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요한복음의 저자라고 추정되는 한에 있어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의 위상을 높였음을 이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른 사도[예를 들면 누가] 의 경우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기술한데 비해, 요한은 예수 자신이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스스로 취할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한 말에서도 나타나며, 요한 계시록에서도 그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로 묘사하며, '처음과 나중', '알파요 오메가'로 극한까지 그를 올린다. 이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의 위상이 높아져 신격화시키는 이유는, 그들 그리스도인들이 모세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와 점점 더 결별해갔기 때문에, 그들의 지도자인 예수의 위상을 확고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위상을 아무리 높인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수는 없으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표현의 의미를 서로 다른 분이지만 같은 분이라는 모호한 결론에 도달시키는 해석이 가능해지게 하였다. 이것은 은유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나 주술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고조선 건국의 주체인 단군이 신비스런 인물이라는 것을 묘사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북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에게도 나타난다. 김일성은 손오공 처럼 구름을 타고 다녔으며,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지금은 우스갯 소리나 헛소리로 치부하고 말지만, 만일 북한이 적화통일을 하게 되고 점차 세력이 커져 세계 강국이 된다고 가정할 때, 수천년 후에는 이 우스갯 소리가 마치 실화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즉 시조는 위대한 신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의 위상이 신의 위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 다음 단계는,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둘다 신인가? 하나님 아버지는 유일한 신인데 어떻게 둘일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 문제에 봉착한 신학자들은 이미 존재하던 이교도의 삼신론에 착안하여 성령을 끌여들여 삼위일체라는 신학을 건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문자가 가진 함정이다. 의미를 목소리를 통한 언어로 들을 때는 당시의 상황과 함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원본이라 한다면, 상황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기록된 문자만 남을 때, 이제 그 문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원본과 동일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 독자들이 "예수가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구나!"라는 정도로만 이해했을 것이나, 수백년이 흐르자 이러한 위상이 문자화되어 해석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난 종교 논쟁이 '아리우스 논쟁'이라 불리우는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교주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된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기를 선호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권세는 삼위일체에 손을 들어주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