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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사랑 20241228
2시경에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병원입니다. 기림 님의 남편 맞으신가요?”
“네.” 내가 답했다.
“아내께서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셨습니다. 병원으로 와주세요.”
“네.”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직접 병원에 오라는 것을 보아 사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빗소리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묻혔다. 보내주기 싫은 듯 내 어깨 너머를 노려보는 상사에게 용무를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비가 빽빽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깜빡했다. 택시를 잡으려 손을 뻗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축 처진 나무들처럼 다 젖고 택시에 탔다. 창문 밖으로 버스 정류장이 지나갔다.
내가 기림을 만났을 때는 8월이었다. 나는 비를 맞지 않으려 버스 정류장 지붕 아래 서 있었다. 옆에 언뜻 본 사람이 앉아 “바다뱀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내가 들고 있던 책이었다. 모른 척하고 앉았는데 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조금 대화해보니 대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바다뱀에 관한 연구”는 나처럼 숙제로 읽는 중이었다.
“바다뱀이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인간만이 타인에게 공감하고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기림이 물었다.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글쎄요. 무리의 이익을 생각하는 본능 아닐까요? 다친 뱀장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무리에 도움이 되는 일일 수도 있어요.”
기다리며 바다뱀이 정의감을 가지는지, 왜 다른 상처 입은 바다뱀을 챙기는지 한참 이야기했다. 기림의 버스가 와 헤어졌다. 머릿속에서 그의 자신감 있고 생각 깊은 태도가 맴돌았다. 내 버스를 놓칠 뻔했다. 비를 지나 집에 가는 내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회전문을 밀고, 바닥에 웅덩이를 흘리며 데스크로 갔다.
“기림 환자 남편입니다.”
“B동 2층으로 가세요.”
나는 넓은 찻길을 지나 옆 건물로 달려갔다. 2층의 넓은 로비에는 침대가 여러 개 있었다. 기림이 그중 하나에 환자복을 입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의사인 것 같은 사람을 잡고 남편이라고 했다. 잠시 가더니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가벼운 중상입니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의사가 침대에 붙은 종이를 훑고 말했다. “머리와 뇌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없습니다.”
“아, 의식불명 상태는 아닙니다. 일종의 깊은 잠으로, 충격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내 얼굴을 보더니 의사가 덧붙였다.
“오늘 오후 자세한 검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무언가 적더니 침대 머리에 끼웠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기림의 침대를 병실로 옮기라고 했다.
나는 침대 옆 낮은 의자에 앉아 반듯하게 놓여 있는 기림을 한참 동안 보았다. 어깨에 걸쳐진 머리는 단정했고 피부는 깨끗했다. 감겨 있는 눈꺼풀 뒤로는 깊고 맑은 눈이 있었다. 피아노의 시 소리가 떠올랐다.
의자에 기대 거리를 보는데 유모차에 탄 개가 지나갔다. 문득 기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왜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까?”
가을이었고, 나는 기림과 눈처럼 내리는 낙엽 사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는 도시락 가방을 열어, 그릇과 물병을 꺼냈다. 여러 종류의 사료 위에 참치가 얹어진, 초밥 같은 것을 그릇에 놓았다. 물을 따른 뒤 지켜보던 고양이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으로 불렀다.
“물어봐야겠다.” 기림은 언뜻 그네에서 내려 그 사람에게 갔다. 잠시 대화하더니 돌아왔다.
“굶주려 아플까 봐주신대.” 그네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흠. 아이들이 노는 곳에서 주지 말라고 공고가 붙었는데.” 내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고양이가 귀엽기 때문이야. 귀여움을 느끼며 그 생물을 돌보는 것이 좋기 때문이지. 쥐는 돌보지 않잖아.”
“그럼, 결국 고양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보는 거네.” 내가 말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도, 단정하고 깨끗한 것도, 기림은 여전했다. 침대에 놓인 기림은 가볍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간호사가 기림의 팔에 튜브를 꽂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의사 선생님 지시입니다. 영양 보충이 필요합니다.”
나는 한동안 튜브를 타고 팔 안으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쳐다보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늦은 밤, 다른 의사가 왔다. 수염이 있고, 초록색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자, 이제 정밀 검사를 하겠습니다. X-RAY를 찍고 뼈에 손상이 있는지 살필 겁니다.”
조금 뒤, 간호사들이 들어와 침대를 밀고 나갔다. 나는 축축한 걸음으로 따라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기림을 쳐다보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눈을 감았다. 한 간호사가 무어라 말하자 다른 사람이 천천히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병원 사람들이 기림과 검사실로 들어갔다.
해가 검사 대기실 창문을 밝힐 무렵,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고 나왔다. 나는 다시 기림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침대 옆 낮은 의자에 앉았다.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일어나지 않는 거죠?”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점심때, 식당에 내려가 주스 한 잔을 마셨다. 돌아와 보니 파란 양복을 입은 키 큰 남자가 기림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의 손목에서는 무거운 시계가 번뜩였다.
“누구신가요?”
남자는 허리를 폈다. 나를 비스듬히 보며 결단한 듯 뱉었다.
“기림의 남편입니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머리가 아파서 말았다. 지나가는 간호사를 잡고 말했다.
“낯선 사람이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호자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보호자입니다.” 당당히 핸드폰을 내밀며 남자가 말했다. 그러곤 기림과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넘겼다. 손을 잡거나 껴안고 있는 등 사진이었다. 남자는 하얀 얼굴이 벌게져 숨 가쁘게 가방을 열더니 편지를 여럿 꺼냈다. 기림의 반듯한 글씨였다. 사랑해 등의 내용이었다.
남자는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밀치고 기림에게 갔다. 기림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기림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남자가 무어라 하며 나를 낮은 의자 위로 엎었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로 대기실에 있게 되었다. 대기실 한구석에 앉아 가끔 오가는 의사에게 상황을 물었다. 밤에는 물 밖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긴 의자 위에서 이리저리 펄떡였다.
눈을 떠보니 문밖에 의사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일어났나요?”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다행히 그렇습니다. 신체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잠시 멈추더니 이었다. “불행히도 환자의 뇌가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작습니다.”
나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가 조심스레 따라왔다.
기림은 헝클어진 침대에 눈을 감고 허리를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눈을 떴다. 깊고 차분했던 눈은 흐렸고,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말을 걸었다. 하려는 말이 많았지만, 하지 못했다. 대신 형식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괜찮아?”
기림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입에 무언가 묻어 있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굉장히 드문 상황입니다. 검사에서 자세한 결과가 나왔다면 조처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현재 치료 기술이 부족한 부분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나의 얼굴은 보더니 두 팔로 안아주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유감입니다.”
한참 후, 남자가 들어왔다. 침대 앞에 말뚝처럼 섰다. 기림은 남자에게 아는체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기림이 낸 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의사를 찾으러 나갔다.
병원에서 더 치료할 것이 없어 기림은 퇴원해야 했다. 병실이 붉게 얼룩졌을 때, 남자가 들어와 서류를 책상에 던졌다.
“저 사람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법적으로 책임 없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하며 문을 나선 지 3일이 지나, 나와 기림은 집에 돌아왔다. 기림은 서리에 앉아 가만히 소리를 냈다. 나도 의자에 앉았다. 기림이 읽던 책이 책상에 있었다.
“그 책, 나도 예전에 읽었는데. 유치하지 않아?” 며칠 전, 내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샤일록에 대한 묘사가 정말 재미있어.” 기림은 의자에 기대며 책 일부분을 읽었다.
“‘샤일록은 사실 악당이 아니에요. 그는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되고 싶은 사람에 가까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했기 때문에 샤일록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넌 어떻게 생각해?” 기림이 책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글쎄, 다른 사람이 정한 모습대로 행동하는 것의 슬픔에 대한 것 같아.”
“그럼 너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림이 물었다.
“슬픈 일이지. 나에게 선택이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 내가 A라는 것을 하고 싶다고 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B를 하기를 원하고, 또 그럴 거라고 믿고 있어. 그래서 나는 B를 해. 네 말처럼 이건 좋지 않은 일이야. 그런데, 나는 왜 A를 하려고 했을까? 바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가 A라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는 거지.”
“그렇지. 하지만 나는 여러 이유를 손에 쥐고 선택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 선택도 사실 더 무거운 이익에 의해 내려지는 거야. 결국 나의 행동은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 기림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
“너는 학생 때 공부를 왜 했어?”
“음.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내가 대답했다.
“좋은 대학교에 왜 가려고 했어?”
“좋은 직장에 가려고.”
“그렇지. 그러면 왜 좋은 직장에 가려 했으며 지금은 왜 일할까?”
“돈을 충분히 벌기 위해서야.”
“그래서?”
“음…. 너랑 영화를 많이 보려고?”
“그 말을 다시 해석하자면 너는 행복하여지려 한다는 거야. 잘 생각해보면,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어. 바로 행복 하려는 마음이야. 만약 네가 ‘굶주린 가족을 먹이려고’라고 답했어도 비슷해. 굶주린 가족을 먹임으로 네가 행복해지기 때문이지. 우리의 선택과 인생 뒤에는 행복 하려는 마음이라는 이유가 있는 거야.” 기림이 말했다.
“행복을 원하는 마음은 주체적이지 않잖아.” 내가 말했다.
“그렇지! 행복을 원하는 것은 생각하고 선택할 수 없어. 갈증과 식욕처럼 어마무시한 본능이지. 우리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 삶 전체를 움직이는 그 이유는 행복을 향한 본능인 거야.”
병원에서 돌아오고 시간이 지났다. 기림은 어린아이 같았다. 옷을 입는 것, 먹는 것,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 모두 세심히 도와야 했다. 자주 말을 걸었지만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 우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밝은 거실 전등 아래 앉아 의자에 죽은 동물처럼 걸려 있는 수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림은 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기림의 머리는 언제나 그렇듯,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헝클어져 있었고, 그 얼굴은 두껍고 질은 늪 같았다. 감긴 눈꺼풀을 든다면, 눈에는 차분함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간간히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기림을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배신자는 기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기림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외모가 다르고, 행동과 성품이 다르고, 나를 배신했다고 해서 기림이 아닌 걸까? 나는 무엇을, 왜 사랑한 걸까?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기림을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그의 성품과 외모였다.
왜 이런 것들을 사랑했을까? 기림이 읽던 책은 내가 놓아둔 그 자리에 있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다. 기림의 뜻깊은 말과 아름다움, 기림을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기림은 행복을 위한 도구였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며 기이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체우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기림의 껍질을 사랑하므로 충족시킨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본능이었다. 나 자신도 행복을 갈망하는 본능의 도구였다.
다시 시간이 지나고, 여름이다. 기림과 나는 산책하러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공사 중이어서 내가 기림을 안고 내려왔다. 비가 우비 위로 미끄러진다. 굶주린 가족을 먹이려 노력하는 것조차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기림의 말이 생각난다. 이제 그렇지 않다. 나는 기림을 사랑한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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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이유 없이 사랑할 때 사랑받는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도 행복의 도구로써의 삶을 넘어선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도 이런 사랑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인간에게 가능할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가능하더라도 지속가능할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 어떻게 보면 정말 미스터리한 기적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