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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
누가복음 24장 강해 이부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
누가복음 24장 13-누가복음 24장 36
요절 누가복음 24장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보고 함께 걸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며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떡을 주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증거하십니다. 그들은 말씀과 사랑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말씀과 사랑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두 제자
13-16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본문에는 열두 사도가 아닌 두 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70명의 제자에 속하는 자들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권세로서 로마의 권세를 내어 쫓고 독립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제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장관은 열두 사도가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은 차관 하나 정도는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망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사형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졌던 세상적인 꿈이 다 깨어졌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부활소식을 전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빈 무덤을 본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하나의 넌센스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어서 엠마오라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낙향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이므로 이렇게 직접 나타나셔서 함께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형된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실패의식에 눈이 가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실패의식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이 나기도 하고 학과 공부나 직장에서 실패를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고 핍박과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질병과 실패와 박해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훈련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질병이나 실패나 박해를 통해서 신앙이 순금처럼 순수해집니다. 세상적인 소망이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실패나 고난의 순간에 슬픔이나 절망이 생기고 눈이 가리워져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패나 고난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식하지 못해서 불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추억과 소문
17-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와 함께 걸어가면서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마음의 슬픔을 털어놓아 해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글로바였는데 그는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핀잔합니다. 그들은 요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나사렛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모세가 10가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원하시고 독립시켜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시기심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비참하게 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이 흘렀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의 소식도 듣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전한 말이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사를 만나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평상시 하신 말씀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보고 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런 소식을 듣고도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잠겨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셨습니까?
3. 성경에 기초한 그리스도를 증거함
25-2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두 제자의 이야기를 인내하시며 다 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내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얼굴을 자세히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모세 오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지서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하여 기록된 것을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이사야서와 시편에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을 더디 믿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 증거합니다. 처음에는 천사가 막달라마리아에게 생전에 ‘죄인들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성경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 번째는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 성경대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온 세상에 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세 번의 말씀을 가르칠 때마다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메시야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초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시는 메시야입니다. 당시의 메시야관은 고난 없는 영광의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야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야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관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의 독립정부를 세우고 세계의 최대강국이 되어 그곳에서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미국 대통령보다 휠씬 강한 인물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왕국은 미국보다 휠씬 강한 초강대국입니다. 세계를 힘으로 재패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계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지금 하나님 나라를 마음과 삶에서 누리고,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 관이 잘못되어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메시야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기복적인 신학, 번영 신학, 성공 신학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세상에서 부자되고 출세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를 꿈 꿉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합니다.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질병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야를 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만 있고 현실에 축복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 믿으면 복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하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복보다 하늘나라의 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은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유보다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성 회복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메시야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꼭 죽은 후에만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과 기적을 은혜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표적과 기적을 주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시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고 천국 가라는 것입니다. 이 표적과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은 현재적이기보다는 내세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성령 안에서 떳떳함과 평강과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그들에게 십자가의 살과 피를 주어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것도 그에게 죄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 사명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메시야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치고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은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고 25년 동안 자식 하나 없이 살았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을 하다가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십대부터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다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사벨에게 쫓기는 삶을 살다가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아는 어느 한 사람도 고난을 받지 않은 예외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신약의 열 사도들은 모두가 제 명대로 살다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매를 맞고 굶주리고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까? 그는 작두에 목이 잘려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을 꿈꿉니다. 현세적인 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다 고난이 다가오면 예수님을 부인해버립니다. 이런 본성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고난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면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난 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실패는 있지만 마지막 날은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적인 메시야관을 분명히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사랑의 떡을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봄
28-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성경을 가르치며 그들이 가려는 마을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계속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강권하여 함께 유하자고 하였습니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도 저물었으니 자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유하려고 그들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감사 기도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이 사랑의 떡을 먹자 유월절 만찬석에서 떡을 떼어 주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의 살을 떡으로, 자신의 피를 포도주로 내어 주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흘려 죽으신 것이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이 신의 한 수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에 예수님은 새로운 영적 세계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쳐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웠음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에 기초하여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론. 말씀과 사랑으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함
33-35절을 보십시오.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열한 사도와 함께 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시몬과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났습니다. 둘 다 공통적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들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현재의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하여 현재의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잠깐 있는 이 땅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야합니다. 다니엘 기도회 첫째날 간증한 김인강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렸습니다. 그는 걷지도 못하다가 나중에는 의족을 하고 목발로 걸어나디는 분이십니다. 서울대 전체차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카이스트 교수를 역임하고 40년 수학의 난제인 서스틴 가설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분은 ubf에서 나간 esf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소아마비를 치료해주시지 않는가를? 질문했는데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신의 모든 고난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과 사랑으로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1.1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
누가복음 24장 강해 이부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
누가복음 24장 13-누가복음 24장 36
요절 누가복음 24장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복음 24장 강해 이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