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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철학
A Ecological Philosophy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 그런 철학은 진화적이고 생태적인 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새로운 견지에서 전통적인 철학적 범주들
―예를 들면, 외양과 실재,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에 관여한다.
아래에서 나는 이런 범주들 각각이 알바 노에, 야곱 폰 윅스퀼 그리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생태적
통찰에 의해 변환되는 방식들을 요약한다.
이런 영역에서는 행해져야 할 작업이 훨씬 더 많이 있지만, 이 글은 최소한 생태학이 미래에 끊임없이 철학
을 어떻게 변환시킬지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한다.
첫째, 외양과 실재. 약간 상이한 방식이긴 하지만 노에, 폰 윅스퀼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모두 이런 구별
짓기를 다룬다.
노에는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 사이의 현상학적 구별짓기를 다룬다.
노에의 경우에 현전될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양식(style) 또는 접근 양태(mode of
access)와 관련되어 있다.
비슷하게, 폰 윅스퀼은 나타나는 현상과 접근할 수 없는 본체 사이의 전통적인 칸트적 구별짓기를 따르는데, 본체는 모든 외양에 대한 원인으로 활동한다.
화이트헤드 역시 외양과 실재라는 언어로 작업하지만, 그는 이런 구별짓기를 진화적 과정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각각의 설명은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
는 것 사이의 구별짓기는 고정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생태적 영역으로 개방한다.
생태적 철학은, 진화적 과정을 포함하면 현전과 부재, 외양과 실재 사이의 구별짓기가 지속적으로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존재론과 인식론. 육화와 이해는 궁극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노에와 폰 윅스퀼의 생태적
주장을 수용한다면, 존재론, 즉 존재하는 것에 관한 연구와 인식론, 즉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연구 사이의 구별짓기가 또 다시 붕괴되거나 얽히게 된다.
앎과 육체가 상당한 정도까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면, 어떤 존재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찌기 화이트헤드가 거부한 것으로 이해된 칸트적 태도에서처럼 존재론이 인식론으로
완전히 붕괴되는 것에 해당하지는 않으며, 그리고 때때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으로 불리는 것에
서 보듯이, 그것은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붕괴시키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이 동물행동학(ethology)이라는 개념 내에서 재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자가 달리 알기 위해서는 그 존재자 역시 달리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물행동학이라는 개념은 앎과 존재함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반면에, 또한 그것은 우주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것과 지식 또는 경험으로 번역될 수 없는 것 사이의 중대
한 분리로 내가 간주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폰 윅스퀼의 동물행동학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칸트의 선험적
도식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칸트의 경우에, 선험적인 것은 선천적인(a priori) 것, 즉 경험에 독립적인 것으로서 모든 경험적 사건들의
유입을 조직하기 위해 작동하는 인간의 구조들을 가리킨다.
칸트의 정식에서 선험적인 것은 그 속에서 특수한 경험적 사건들이 체험의 내용으로 형성되고 전개되는
보편적 구조이다.
그렇지만,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더 근원적이고 생태적 우주생성의 견지에서 유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선험적 구조 자체, 또는 더 정확하게 칸트가 선험적 자아라고 부른 것이다.
생태가 철학을 위한 새로운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은 관계적이고 진화하는 범주
들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 유기체에게는 선험적인 구조인 것이 다른 한 유기체에게는 경험적 소여이며, 그리고 어떤 외양들을 제공하는 구조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발달되고, 다종적이며,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체험이 경험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종류의 인지적 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선험적인 것의 구조 자체가 현실태와 환경의 외부 생태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도 정말
이다.
그러므로 형태를 부여하는 마음의 텅빈 공간 내에서 의식의 흐름의 분출(upwelling)에 관해 말할 수 있
다면, 역사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 동안 조직화 구조 자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외부 활동의 유입(inwelling)
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생태적 철학의 견해에 따르면, 선험적인 것은 그 속에서 현상이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출현할 수 있는 텅빈 보편적 공간이 아니라, 그 대신에 역사적으로 포화된 매체, 즉 사유의 흐름들이 체험의 부분적 조직자로서
뭉치게 되어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획득된 개념적 이해의 지류들로 가득차 있는 매체
이다.
마음은 강과 지류들의 그런 교차점일 뿐이다.
마음은 쉽게 대립되는 술어들(예를 들면, "경험적"이라는 술어와 "선험적"이라는 술어)의 대화가 아니라
생태적인 것, 즉 오랜 시간 동안 보존되는 수렴 사건들의 창의적인 다양체이다.
더 큰 존재의 생태계 내에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의 근거를 마련하는 노선을 따라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세계 구성체들의 담지자로서 활동하는 하나의 지구"에 관해 글을 적고, "이제 [지구는] 모든 자기 성찰을
위한 위치적 조건으로 작용하는 선험적 별", "식물, 동물 그리고 문화들을 품고 있는" 별 그리고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과 통일되어 있는 모범적인 혼성물"이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선험적인 것은 지상의 것에 결부되어 있고 지상의 것에 의존한다.
이런 지구중심주의적 설명―여러 가지 면에서 칸트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반전―에서는 철학이
라고 하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의 근거를 제공하며, 단단히 얽어 매는 것은 지구의 지질학적 조건
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생태적 철학은 외양과 실재,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을 얽히게 만든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서술하면, 생태적 철학은 구조와 내용, 물질과 의미 사이의 지속적인 붕괴를 바라본다.
외양과 실재는 고정된 영역들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얽혀 있고 반전되는 영역들이다.
앎과 존재함은 두 개의 별개 활동이 아니라 유기체들의 관심, 가치 그리고 결단들에 의해 추동되는 깊이
연결된 역능들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 속에서 사건들이 전개되는 고정된 용기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자체의 모험에서
비롯되는 창발적 특징들이다.
이것은 생태가 환경 속 유기체들―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환경에 처해 있는 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훨씬 더 모호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성 공간 자체가 생태적이고, 진화적이며, 재귀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생태적 구조 같은 것을 갖추고 있으며, 우주는 생태적 사건 같은 것이다.
개념과 감각
Concept and Sense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I
이어지는 몇 개의 블로그 글에서 나는 일단의 친숙한 문제들―한편으로는 지식이 세계과 맺는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이 주체와 맺는 관계―을 탐구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의문들은 사유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인 이미지, 즉 표상적 이미지(representational image)와 발제적 이미지(enactive image)와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와 앤트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저작들에서 이런
구별짓기의 변양태들이 발견된다.
스탕제의 경우에는 관념의 생태와 실천의 생태 사이에서 이런 구별짓기가 발생한다.
피커링의 경우에는 지식의 표상적 어휘와 수행적 어휘 사이에서 이런 구별짓기가 발생한다.
나는 스탕제와 피커링과 함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표상적 설명과 발제적 설명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좋은 이유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대신에 나는 그것들이 학습의 생태에 있어서 상이한 순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표상은 아직 내부화되지 않은 개념이고, 그래서 아직 주체의 세계 체험의 일부가 아니다.
발제는 환경을 지각할 수 있는 주체의 역량의 일부로 통합된 개념이고, 그래서 자체 환경에 대한 주체의
실천적 개입의 일부이다.
이런 순간들 사이의 이동은 개념이 이론적 가능태에서 실천적 현실태로 이동하는 것을 특징짓는다.
이어지는 블로그 글에서 나는 개념이 의식적 표상에서 환경에 개입할 수 있는 주체의 능숙한 능력의 일부로 흡수된 육체의 역량으로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제안한다.
첫째, 개념이 주변 매체 환경에서 획득된 기호로 입수된다.
둘째, 개념이 주체의 지각적 장 속에서 의식적 표상으로 간직된다.
세째, 개념이 의식적 표상에서 경험의 조직자로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역량으로 이동한다.
이 세 단계를 서술하기 위해 먼저 나는 감각 작용에서 수행되는 개념의 역할을 논의하는데, 나는 이것을
지식과 경험 또는 관념과 실천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다음에 나는 상이한 개념과 감각들을 상이한 종류들의 주체들과의 접촉으로 그리고 접촉으로부터
운반하는 조건을 더 상세히 서술한다.
매체 환경의 역할이 이 부분을 논의하는 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감각 작용과 개념 작용의 이런 진행 중인 변환은 육체와 비인간 행위자들의 생태에 의해
발제되는 지식 생태로 가장 잘 서술된다고 주장한다.
II: 지식과 경험
지식에 대한 표상적 설명과 발제적 설명 사이의 구별짓기는 새롭지 않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들은 이론적 인지 양태 대 실천적 인지 양태을 둘러싼 이전의 논쟁들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칸트적 틀에서는 사물들이 경험되는 조건이 사물들이 사유되는 조건에 선행하지만, 사물들이
사유되는 방식은 사물들이 어떻게 경험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의문은, 현상이 사유 대상(개념)에서 경험 대상(직관)으로 어떻게 이동하는가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개념적 표현이 어떻게 감각적 경험으로 편입되는가?
칸트적 견해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감각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직관 형식들(시간과 공간)과 선험적으로
분석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오성 범주들은 경험에 선행하는 것, 즉 경험에서 유도되지도 않고 경험 속에서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사유와 경험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전제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화적이고 생태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런 선험적인 것―여기서는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라기보다 인식론적 의미에 한정된―은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다.
생태적 우주에서 범주와 직관들은 자체의 움벨트를 두루 돌아다니고 파악하는 역사적으로 창발적이고 우발적인 육체들의 발제된 역량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적 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익하다.
직관은 사유에 감각 소여를 제공하며 개념은 직관을 조직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개념 없는 직관은 우리에게 서술되지 않은 날것의 감각 인상들―숲, 꽃 그리고 비가 아니라 색깔, 냄새 그리고 소리의 조각들―만 남길 것이다.
개념은 감각 소여를 전(前)성찰적으로 종합하는 수단이거나, 또는 더 낫게 말하자면, 개념은 새로운 종합적 대조들을 경험적 권역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개념과 감각에 대한 생태적 접근 방식의 결과는 인간 육체가 항상 획득된 지식과 물리적 지각의
교차점이며, 그리고 이것은 육체는 그저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신하는 것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결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에 보이는 것은, 특수한 세부 내용과 특질들에 주목한 채,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육체에 부여하는, 그것에 관해 입수 가능한 지식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교차점을 시각화하는 한 방식은 생태적 인지는 인지적 지각을 육체에 의해 수행되는 육체 행위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지 활동과 지각을 서로 얽히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육체의 지식 생태 속에 주어지는데, 지식 생태는 현상이 의식에 현시되는 데 도움을 준다.
알기와 감각하기가 연관되어 있는 이런 맥락에서 지식은 개념적 역량, 즉 유의미한 방식으로 차이와 대조를 중개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지식 생태는 개념과 감각이 교차하는 공간, 즉 누군가가 세계와 상호작용할 때 주체를 주체로 조직하는 데
참여하는 개념적 감각기(sensorium)를 나타낸다.
지식은 획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솜씨이다. 지식은 새로운 대조들에 대한 조율이다.
III: 개념에서 역량으로
이제 의문은, 개념적 이해가 경험적 관찰에 어떻게 옇향을 미치는가이다.
물리학자, 식물학자 또는 건축가의 경험적 관찰 결과가 문외한의 경험적 관찰 결과와 같지 않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지각 양태들이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전문가는 나름의 방식대로 경험적 관찰에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식별 역량을 넘어서는
특수한 의미의 정교화, 일단의 지식, 훈련 그리고 경험을 부여한다.
그런 식별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물리학자, 식물학자 또는 건축가는 어떻게 되는가?
각 솜씨에 요구되는 역량들을 경험적 관찰에 혼입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작용들은 무엇인가?
각 경우에, 훈련 과정은 수많은 기계, 장비 그리고 제도뿐 아니라 수많은 정향된 실천과 행동을 포함하며,
게다가 관념들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이론적 활동도 포함한다.
관념들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실천에 선행하지도 않고 실천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이런 활동은 경험적 실천과 환경의 유도성(affordance)의 한계 내에서, 현실의 급습과 흐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즉각적인 사건들의 내용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대체적으로 학습이라는 과업은 반복과 실천이 그저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하게 개념의 내재화를 통해서 주체를 변형시키는 계기가 되는 맥락에서 반복과 실천을 조장하는 공간들을 생산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학습은 지각이 어떤 서술 역량과 연결 역량의 발제된 수행이 되는 지각 역량에 있어서의 안정적인 변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개념은 진입하여 훈련받은 개체의 경험적 솜씨 집합의 일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둘 다 인간 학습의 얽힌 단계들인 표상의 실천과 실천의 표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개념화는 사변적 솜씨이고, 주체를 즉시성에서 현재에 의해 주어지는 가능성의 공간들로 도약시키는 육체의 수행이다.
개념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는 특정한 유형들의 대조에 접근하기 위해 육체가 지각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개념에 대한 알바 노에의 규정인데, 나는 대체로 이 규정에 동의한다.)
다수성에 있어서 개념들은 인간 유기체의 조직들과 교차하는 학습된 정교화 역량들의 층위들이다.
개념들은 새로운 관심의 스펙트럼들을 발달시켜 이전에는 활용할 수 없었던 판단용 벡터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학습은 지식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미각을 가로지르는 생태 공간을 규정한다.
이것은 지식이 인간 육체의 감각 체계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분리된 표상들의 층위가 아니라 오히려
지각 자체의 조직의 일부이다.
지식은 물질적 현상이고, 학습은 생태적 사건이며, 둘 다 지각과 동시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개념과 감각의 교차가 지식 및 지식이 인간 유기체와 맺는 관계에 대한 생태적 이해의 기초이다.
개념을 지각의 역량 또는 솜씨로 간주하는 것은 지향성(intentionality)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지향성이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는 테제라면, 생태적 견해에서 볼 때 지향적 과정의 구조 자체
가 창발적이고 조형적이며, 새로운 대조 양태와 가치 평가 양태에 열려 있다.
개념 획득을 통해 육체의 감성을 명확하게 표명함으로써 육체는 환경 속의 더 세밀한 세부 내용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는 차별적 세부 내용의 대조가 고양되고 수준이 향상된 생태이다.
내재화된 개념, 즉 육체의 역량으로 대사된 개념은 특수자들 사이에서 차별화하고 판결할 수 잇는 새로운
능력을 낳는다. 지식은 새로운 움직임과 정통한 판단을 위한 자원이다.
IV: 매체 환경
지식의 내재화는, 우리가 다른 현상들에 맞서서 어떤 현상을 향해 용도를 배치하는 상이한 지각적 기체
들을 우리 속에 전파하는 상이한 지식 생태들에 흡수된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정도로 환경적인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한번 더 이렇게 변환된다.
지식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누가 지식을 입수할 수 있는가?
어떤 육체가 어떤 역량을 개발할 수 있는가?
특정한 매체 감각기의 구성은 어떤 지식과 실천들의 도입과 분배를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발제적 접근 방식에 따르면, 기록된 지식은 사건들의 일반 집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매체
속에서 반복 가능한 역량을 기입한 것이다.
예를 들면, 텍스트는 일종의 기입 장치인데, 브뤼노 라투르의 술어를 사용하면, 새로운 경험적 관찰 역량
들을 위한 유도성으로 가득찬 매체 생태이다.
텍스트는 개념적 또는 잠재적 유도성, 즉 실천적 가능성에 대립되는 이론적 가능성을 다룬다.
잠재적 유도성은 현재 시나리오에 대한 대안들을 상상할 수 있는 개념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텍스트는 미래에 다른 한 사람이 새로운 지각 솜씨를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일단의 유도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과거의 인지적 성취에 대한 기록이다.
이런 유도성 덕분에 참여, 행위 그리고 식별을 위한 새로운 역량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는 변형을 불러 일으키는 생태이다.
그렇지만 개념의 잠재력은 텍스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솜씨를 획득하기 위해서, 즉 텍스트에 몰입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지각이 입수할 수 있는 것을 집단화하기 위해서 독자가 상세히 검토해야 하는 개념적 문제들에 의해 입수할 수 있게 되는 대조들 속에 있다.
또 다시 입수 가능성의 집단화는 개념-주체 관계의 생태적 본성을 드러낸다.
텍스트는 인간 실천에 의해 발제되는 잠재적 토포스(topos)―인간에게 다시 접혀서 새로운 사유 생태들의
변화하는 윤곽을 따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포스―를 제공한다.
도구로서의 개념과 역량으로서의 개념
알바 노에(Alva Noe)의 최근 저작 <현전의 다양성(Varieties of Presence)>에서는 지각과 인지에 대한
발제주의적(또는 "행위주의적") 설명이 전개된다. [...]
개념에 관한 서술에서 노에는 두 가지 정의 사이에서 동요한다.
첫번째 정의에서 노에는 "concept(개념)"라는 낱말의 어원학적 기원에 의존하여 개념은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고 넌지시 말하는 반면에,
두번째 정의에서 노에는 오성(이해)은 일종의 능력 또는 역량이며, 개념은 신체가 주변 환경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일 뿐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따른다.
노에의 정의들 가운데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대신에 나는 두 가지 정의
―도구로서의 개념과 역량으로서의 개념―가 "학습"이라고 하는 변형 행위 내의 두 가지 상이한 순간을
나타낸다고 제안하고 싶다.
나의 작업 테제는, 도구로서의 개념과 역량으로서의 개념 사이의 차이는 개념이 이해되거나 내재화된 정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순간에 개념은 (독서, 논문 쓰기, 또는 교사와 동료들과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서) 거듭해서 실천
하거나 연습해야 하는 일련의 진술로 존재한다.
그런 연습의 목적은 어떤 개념의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그 개념을 오성의 솜씨,
즉 세계에 대한 새로운 능숙한 접근 방식들을 낳는 주체의 지각적 매트릭스 내에서 대사되는 한 요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서의 개념은 사용자에 재귀적인 도구이고,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의 개념을 주체의 변형이 특수한 방향―즉, 개념이 전제하는 솜씨의 방향―으로 진전할수 있게 하는 환경 또는 장치
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체에 대한 개념의 관계는 생태적 관계이다.
주체가 다양한 현상적 특수자들을 포섭할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가용 관념들의 저장고에 어떤 새로운 개념이 부가되는 동안 주체는 그대로 남지 않게 된다.
개념들은 부가적이지 않고, 그것들은 누적적이며, 그래서 개념들은 학습을 통해서 주체의 변형을 발제한다.
학습 과정[...]은 주체와 개념의 합병과 개념 이해를 통한 주체의 변형으로 끝을 맺는 주체와 개념 사이의
공생을 개시한다. 도구는 사라지고 역량이 나타나는데, 말하자면, 개념은 더 이상 의식적으로 사유되지
않는다. 개념은 배경으로 사라져서 주체의 지각 능력의 일부가 된다. [...]
노에의 견해에 따르면, 주체는 능숙한 지각과 관여를 통해서 세계에 접근하지만, 접근을 수행하는 "나"는
항상 형성 중인 자아인데, 자아는 행동, 실천 그리고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는 자아 형성은 나중에 역량으로서의 개념으로 대사되는 도구로서의 개념에 의해 주어지는 훈련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이런 접근법 덕분에 노에의 은유들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어느 은유을 동원함으로써 얻게 되는 통찰을 희생하지 않게 된다.
또한 그것은 개념들이 다양한 지식과 매체 생태계들을 통해서 저장되고 순환될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고 그것은 개념의 행위주체성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환원주의적 행동주의에 의존
하지 않게 한다[...].
개념과 낱말
우리는 낱말 또는 진술을 그저 페이지 위에 새겨진 자국으로 간주할 수 없거나, 개념을 그저 명사로 간주
할 수 없다.
요구되는 것은 신택스(syntax), 즉 낱말들의 배열이다.
신택스는 세만틱스(semantics), 즉 진술의 의미가 출현하는 데 필수적이다.
신택스와 세만틱스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적 구조의 일부이다.
어떤 의미에서, 낱말을 구성하도록 배열될 때 문자들에게, 그리고 진술을 표현하도록 배열될 때 문장들
에게 고차적 의미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의미에서, 언어적 의미는 독자에 의해 파악되는 문자와 스페이스들의 배열일 뿐이기
때문에 "고차적"이라는 낱말은 공간적 은유일 뿐이다.
결국 이것이 바로 언어적 소통의 요점이다. 의미를 표현하는 것.
신택스와 세만틱스는 언어적 인공물을 이해하는 것의 실제적 동학의 일부이고 "텍스트"로 간주되는 것의
일부로 해석되어야 한다.
게다가, 흔히 진술의 내용인 개념들은 특정한 낱말들로 붕괴될 수 없다. 개념과 낱말은 서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낱말은 흔히 개념과 관련되어 있고, 개념은 흔히 다른 비개념적 사물과 관련되어 있다(그런데 개념은 다른
낱말과 다른 개념이나 심지어 개념화 또는 언어의 구조 자체와도 관련될 수 있다).
다수의 낱말들이 동일한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예를 들면, "one", "un", "하나" 그리고 "1"은 모두 동일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개념은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같은 "하나"를 가리키는 기호의 경우처럼―표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컨대, 단일한 울림 같은 소리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을 넘어서, 개념은 모든 종류의 생물이 이용할 수 있다. [...]
이런 전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단순한 정적인 단일체 또는 선험적으로 안정된 토대적 존재자로서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개념은 복잡하고 역사적이며, 개방되어 있고 관계적이며, 다종적이고 조형적이다.
낱말이 개념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인 접근권을 부여하더라도 언어는 개념에 이르는 특권적인 길로 간주될
수 없으며, 낱말을 위해서 개념을 버릴 수도 없다.
우리는 언어 사용이 개념 구상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들에 속한다고 여전히 인식하는 한편으로 개념을
곧바로 낱말로 붕괴시키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것은 유령처럼 출현하는 것―위에서 떨어지는 이상적 개념―
이 아니라, 그것이 자체의 비개념적 관여 대상과 얽힘에 따른 표현의 내용에 대한 감각적 파악인데,
낱말은 사유 활동 중에 개념으로 작동하는 자체의 과정을 통해서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개념은 자체의 외부적 표현에 앞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경험적인 것이다.
이것은 뇌와 육체의 활동에 부수하여 일어나는 현상이 결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