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태어난다는 것 요한복음 3장 1-10절
오늘 본문 말씀은 자신앞에 나타난 한 유대 관원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표적과 이적을 운운하면서 당신이야말로 하늘이 낸 분이십니다 하면서 치켜세우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게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때때로 신비한 표적이(여기서 표적은 가나의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킨 이적을 말합니다)이 일어나고 놀랄만한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변화하여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도 그런 것이 우리가 이적과 표적 신비한 능력에 의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병 고침을 받아 회복되고 어느 순간 일확천금의 부자가 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사람을 만나야하고 삶을 살아야하고 관계를 이어가야하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시간속에서 자신의 인격,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꾸어야하는 저마다의 삶의 과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삶의 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롭게 태어나는 삶”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9일 세계적인 면세업체 DSF공동 창업자인 찰스 프랜시스 척 피니라는 사업가가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면세업에 뛰어 들어 40대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0대 평생 쓰고도 남을 돈들을 만지기 시작했고 한때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 콜로라도,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리비에라 등지에 호화저택을 두고 살았고 성대한 연회, 요트에 호화로운 생활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던 그가 50대가 되면서 “이 많은 돈을 가지고 살 권리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내가 일해서 번 돈 같지만 그 일에는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의 땀이 있고 일시적으로 나에게 몰려있을 뿐이지 이 돈들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수없이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쏠려있는 거고 그걸 가지고 마치 솔로몬 왕처럼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아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몰려들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50대 어느 날부터 호화로운 삶을 정리하고 삶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리무진을 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하고 비행기도 일반석으로 끊고 옷도 평범한 기성복을 입기 시작하고 고급레스토랑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살아있을 때 기부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 아일랜드, 영국, 베트남,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트남, 버뮤다, 쿠바 등지의 대학병원, 과학연구, 인권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시지 3년 전에 이미 모든 기부를 다 끝내고 기부 재단까지 없애고 샌프란시스코의 방두칸짜리의 소형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고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에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것보다 더 개인적으로 바람되고 적절하게 부를 사용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발에는 한 켤레 신발 밖에 신을 수 없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천국에서는 돈이 필요 없다.”라는 신조를 마지막까지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접하면서 성서의 솔로몬 왕이 생각났습니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될 뿐이더라는 거죠. 부귀영화에 호화로운 삶을 다 찾아다녀봤지만 거기에서 진정한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롭게 자신의 인생을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의 사이즈를 다 줄이고 자신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더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서 평생 그 일에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소비하던 인생에서 돌보고 가꾸고 키우고 의미와 보람을 낳는 삶으로 새롭게 태어난 거죠.
스미스라는 여성 심리학자는 <어떻게 나답게 살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노후든 젊은 시절이든 삶의 어느 때든지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것이 크든 작든 삶의 이유와 보람과 의미들을 느낄 때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그분은 삶의 의미화를 구성하는 4가지 기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는 유대감, 연결성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세상의 변화를 꿈꾸지 않아도 내가 가까운 사람들 안에서 연결성을 느끼며 존중받고 지지받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살아가는 이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넷플릭스 영화중 최근에 나온 <체험 증후군의 기록>이라는 다큐영화가 있습니다. 난민들을 대상으로 촬영한 다큐영화인데 유독 난민들 어린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증후군이 있다는 겁니다. 고국을 도망치다시면 빠져와서 제3국을 떠도는 난민들 아이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인데 체험증후군입니다. 아이가 살아 숨을 쉬기는 하는데 의식이 없습니다. 잠자는 아이처럼, 탈진해서 쓰러진 아이처럼 전혀 세상을 인식하지를 못해요. 밥도 못먹고 눈도 못뜨고 그냥 탈진된 상태에서 의식없는 채로 누워만 있어요. 적게는 6개월에서 1년 15개월 이렇게 적지 않는 시간을 누워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후군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아세요? 난민들이 임시 거소증을 가지고 임시거주를 하면서 살아가는데 난민신청이 수차례 떨어져요. 그런데 그걸 반복하다가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집니다. 그걸 의식이 없는 아이에게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매일같이 체념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를 안아주고 안정감을 주고 씻기고 안고 공원을 산책하고 세상이 믿을만하고 따뜻하고 살만하다는 안정성이 확보되면서 정말이지 기적같이 아이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 천진난만하게 활발했던 아이들이 존재자체를 거절당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얼마나 불안하면 모든 감각기관이 그 현실을 밀어내면서 체념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에 안정성이 확보되면서 마치 거짓말처럼 예전의 그 밝은 웃음을 회복해가는 거죠. 제가 그걸 보면서 우리가 나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정서적 관계적 안정을 주는 모든 행위, 그게 따순 밥한끼일수도 있고 손을 내미는 행위일수도 있고 다정히 어깨를 감싸는 일일 수도 있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어떤 행위이든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행위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삶의 이유와 의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둥이 목적있는 삶입니다. 이건 일도 일이지만 존재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은 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사랑을 하든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언가에 기여하고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을 때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도 삶의 질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시켜서 합니다. 삶의 질이 무척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식구니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함께 살면서 힘들어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함께 책임지면서 해야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 하고 방청소하고 혼자 살아도 해야하는 거잖아요. 나와 우리들의 건강을 일상을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빗자루를 들고 내 집 앞 청소를 해도 그냥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고 나하나 제대로 사는 것이 우주를 세우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이라는 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편하고 좋고 쉬운 것이라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몇일씩 밤을 새면서 글을 쓰고 작품을 쓰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땅을 뒤집으며 농사를 짓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르신들 부여잡고 씻고 돌보고 캐어가는 일들이 단순한 일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부여잡고 있는 일들이라도 작은 기여를 느끼면 그건 내 존재의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첫목회를 할 때 꼭 새벽 3시쯤에 전화하는 청년이 있었어요. 술 거하게 취하면 꼭 전화를 해요. 특별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예요. 목사님 제가 목사님 사랑하는 거 아시죠? 그렇게 한두 시간 떠들다 전화를 끊습니다. 지금은 잘 살아요. 그 젊은 날의 시절이 너무 힘들었던 거죠. 그 전화가 때로 부담되도 저의 존재의 이유가 되는 거죠.
우리사회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의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성직자도 어느순간 오로지 돈벌이와 사회적 신분을 확보하는 도구로써만 전락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그 목적을 상실하고 법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그 목적이 상실되고 종교를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에 장사치들만 가득하니 그 강팍한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창고등학교 십계명에서 두 번째 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는 계명은 여전히 보석같은 계명입니다. 나를 필요로 여기지 않는 위를 보지 말고 여전히 나를 필요로하는 척박한 땅으로 내려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는 초월성입니다. 폭빠지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폭빠져 나를 잃고 뭔가와 하나되는 경험을 하면 할수록 살아가야하는 이유가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황혼이 지는 저녁 노을 보면서 대자연의 품안에서 신비경험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감상하면서 초월성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쓰면서 작품을 만들면서 종교적 경험을 통해 이런 걸 경험합니다. 그제도 전도사님 연극을 보면서 폭빠진 경험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는지. <설령 유토피아가 있다고 해도 그런 이상세계조차도 누군가의 희생, 배제를 담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거죠. 결국 진정한 유토피아는 가난하고 척박하지만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고 그러나 배제가 없는 지금 여기가 가장 소중한 삶이라는 멋진 연극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사실은 그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초월, 신비감들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이유를 더해주고 결국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구에서 학생들에게 200피트 유칼립튜스 나무를 1분 동안 바라보게 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자신 위주의 마음이 사라지고 타인을 도와줄 기회가 생겼을 때 훨씬 더 관대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더 많은 시간들을 이러한 초월성에 노출시켜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기둥이 스토리텔링, 이야기입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그저 떠돌아다니던 하층민들이 노예로부터 탈출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건 그냥 옛날 고대 중동의 하층민들의 평범한 삶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놀라운 점은 그들의 경험을 경험으로 소비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살을 붙이고 의미를 붙이면서 스토리텔링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어떤 인간도 노예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스토리텔링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모든 인간은 노예를 부리는 지배자 근성으로부터도 노예에 길들여진 노예근성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한다는 존재의 길을 이야기화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토리텔링하기에 좋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은 전혀 그럴만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내가 쓰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의 사업가 피니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했던 돈많이 버는 사업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어느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허와 실을 걸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였고 자신에게 보람되고 의미있는 삶을 위해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의미있던 삶은 계승하고 가치없던 것들은 내려놓으면서 그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고 목적을 주었던 존재의 의미를 주었습니다.
요즘 감사일기를 보면서 참 좋은 스토리텔링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없던 삶을 포장하는게 아니라 아프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실수하고 잘못살아왔던 삶의 시절들 안에 담긴 의미들을 길러내고 그 이면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감사의 손길들을 찾아내면서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삶의 이미를 더해가는 스토리로 이야기화해나가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삶을 향한 구조조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은 세례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을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영을 힘입어 약한 고리들의 유대감을 더 따뜻하게 연결하며 일상의 신비앞에 멈춰 깊이 머물고 삶의 의미와 보람, 감사와 은총들을 더 가꾸어가는 삶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살아가야할 삶의 이유들이 더 풍성해지는 가을이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