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역사에 근거하여 그를 평가할 때 대한사람은 몸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라 하였고 또는 한국을 위해 복수한 열렬한 협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찬사에 그친다면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사람이다.”
-박은식, 『한국통사』 중에서
3월 26일은 도마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 입니다. 그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의 일생을 이 하나의 사건으로 압축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의 명함에는 계몽운동가, 의병 지도자, 신실한 가톨릭신자, 그리고 한반도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열망한 인물이란 소개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안중근이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원했다는 점은 그의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에 잘 나타납니다.
<동양평화론>은 그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집필한 글이지요. 일제가 사형을 서둘러 집행했기에 ‘서문’ 정도만 남고 완성되지 못했지만요.
남아있는 글만으로는 그의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안중근과 그를 담당한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사이의 면담 기록을 살펴본다면 그 요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1.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2. 한 중 일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여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돕고
3. 동북아 공동 안보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할 것과
4.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한다.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사상은 현재 EU나 APEC 같은 범국가적 연합기구의 성격을 가집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했던 이야기를 안중근은 수십 년이나 앞서 주장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요.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을 그저 한 국가의 원수를 암살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토는 세계정세 파악에 뛰어난 인물이었고 서양식 국가 정책을 일본에 이식한 장본인이기도 하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강대국이 되기 위해 서양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19세기의 음흉한 정치가였던 것이지요.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는 곧 일본을 포함한 동양의 모든 국가를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재판 과정에서 그가 계속 강조한 점이기도 하지요.
당시 뤼순감옥에서 근무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안중근의 사상과 그의 당당한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하지요.
일본의 ‘다이린치’라는 사찰에는 그를 흠모했던 ‘지바 도시치’라는 간수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붓글씨를 써서 지바에게 주었는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1980년에는 한국에 반환되어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 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강요로 뜻을 이룰 수 없었지요.
2010년 동경대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는 쿄토대의 동료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의 2009년 글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강제 합병의 첫 단계로 인식되어 큰 저항심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그를 죽였다고 그를 책망해서는 안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 때 일본의 지폐에도 실려 있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일본의 근대화에 공이 있는 만큼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위인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은 안중근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의 업적이 민족이나 이념을 뛰어넘는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안중근 의사는 3월 26일 사형당해 뤼순 감옥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하지만 이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남한과 북한, 심지어 한중일 공동유해 발굴단까지 결성되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지요.
현재 효창공원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가 묻혀 있는 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비석도 유해도 없는 봉분이 하나 있지요. 안중근 의사의 ‘허묘’입니다. 유해를 찾게 된다면 그 자리에 묻혀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꿈을 실현시킬 수 있겠지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날이 되었으면 하네요.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첫댓글 안중근 의사는 평화를 열망한 인물임을 일본의 지식인들도 알고 있다.
일본의 야만적인 야욕은 이미 인지한 바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견 못한 것은 민족의 영웅임을 막기 위한 것이며 그의 모친 또한
현명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역시 위대하군요.
그 배포가 대단합니다.
일찍이 동양평화론을 내세우셨는데 구체적인 사안에
다시 한 번 놀라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