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61
8월23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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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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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C_XuhH11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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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라난 잡목과 잡풀들로 마치 밀림처럼 변한 골짜기를 예초하다가 뜻밖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예초기를 돌리던 어느 순간,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어여쁜 배롱나무 군락을 만난 것입니다.
비록 잡목들에 가려 크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족히 스무 그루가 넘는 진홍빛 꽃이 어여쁜 배롱나무들이 거기서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는 ‘이게 웬 횡재냐?’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십 수 년 전 그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묘목을 심었을 선배 회원의 노고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진귀한 보물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우리 선배들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도 우리 가까이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허세로 따지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두 그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그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위선자들!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 야단맞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치를 떨고 이를 갈 정도로 강한 질책입니다. 매사에 진실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이중적인 처신과 위선적인 삶을 그리도 강경하게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볼썽사나운 위선과 이중성이 잔뜩 들어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 또 성찰해야겠습니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여도 동고동락하는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깥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인정, 칭송과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에게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위선으로 가득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분명합니다.
이중성의 극복의 중요성에 대한 교부들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었다면, 바다와 세상의 모든 강물에서 몸을 씻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보실 때 더러움으로 시커멓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로 씻어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기도로 씻어야 하는 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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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m2TC17TUE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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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가르치게 된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교리를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눈먼 인도자들로서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보다 하느님의 집을 만드는 돈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까지 바꿔버리는 그들을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런데 돈을 좋아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쳤던 그들은 계속 번영했을까요?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그것을 배운 사람들에게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고 김성수 목사의 강의에 나온 사례입니다.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그 설움을 자녀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한 엄마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을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 되면 경쟁자를 밟고서라도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왜 어머니를 죽였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누구나 이렇게 자신이 사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이에게 그 방식대로 대우받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게 만드는 교육이 ‘진화론’입니다. 우리나라는 신앙인들이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세속적 복을 청하는 기복신앙이 강합니다. 자녀 성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은 부모를 잘 봉양할까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하위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돈만 아는 모기처럼 키웠다면 그 자녀들은 부모들의 노후도 걱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모의 재산을 노리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그동안 고수해오던 ‘십일조’ 교리가 현대 교리서에서 사라졌습니다. 십일조는 ‘삼구’(세속-육신-마귀)의 교리와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어쩌면 교회 지도자 중에서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거북한 교리를 뺀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선악과와 같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교회가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많은 성당도 성당을 크게 짓느라 보수하느라 돈이 없습니다. 이웃을 도울 돈도 없고 매년 재정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왜 교회가 그 교리를 교리서와 교회법에서 빼버린 것일까요? 물론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만, 어쩌면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더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가르치는 대로 본인이 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사는 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20세기 현대에 들어와서 없어지거나 무뎌진 교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사람이 새로 태어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말하기 조심스러우며, 심지어 예비자 교리서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는지의 교리도 사라졌습니다. 우리 삼위일체 신앙고백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신데 한 분이실 수 있을까요?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오류로 흐를 것입니다. 교회가 이 흐름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반대로 돈과 쾌락과 교만과 맞서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잘못된 교리를 배울 때 하늘 나라의 문은 그 사람에게 잠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성경보다 먼저 ‘정통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자신이 아는 교리대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나 교회 모임에서 성경은 공부하되 교리서는 어렵다고 뒤로 물려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발전이 없는 신앙이 됩니다. 유다인들이 성경을 공부한다고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신천지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정통교리이고 교회는 그 정통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가르침은 다 자기가 사는 삶을 정당화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론으로 자기를 먼저 가르쳐서 그렇게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자신은 술에 취하면서 자녀들에게는 술에 취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교리를 만드는 지도자들이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신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고 타협하며 사는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면 눈먼 인도자가 됩니다. 결국, 진화론적 가르침으로 교리가 기울게 된다면 그 교리를 배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교회까지 공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눈먼 인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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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3-22 :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복음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 가장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불행하여라!’는 말씀은 진노일 뿐 아니라 비애가 곁들여 있는 말씀으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고 하느님의 뜻에 완고하게 눈을 감고 자기 편한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에 대한 서글픈 사랑의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경건하게 준수한다든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도문, 성구를 적은 것을 옷 속에 넣는다든지 옷 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한다. 또한 규칙과 규례를 소상하게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과 거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자기 스스로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서는 자신은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마태 6,10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세상을 생각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이 만든 수천 가지나 되는 사소한 규칙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면전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시면서 경고하신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예수께서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토록 ‘불행하여라!’고 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그 진노를 받을 만한 허물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가? 특히 하느님 앞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불림을 받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하는 오늘날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까지도 내 악한 표양으로 막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오늘의 복음 앞에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경외하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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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몇 년 전, 한 형제님이 찾아와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면서, 기도 중에 혹시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그때의 상황을 하느님께 자세히 말씀드리되, 있는 그대로, 끝까지 말씀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말하면 침묵 가운데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제님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네가 잘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아팠는지요. 기도 중에 이 상처가 떠올랐어요. 제가 어릴 때 탁발승이 시주를 받은 뒤 어머니에게 그 아픈 말을 남겼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스님 때문에 집안 어른들까지 저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해서 제가 평생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방 안을 떼굴떼굴 구르며 울다 보니, 어느 순간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선 모세가 보였습니다. 그 가시나무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으면서 불꽃이 일듯, 제 아픔도 가시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픔은 불꽃으로 저를 힘들게 하였지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것처럼 저 또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아픈 가시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조심하고, 또 얼마나 하느님을 찾으며 살았는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을 중심에 두는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이 말씀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와 단체장 등 나름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날마다 성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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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이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빛’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계명)’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서 사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라는 말씀에서 ‘등대’가 연상됩니다.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주는 등대와 같습니다. 만일에 자기의 신앙을 감추거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대가 제 구실을 하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가 아닌 곳으로 보내는 일과 같고,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닌 곳’은, 멸망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서, 또 부패를 막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만일에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기는커녕 더 부패하게 만드는 독약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고, 그런 것은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하느님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소금과 같은 일’을 하는 활동입니다. (멸망에서 건져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자식’만 생긴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선교활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려면 우선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6-22)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일이 있으면 하느님 대신에 성전이나 제단이나 하늘을 두고 맹세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맹세한 것이 아니니까 그 맹세는 안 지켜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자기들이 한 맹세를 무효화시키려는 꼼수입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에게 속한 거룩한 물건을 두고 한 맹세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그냥 궤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아예 맹세하지 마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헤로데의 맹세는 대표적인 거짓 맹세입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라는 말은, “만일에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내 왕국’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로마 황제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그의 약속과 맹세는 거짓말입니다. (자기 왕국이라고 해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이고 맹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마태 26,73-74)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말이 거짓말이고,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회개했기 때문에 그 ‘큰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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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제게 의미 있는 날입니다.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 있는 동창 신부님들은 오늘 신학교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후배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30년을 지내면서 예전에 교수 신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사제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기도하지만 사제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책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곧 바닥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황님의 문헌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친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강론,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강론,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강론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건강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못하면 사목을 잘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판단기준은 하느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광과 자신들의 명예,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바오로 사도가 갔던 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갔던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과 지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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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본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뜻만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재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람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진정 참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집착했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가장 불행한 한국사람은 누구일까요? 2015년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경제적 행복 추이’ 보고서에서 가장 불행한 한국사람은 ‘40대의 대졸 자영업 이혼남’이라고 합니다.
한국인 10명 가운데 7명은 ‘내 삶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1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발표한 '현대인의 정신건강 인식조사')고 합니다. 삶이 불행하다는 응답자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원인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가장 많이 꼽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복지가 보장되는 유럽 국가들에서는 빈곤보다는 실패한 인간관계, 신체·정신 질환이 불행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럼 반대로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만족과 긍정”이라고 합니다. 더 가지고 더 많은 것을 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매사에 긍적적인 태도를 지닐 때 경제적 궁핍이나 인간관계의 실패, 심지어 질병이나 고통마저도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과는 다른 차원에서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근원적인 불행의 원인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선언하신 불행의 내용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이들 세 가지 집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뜻 혹은 자신의 방식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렸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하늘 나라의 길을 안다고 생각하고 형식과 법 조문으로 그 길을 인도하지만 그 길은 오히려 하늘 나라의 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만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추종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함께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데, “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을 “내 소유”로 만들고, “자신만 사랑”하도록 강요할 때, 그것은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사람에 대한 집착인 것입니다. 이 집착 역시 자신만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더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번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재물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금이나 예물”을 더 귀하게 여기면서 성전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결국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사제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뜻과 사람, 그리고 재물에 집착할 때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믿는 이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반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한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재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교회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더 큰 하늘 나라의 행복을 위해 지금 우리 자신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때때로 유혹은 교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내 생각대로, 나만을,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우리 스스로를 경직되게 만들고 더 큰 사랑을 할 수 없도록 집착하게 만듭니다. 결국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온갖 정성과 노력을 쏟아붓지만 결국 내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위에 내 뜻을 둘 때, 하느님 위에 내 사람을 둘 때, 하느님 위에 재물을 둘 때, 우리는 결국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가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집착을 버리고 "초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침묵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모두가 함께 하느님 사랑 안에서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재물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임을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필요를 줄여 가는 것”도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결국 온통 마음을 그곳에 쓰게 되어 하느님을 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며 나눌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물론 특별히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오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한 이들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좀 더 자주 선택하고, 너만이 아니라 너도 그리고 모두를 사랑하는 길을 찾아 가고,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참된 내적 평화 가운데 초연한 마음으로 더 큰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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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그동안 겪은 역경과 박해에도 그들이 보여 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희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 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 ……들아!”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불행 선언은, 각각 하느님 나라, 개종자를 얻으려는 행위, 맹세에 관한 것이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종교를 왜곡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열린 마음과 열정과 기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이런 태도는 마음은 멀어지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헛된 예배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는 ‘늘 해 오던 것’만 굳게 지키며, 새로운 바람을 두려워하여 시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전통주의를 고집하며 오래된 옷과 가구의 냄새를 제거하는 신선한 산들바람에 창문을 닫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면 인간의 대답, 곧 믿음은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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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의 분노하시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보여주는 곳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서, 어쩌면 더욱 정겹고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위선자라는 말, 겉과 속이 다른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羊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늑대가 들어 있는 그러한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착하고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시커먼 욕심과 명예심과 이기심의 덩어리가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들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남들에게 의식이 경건하게 보이도록 애를 쓴다든지, 옷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합니다. 남보는 데서 거룩한 체 폼을 잘 잡습니다. 규칙도 잘 지킵니다. 그렇지만 규칙의 정신이나 본질을 마음속으로부터 잘 이해해서 지킨다기 보다는, 어쩌면 규칙을 위해서 규칙을 지키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아도취 내지는 자기만족에 빠져버리고,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은 헤아릴 줄 모릅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세세하게 만든 율법과 규칙을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용해서,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짐을 지우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이 무서운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서는,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도 못 들어가도록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이끄는 것이 당연히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만일에 자신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들어가려는 사람만이라도 막지는 말아야죠. 이들은 사랑이라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도외시한 채, 부수적인 형식이나 절차 따위에 더 초점을 맞췄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첨부해 놓은 세부 규정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들어서 살펴보면, '안식일날 무화과 열매 하나나 그보다 무거운 것을 나르면 안식일을 깬 것입니다.
안식일에 무화과 반쪽을 드는 것은 허용되지만, 만일 그 반쪽을 바닥에 놓았다가 다시 들어올린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 짐을 나른 것이다' 그러니까 일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들 장난하는 것 같지 않는가. 이게 뭔가? 얼마나 형식적인가? 이 속에 안식일의 정신이 배어있을 여지가 있는가?
정말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단정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당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책감만 안겨주고는 하늘나라로 가는 데 있어서 걸림돌만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마태오 18, 6에 예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여겨집니다.
자 그러면, 오늘로 돌아와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사랑의 계명, 주님의 기쁜소식을, 그것의 껍데기가 아니라 알짜배기를, 그 정신을, 일상생활 안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티를 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강론중 일부를 소개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주일미사에는 충실히 참여하면서 평일에는 의롭게 살지 못하는 신앙은 결코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합니다. 기도는 많이 바치면서 마음은 위선으로 가득 찬 신앙은 결코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아닙니다. 그저 평탄하기만을 바라고 금전적인 풍요와 안이를 추구할 뿐, 불의에 항거하는 일을 외면하는 교회는 우리의 거룩하신 구세주를 받드는 참 교회가 못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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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불행선언 1,2,3>
지난 토요일의 복음을 잠시 떠올려 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셨다.(마태 23,1-12) 이유는 그들의 위선과,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함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한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이를 근거로 해서 마치 저주와도 같은 엄청난 불행선언을 내리신다.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선언은 모두 7번에 달한다.
불행선언을 개요하면 ① 하늘나라의 문 / 열쇠(13절), ② 개종노력 / 지옥의 자식(15절), ③ 성전맹세 / 황금맹세(16-22절), ④ 십일조 율법 / 정의, 자비, 신의(23-24절), ⑤ 잔과 접시 / 겉과 속(25-26절), ⑥ 옳은 듯한 겉 / 위선과 불법(27-28절), ⑦ 예언자 무덤 / 책임회피(29-32)와 같다.
오늘부터 우리는 3일 동안 이 불행선언을 나누어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①~③의 불행선언을 다루고 있다.
우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위선자’로 간주된다. 그들이 율법의 세칙들은 곧잘 지키면서 율법의 기본정신을 저버린 까닭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위선자’로 낙인을 찍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 중에 순서 없이 자주 이들을 싸잡아 위선자로 지칭하셨다.(마태 6,2; 6,5; 6,16; 7,5; 15,7; 22,18; 루카 6,42; 12,1; 12,56; 13,15)
잠시 불행선언에 대한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르코복음(12,38-40)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고, 루카복음(11,37-52)에는 6번의 불행선언이 언급되었으나, 3번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3번은 율법학자들에게 해당되며 전후 문맥을 따져볼 때 마태오복음보다 비조직적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대목을 통해서 철저하게 유대교를 와해시키고 그리스도교를 홀연히 세우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이는 곧 예수를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떼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태오는 산상설교처럼 예수께서 간헐적으로 하신 불행선언을 한데 모아 이 대목에 집약해 놓은 것이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불행선언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관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열쇠(지식의 열쇠: 루카 11,52)를 쥐고서 문을 닫아걸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열어주기는커녕 막고 섰다는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이는 곧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참 지식을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둘째는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엄청난 낭비를 강행하고도 개종자를 얻으면 그를 자기도취에 빠진 유대교 광신자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셋째는 맹세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불행선언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어떠한 경우에도 맹세를 금지하셨다.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자체가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다. (마태 5,33-37)
마태오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의 대목을 자신에게 속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해 기록했다면, 이는 곧 오늘날 모든 가톨릭의 지역교회와 전체교회를 위한 지침이다.
교회가 만약 하늘나라의 사물을 이 땅에서 관리한다고 하여 이를 임의로 활용하려 하거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보다 자신에게 속한 자로 만들려 하거나, 하느님의 성전보다 성전 안에 있는 황금에 더 마음을 두거나, 제단보다 제단 위의 제물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오늘 복음이 선포하는 불행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선과 욕심으로 자신들의 성무(聖務)를 수행한다면 이는 교회의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대사제들을 포함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듯이, 가톨릭교회의 지도층인 교황을 포함한 주교와 사제들은 진솔한 태도와 행동으로 주님의 제자답게 교회를 돌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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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 지점에서,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마태 5,3-12)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마감하는 지점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곧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경고합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인도, 곧 그들의 행실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미 신자 된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 곧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임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경건함을 과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이 모두는 그들이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8)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19.). 일을 잘 하는 것이냐,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이냐?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내 자신이냐, 주님이신 하느님이냐?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냐?
그러니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마태 6,33)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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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하소서.
내 뜻인지, 하느님의 뜻인지, 내 자신인지, 주님이신 하느님인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눈을 주소서!
먼저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주소서!
무엇을 하든지, 구를 만나든지,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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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23,13)
유다교에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의 규범, 계명이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길로써의 지침 또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습니다. 율법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본질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기도에 대한 고민을 말했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기도의 본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바치던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본질'이 '기억과 머뭄'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율법과도 같은 기도'를 바치는 것에만 급급하고, 그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 계명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불행한 위선자들이 되지 말고, 행복한 신자들,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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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내는 길은>
마태오 23,13-2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내가 내는 길은>
길을 따라
걷는 그 누구나
한걸음마다
길을 낸다네
누구는
길 여는 길을
누구는
길 닫는 길을
누구는
길 밝히는 길을
누구는
길 숨기는 길을
누구는
길 따르는 길을
누구는
길 거스르는 길을
누구는
있어야 할 길을
누구는
없어야 할 길을
길을 따라
걷는 나는
한걸음마다
어느 길을 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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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지요. 사실 그가 2003년 10월 처음 암으로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아직 종양 크기가 작으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스티스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의 병 역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나 봅니다. 수술을 거부하고 대체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부작용을 겪기보다는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선택한 대체 의학을 통해서 치료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암은 계속 성장하여 퍼져나가 간까지 전이되어 어쩔 수 없이 여덟 달 뒤 수술에 동의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후회했던 결정으로 수술 거부한 것을 뽑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폰을 만들었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설득을 시켜서 자신의 영역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자.’라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남들도 다 하니까.’라면서 똑같이 행동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교통신호를 받아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또 그 뒤의 차도 신호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의 차는 ‘왜 가지 않느냐?’면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는 분명 정지 신호인데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직접 강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남다르다면 어떨까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외치십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그 누구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 그러한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영향을 받아 커다란 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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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
저는 물을 잘 안 마십니다. 그런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많이 마셔야 몸의 노폐물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천이 잘 안 됩니다.
이런 고민을 어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저의 소변 색깔이 진한지 그리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에 수분이 정말로 부족하면 신장에서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수분을 꽉 잡아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변 색깔이 진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수분이 부족하면 몸은 본능적으로 갈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변 색깔도 정상이고, 갈증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신부님, 우리 몸의 70% 이상이 이미 물입니다. 더 마신다고 그만큼 더 좋아지지 않아요.”라고 대답해주십니다.
굳이 억지로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갈증이 생기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이상이 있을 때, 심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될 때는 얼른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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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이 주는 위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겸손한 삶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율법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사랑하고 희망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말이 바뀌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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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꽃>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오늘 강론 제목은 '파스카의 꽃-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강론시 참 많이 사용했던 제목이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을 잊었을 때, 잃었을 때 삶은 복잡 혼란해 지고 방황이 뒤따릅니다.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야 말로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께서 무지의 어둠을 밝히고 허무주의의 늪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아주 예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에서 단체피정자들을 위한 미사때 제의방에서 입당전 인사하려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상이 없어 순간 당황했던 기억입니다. 방이나 성당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삶의 중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엊그제 자비의 집 본관의 휴게실에서 조각가 형제가 선물한 예수님의 십자가 축복식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투박하고 단단한 대추나무 자연목 십자가에 부활하신 예수님 십자가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이전의 이콘 십자가보다 중량감있게 자연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새삼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침 어제 나눴던 ‘파스카의 꽃’이란 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요, 믿는 이들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늘 새롭게 폈다지는, 새롭게 시작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파스카의 꽃같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어제 삼종기도후 알현시 교황님의 짧은 강론 주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생의 육화는 우리에게 타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형제들 하나하나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며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형제가 예수님의 현존이니 그대로 존엄한 품위의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줍니다.
오늘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일곱 차례 불행을 선언하시며 오늘은 세차례 불행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중 행복선언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탄을 받는 율사와 바리사이는 별종의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사실 복음 사가가 의도하는 바는 교회내의 이런 율사와 바리사이들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이라도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불행하여라”,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아픔이 배어 있는 회개를 촉구하는 선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떠날 때 무지에 눈멀어 왜곡된 심성에 분별력의 상실이 뒤따릅니다. 진실과 겸손의 자리에는 위선과 교만이 자리잡게 되고 사람은 소리없이 내적으로 무너지고 망가지게 됩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모르는 무지의 사람은 알려 줘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며 가장 힘든 일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와 테살로니카 교회의 신도들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의 아름다운 서두 인사말을 통해 사도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새롭게 각인시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은총과 평화의 삶이요 겸손과 감사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신망애信望愛의 풍요한 삶임을 다음 아름다운 대목이 입증합니다. 믿는 이들 공동체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 즉 신망애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이겠습니다. 은총과 평화, 감사와 겸손, 신망애의 삶에 기쁨의 삶이 추가됩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평화와 기쁨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은총이자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필히 전제되는 바 끊임없는 회개임을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가르쳐 줍니다. 이어 소개되는 회개의 3단계입니다.
-‘1.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옴, 2.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김, 3.오실 예수님을 기다림’-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3단계 회개의 원리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참으로 세상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와 기다리던 주님을 환대하며 섬기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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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9)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복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일이 예수님 보시기에 점점 더 본질과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더 중요할까요, 성전 안의 금이 더 중요할까요? 또 제단이 더 중요할까요,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이 더 중요할까요? 어린아이도 정답을 알 수 있을 듯한 질문이지만, 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와, 재물이나 자기영광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이에게서는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지 않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정답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입으로는 율법의 조항을 전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으로는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게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불행하여라" 하고 탄식하십니다.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마태 23,21)
하느님께 불리우고 선택된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람과 사물과 사건, 그리고 오가는 말에서 하느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한눈에 쉬이 보이는 법이 잘 없으시니, 숙고하고 묵상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머무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달이라고 여기지 않는 식별력과 지혜가 필요하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도들의 그러한 믿음을 칭찬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1테살 1,9-10)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시선을 사도들에게 고정하지 않고 사도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그들을 움직이시는 "참하느님"을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다시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하는 하늘 나라의 참시민이 된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복음 환호송)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신 이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겉만 번드르한 찰나적이고 가변적인 소리들 너머로 주님의 목소리를 포착합니다. 또 감각과 물질의 껍질들의 틈을 꿰뚫어 본질을 발견합니다. 그 본질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이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런저런 현안들의 껍데기에 만족하거나, 두려움에 자지러져 멈추거나, 마치 그 껍질이 전부인 양 서둘러 구도의 길을 종결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정말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속적 성공과 풍요로운 재물, 달콤한 명예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고,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진짜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계속해 나가길 기원합니다.
진짜는, 진짜는 어쩌면 고통이든 실패든 약함이든 죽음이든 우리가 끝까지 피하고픈 포장지로 싸여 올 수도 있답니다. 언제건 어디서건 무엇에서건 누구에게서건 결국 하느님을 찾아내어 그분과 하나 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1테살 1,3)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칭찬했던 이 덕행들이 부족한 죄인인 우리도 참하느님을 발견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더 믿고 더 사랑하고 더 희망하는 오늘 되시길, 그리하여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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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1UTyo_8sD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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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 17)
가을은
우리 내면을
향하여 온다.
모든 은총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참된 삶은
위선을
멈추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정직한 신뢰이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참된 회개로
참된 신뢰가
주어진다.
신앙의 깊이는
회개의 깊이이다.
회개는
위선을 치유하는
것이며 더 중요한
내면을 다시 찾는
길이다.
모순과 위선
독선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고백한다.
올바른 신앙은
회개를 통한
내면의
결단이다.
교만은
하느님
자비를 결코
이길 수 없다.
하느님 자비는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놀라운
은총이다.
하느님 관계가
하느님의 자비가
더 중요하다.
오는 가을은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눈먼 우리들을
다시 깨워
새롭게 하신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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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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