를 사다 놓고 고양이가 와서 그냥 먹을 수 있도록 사료 그릇을 나무 밑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청솔모가 사라졌고 달콤한 배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네요. 이 집에 가면 고양이 사료가 풍성하게 있다는 소문이 들고양이들에게 나서 동네의 고양이란 고양이는 모두 이 집에 몰려들었답니다. 그래서 그 들고양이들 먹이를 채워주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생각났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비밀을 농사에 빗대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농사 비유에서 ‘뿌리는 자’가 누구일까요? 우리는 지난 주 전체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서 씨뿌리는 농부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농작물이 싹트고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사탄이라고 들었습니다. 또한 사탄의 농간속에서 인간의 욕심이나 사회의 환경이 우리가 열매맺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천국 복음이며 천국 복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씨앗 하나로 엄청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결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실을 얻기 위한 여러 자연환경이 필요하고 결실을 얻기 위한 기후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결실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로 네 종류의 밭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과 관련되어져서 복음의 씨앗을 심으면 이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가치관과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고 삶 속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매맺어야 할 씨가 밭의 상태에 따라 열매맺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국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와도 이 땅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거나 맺지 못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가르쳐주는 여러 밭의 상태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에 방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 잠시 살펴보았듯이 밭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해 보고 정말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사역에 귀한 열매로 드려지는 인생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 첫째는 길가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팔레스타인지역에 가면 밭과 밭 사이에 약 1m정도 되는 좁고 긴 땅이 있습니다. 농부가 곡식을 가꿀 때 오고 가는 길입니다. 우리도 논이나 밭 사이에 고랑이 있습니다. 이 곳으로 농부가 왔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조금 다르게 농사와 관련이 없어도 밭 사이를 다닐 수 있는 꽤 넓은 길이 이 지역에는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농부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밭 사이로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통행로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기에 마치 포장도로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이 곳에 씨앗이 떨어지면 땅 속에 파묻힐 수 없습니다. ‘길가’를 우리의 심령으로 비유하자면 닫힌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심령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전히 굳고 강팍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특별히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따로 없는데도 그냥 거부하는 것입니다. 당장 교회에 다니면 술도 담배도 모두 끊고 일상적으로 입에 담고 살던 욕설도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못 나가겠다고 합니다. 혹은 가족 반대 때문에 나중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어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핑계 삼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길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데 뭔가 벽이 있고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저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혔어. 저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뭔가 편견이 있고 뭔가 고집이 있어서 대화가 되어지질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성경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심령입니다. 교만과 편견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들려주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 13,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너무나 극도로 예수님을 거부하며 예수님 사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선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섭니다. 이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주의적이라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편견의 색안경을 껴서 세상을 보기에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존재를 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신앙도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자신이 경험한 세계관이 자기만의 생각과 마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편협한 지식, 편견적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의 경험은 참 소중합니다. 인생에서 접하는 여러 지식적 통로를 통한 가르침을 받는 것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과 지식 체험이 한 쪽으로 몰리게 될 때 우리는 자기 나름의 고집이 생깁니다. 고집과 소신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흔히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좀 나이가 든 직장 상사들의 지시를 들으면서 어떤 경우는 ‘꼰대’라는 말을 씁니다. 물론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너무 고지식하고 너무 틀에 박힌 생각을 한다고 무조건 어른들은 ‘꼰대’라고 매도하는 젊은 층도 문제이지만 대체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틀에 박히고 사고가 고정되는 ‘꼰대’적 모습이 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점점 길가에 뿌려진 씨가 의미하는 것처럼 우리 심령의 상태가 길가로 변하는 것은 아닌 지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길가’ 같은 마음상태가 될 때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즉 심령에 말씀이 심겨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 1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복음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보았듯이 이 ‘악한 자’라고 표현된 이 말씀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사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심령이 길가와 같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길가와 같다는 느낌을 가질 때에라도 우리는 그 길가 같은 마음이 어느 순간 바뀔 수 있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심기신 복음의 씨,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복음전도 사역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돌아보며 절대 우리의 마음이 길가같이 굳어지지 않기를 노력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고 열매맺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 둘째는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0,21절입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돌밭’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돌이 많은 땅이 아니라 흙 밑에 바위가 많은 땅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틴에는 작은 석회석의 돌들이 엄청나게 많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이런 논, 밭을 그 곳에서 찾기가 힘듭니다. 수 많은 돌이 포함된 토지에서는 토양 자체가 좋지 못해서 식물이 자라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땅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빨리 나오지만 태양의 뜨거운 열을 견뎌낼 습기나 자양분이 부족해서 식물이 금방 시들어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게 되지만 뿌리가 없어 핍박과 환란이 일어날 때 넘어지는 사람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식물이 자라기 위해 햇볕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이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식물이 죽어 버리게 된 이유가 햇볕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성장하고 단련됩니다. 말씀으로 인해 당하는 환난이나 핍박은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환난과 핍박이 우리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이 굳건해지고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이유로 환란, 인내, 연단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박해를 이기는 데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처음 시작부터 박해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도망을 쳐야 했지만, 그렇게 도망간 사람들에 의해서 사방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기독교에 의해 정복을 당했습니다. 사자에 찢기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는 박해받던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했고, 권력을 갖게 된 기독교는 부패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이 없어지면서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권세가 정점에 이르렀던 중세 시대의 기독교는 미신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락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굳건하지 않을 때 참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 나오는 ‘데마’는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받아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던 사람입니다. 첫 사랑이 느껴졌을 때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스승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사도 바울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데마가 바로 돌밭의 심령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여 삶이 변화된 듯 보입니다. 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 복음을 버리고 신앙을 포기하며 뒤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슬픔이나 환난, 그리고 박해를 만나도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겠지만 뿌리를 내리다 멈춘 사람은 신앙과 천국을 포기하며 세상을 쫓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심령이 굳건하고 더 깊이 뿌리내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말씀을 사모하며 더 깊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우리의 돌밭을 치우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하는데 방해가 되는 돌들을 치울 때 신앙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깊이 뿌리내리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 셋째는 씨앗이 가시떨기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본문에 기록된 ‘땅’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토지의 흙은 싹이 틀 만큼 부드럽고, 뿌리도 깊게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싹이 자랄 수 없도록 가시떨기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떨기’는 부귀와 명예의 유혹, 혹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서 결실치 못하는 경우라고 설명하십니다. 기독교 정신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거나 철저하게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과 결별하고 사는 수도 있고, 프란체스코처럼 모든 물질적인 욕망을 끊고 가난을 벗하며 살아갔던 성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만 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정신과 신앙은 우리 각자 살아가는 현장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하고 신앙적 삶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장경제의 법칙 아래 이윤을 추구하고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제환경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바른 신앙의 가치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경제활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도 공정한 게임이 아닐 뿐 아니라, 내가 부도덕하게 이익을 챙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큰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내가 더 많이 갖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더 편하고 안락하게 살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며 타인에게 불이익을 끼치고 어떻게든 이익을 얻기 위해 양심에 거리끼는 일도 하게 됩니다. 또한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악착같이 재산을 모아 풍족하게 살아도 짧은 한 순간, 한 평생만 살다가 우리는 내세, 즉 천국과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천국 복음이 막히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아간 사람들은 잠깐 사는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꾸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이 세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진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시작했지만 조금 지난 후에 부끄러운 짓을 너무나 많이 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세상의 것보다 천국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재물에 대해서 잠언 말씀처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찾아서 같이 읽어볼까요? 빌립보서 4장 11~13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배고픔, 비천하게 낮아짐, 핍박, 가난 등의 환경에 놓여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그 믿음이 어디서 나올까요? 정말 이런 삶이 우리에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가시떨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시떨기’가 바로 부와 명예, 권력등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수 많은 욕구, 욕망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런 유혹 속에서 이겨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열매맺는 심령, 열매맺는 땅에 대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옥토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국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복음의 경제성은 25%입니다. 산술적으로 이 말씀을 보면 씨앗이 네 군데 땅에 떨어져 한 곳에서만 결실을 얻었기에 확률이 4분의 1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떨까요? 씨앗 4개가 떨어져서 3개는 사라지고 하나만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그 하나가 100배, 60배, 30배를 맺었다고 한다면 이건 엄청난 결실이 아니겠습니까? 처음 뿌려진 씨앗으로 계산하면 75%의 손실이지만 나머지 하나 4분의 1이 채운 결실이 막대하기에 절대 손해가 되는 농사는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천국의 일은 세상의 계산법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계산을 하면서 살면 결국 무너지겠지만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면 하나님께서 채우실 놀라운 결과는 이전의 손해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의 일은 세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세상적인 계산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제일 처음 전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대체로 역사공부 좀 한 사람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이런 분들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좀 더 공부한 사람은 대동강에서 쪽 복음을 전하고 죽은 토마스 선교사 정도로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구한말 의주 땅에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네 사람이 만주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했던 사람들로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오고 싶었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님을 만주에서 만난 것입니다. 선교사 두 분은 그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한국말을 가르쳐주면 사례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선교사에게 말을 가르쳐주면서 접하게 된 성경을 함께 읽고 배우면서 선교사님을 만난 지 3년 만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게 되었고 그들 스스로 세례받기를 자청했습니다. 1876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들어온 것이 1885년이니 선교의 문이 열리기 전 9년 전 만주에서 최초의 조선인 세례교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직 조선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데 이 네 명은 선교사 두 분을 도와 만주지역에서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번역되었고 나중에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이 번역성경을 읽고 조선말을 준비해서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1887년에 서상륜과 백홍준, 이 두 사람이 성경책을 낱장을 만든 후 모두 새끼줄 사이에 묶어 가지고 들어와 다리미로 펴서 성경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 ‘서상륜’은 황해도 송천, 한글식으로는 소래마을이라는 곳에 성경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 때 마을 총 가정수가 쉰 여덟 가정이었는데 그 중 쉰 가정이 예수믿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교회로 황해도 송천에 소래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887년에 백홍준 장로님에 의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가 세워졌고 최초의 조직교회로는 새문안교회가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30여년이 지난 지금 수 만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천 만 성도들이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기적입니다. 씨가 옥토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우리 마음을 옥토와 같이 만들자고 해서 우리의 심령이 성경이 열매맺을 옥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을 주관하시며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갈아 엎으셔야 가능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매 번 씨 뿌리기 전 논밭을 한 번 갈아엎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심령을 말씀을 받기 전에 갈아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매 주일 말씀 듣기 전에 우리 마음을 갈아 엎어달라고 성령님께서 역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말씀듣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며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우리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기를 소망하며 우리 마음을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이 좋은 밭, 옥토와 같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키실 줄 믿습니다.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항상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며 씨를 뿌려주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