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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알 수 없어서 꽃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향을 피우지 않았다
누가 당신의 이름을 가렸는지
무엇이 왜 당신의 얼굴을 숨겼는지
누가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의 당신들을 만나 온통 미래였던
당신의 삶과 꿈을 나눌 수 있었다면
우리 애도의 시간은 깊고 넓고 높았으리라
이제야 꽃 놓을 자리를 찾았으니
우리의 분노는 쉽게 시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야 향 하나 피워올릴 시간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각오는 쉽게 불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초혼招魂이 천지사방으로 울려퍼져야 한다
삶이 달라져야 죽음도 달라지거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지금 여기와 다른 우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 애도다
애도를 기도로, 분노를 창조적 실천으로
들어 올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애도다
부디 잘 가시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꽃을 든다
부디 잘 사시라
당신의 당신들을 위해 꽃을 든다
부디 잘 살아내야 한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들어 후대에 물려줄
권리와 의무가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꽃을 든다
- 이 문재 시 ‘이제야 꽃을 든다‘
*이태원 참사 참사 1주기 추모의 시-류근 낭독
당신
당신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
곧추서 있습니다
멀리서
여기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큰 키입니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해 여럿입니다
기다리기 힘들어지면
여럿이서 더 먼 데를 바라봅니다
행여 어두운 밤길에 오르시면
길 밖으로 나가실지도 몰라
이렇게 바투 선 두줄입니다
이토록 높고 길고 나란한 우리는
저마다 온몸이 눈이고 귀입니다
오지 않는 당신 때문에
여럿이면서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여럿입니다
- 이 문재 시 ‘메타세쿼이아‘
* [혼자의 넓이],창비, 2021.
아빠는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아마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찬찬찬,
나를 키운건 팔 할이 컵라면이었다.
나를 키운건 팔할아 텔레비전이었고
나를 키운건 팔 할이 방과 후 학원이였다.
그렇다고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빠는 몇 년째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몇 년째 노래방에서 울고 싶어라, 탬버린
아빠같은 아저씨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불편해지지 않았다.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엄마 같은 아줌마 핸드백을 뒤지고 나서도
나는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나는 내가 장할 수 있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훔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컵라면을 다섯가지 방법으로 요리하는 것이다.
이틀 동안 굶는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테러리스트가 되어
비행기를 납치하는 상상응 하는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그때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인도를 하나 사서 작은 나라를 만드는
꿈을 꿀때 나는 힘이 생긴다.
아빠랑 싸우고 싶은데 아빠를 만날 수가 없다.
엄마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엄마와 마주칠 시간이 없다.
또 늦었다.
얼른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눈 좀 붙여야 한다.
나를 키운건 팔 할이 집 밖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 이 문재 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처음처럼, 참, 참이슬? 처음처럼
퇴근길, 지하철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 녀석, 이민 간 줄 알았는데
기러기 아빠 삼년째, 지난봄에는
대장을 삼 센티 잘라냈다며 굳이 곱창집이다
길가 쪽 자리, 요즘도 트럼펫 부냐고 물었더니
힘이 부쳐 쳐다보지도 않는다, 녹이 다 슬었겠다
그러면서도 연신 오른손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톡톡톡
그래,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는 영화 좋아했지
「밤하늘의 트럼펫」이 명곡이지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도 좋았어
너 시집 나왔다던데, 요즘도 이슬만 먹고 사냐?
이슬만 먹고 산다고? 나는 처음처럼을 이슬처럼 털어넣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슬과 참이슬은 어떻게 다른가
그러고 보니 이슬 본 지도 오래다, 이슬
이슬이라고 소리 내 발음해본 지도 참으로 오래
처음처럼 세병 째, 처음처럼이라
우리는 처음에서, 그 많은 처음에서 얼마나 멀어진 걸까
그 처음들은 지금 어디에서 홀로 찬 이슬을 맞고 있을까
동창 녀석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쪽, 태평양 쪽이다
고향 땅은 그대로 갖고 있냐?
벌써 다 팔았지, 그거 없었으면 애들 유학 못 보냈다
기러기 신세 되고 나면 알코올중독에 우울증이라는데 괜찮은 거냐?
하루하루 견디는 거지 뭐, 단풍 네번만 보면 정년이다
노후란 말 참 이상하지? 늙은 다음은 죽는 건데
노후 대책이라니, 죽는 대책인데, 도대체 대책이 없다
술기운이 대장까지, 충분히 내려가 있었다
고향 집 지붕에 찬 이슬 내릴 시간
장독대 해바라기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시간
처음이 처음이었던 그때 거기가 하나씩 떠오르는데
멀리 있던 얼굴들이, 꿈과 각오가 하나하나 나타나려는데
야, 우리는 늙을 수도 없어, 노후에도 일을 해야 하잖아
우리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일, 일, 일이다
녀석이 스마트폰을 꺼내 미국서 공부한다는 남매 사진을 보여준다
지하철 끊어질 시간, 우리는 처음처럼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비틀, 이 나이에 지하철 타는 우리 같은 놈들은 헛산 거야
휘청, 얀마, 이 나이에 나처럼 종점에 사는 놈도 있어
넌 마, 시인이잖아, 시인,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시인
나는 서쪽 종점으로, 녀석은 동북쪽 종점으로
우리는 또 보자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대학교 로고가 새겨진 야구 잠바를 입은
여대생이 노약자석을 부여잡고 토하고 있었다
창자가 부글거리는 듯했다, 동창 녀석의 한마디가
더부룩한 아랫배를 치고 올라왔다
우리는 늙을 수도 없다
늙을 수조차 없는 우리의 노후 대책은 단 하나
절대 늙지 않는 거, 죽을 때까지 절대 죽지 않는 거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결국 혼자 죽어가는 거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은 순직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순직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아저씨, 종점이에요, 종점
- 이 문재 시 ‘노후 ‘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질문을 바꿔야
다른 답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바꿔보자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말고
어제 내가 죽었다면, 으로
내가 어제 죽었다고
상상해보자
만일 내가 어제 죽었다면
- 이 문재 시 ‘어제 죽었다면‘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죄짓고 살자
오늘 밤
아기 예수 다시 오시도록
죄 많이 지으며 살자
원수를 미뭐하자
자비로부터 멀어지자
오늘부터
부처님 외롭지 않으시도록
우리 죄짓되
죄다운 죄 지으며 살자
원수를 저주하되
원수다운 원수를 저주하자
물론 법도 어기자
어길 만한 법 어겨서
법이 법다워질 수 있도록
법도 어기며 살자
죄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보란 듯이 한번 살아봐야겠다
- 이 문제 시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그때는 그 사람이 남쪽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한 문장이 정남향이었습니다
덕분에 한 시절 잘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봄이 이듬해 봄 만나기를 서른몇차례
많은 시대가 한꺼번에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더 오래가 되었고
온다던 미래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남쪽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느 생에게 정남진일 수 있을까요
그때는 여기저기 남쪽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남쪽을 바라보면
착하되 강하고 예민하되 늘름한 벗들이
도처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랬습니다
남쪽은 저기 여전히 맑고 푸르러 드높은데
이 겨울이 봄 여름 가을을 건너뛰어
다음의 긴 겨울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 같은 마지막처럼
- 이 문재 시 ’남향 (南向)‘
잠 언저리로 샐비어들
가을, 갈바람은 숫돌 같은 바다를 달려와
날카롭구나 잊혀진 것들
피를 흘린다
잠속에서 울었던 울음들이
생선과 함께 마르고 있구나
저녁의 붉은 갯내음 씻으려
소주를 따르다가 다시
잠든다
추락한다
하찮아지고 싶었다
내 그림자만 해도 무거웠다
- 이 문재 시 ’황혼병 4‘
[산책시편], 민음사, 1993.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버린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 이 문재 시 ‘ 시월‘
*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이 문재 시 ‘농담 ‘
* 제국 호텔, 문학동네, 2004.
어머니라고 하면
너무 멀어 보이고
엄마 하면 버릇없어 보여서
입속으로 어무이
입안에서만 엄니
일찌감치 보험 들어놓고도
몇년 몇달을 뭉그적거리다가
죽염 양치로 버텨보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어금니 뽑으러 가는 날
평생 이 아파하시던
우리 어무이 생각
앞니까지 다 빠진 채로
홀로 저승 가셨는데 행여
저승에서도 잇몸으로 드시나
마취 풀리고 피 멈추고
부기 다 가라앉았는데도
나는 자꾸 내가 싫어져서
저무는 북서쪽 하늘 올려다 보면서
없는 어금니 꽉 깨물면서
엄니
- 이 문재 시 ‘발치(拔齒)‘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혼자 울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다
모른 척 다른 데 바라보기로 한다
혼자 울다 그칠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다 웃을 수도 있도록
나는 여기서 무심한 척
먼 하늘 올려다 보기로 한다
혼자 울 때
억울하거나 초라해지지 않도록
때로 혼자 웃으며
교만하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 이 문재 시 ‘혼자 울 수 있도록 - 오래된 기도 3‘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시동을 켜자
바로 네비게이션이 들어온다
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 열세대가
길을 일러준다
홋카이도 상공에 두대
멀리 고비사막과 터키 상공에도
인공위성이 몇대 더 떠 있다고 한다
고마워라
여자 성우가 좌회전하란다
과속방지턱이 연이어 나타난단다
목적지까지 149킬로미터 세시간 십삼분 걸린단다
실시간 교통정보란다
도계를 넘자 경상도 사투리로 바뀐다
고마우셔라
우리는 저승 가는 길에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 상공에도
새까맣게 인공위성이 떠 있을 것이다
우리 저승 가는 길에도
무선 인터넷 서비스가 제공될 것이다
문자메세지는 아마 무료일 것이다
- 이 문재 시 ‘고맙다 ’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나다
바깥에 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리라를 에돌아 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이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이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 이 문재 시 ‘밖에 더 많다‘
<학산문학> 2010, 겨울.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들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 이 문재 시 ‘오래 만진 슬픔‘
[혼자의 넓이],창비, 2021.
혼자는 바쁩니다
외롭거나 쓸쓸할 겨를이 없습니다
혼자는 오늘도 모든 걸
혼자서 다 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전기밥솥 예약 버튼을 눌러놓지 않는 것도
옛 애인 이름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국 드라마 세편을 얀속으로 보는 것도
혼자서 다 하느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는 자기가 혼자라는 걸
누구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자기 자신에게 발각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노출되고 맙니다
그래서 혼자는 더욱더 혼자이고
그래서 더더욱 혼자서 잘하려고 애를 씁니다
혼자 주변에는 온통 혼자입니다
혼자는 늘 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혼자들도 다 알고 있지만
서로 다들 혼자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혼자는 바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라도 보기 위해
어제와 다름없이 열심입니다
때로 혼자는 뭐가 뭔지 몰라 멈칫합니다
그럴 때면 자기 이름을 몇번 불러보기도 하고
일없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기도 합니다
실내에 있는 전등을 있는 대로 다 켜놓거나
벽에대 칼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면
우리 혼자는 다시 대단히 바빠집니다
그러다가 또 지치면
혼자는 모든 게 다 그냥 싫다고
아니 모든 게 그냥 다 좋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아니 모든 게 그냥 다 좋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우리 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 입구에는
멋진 붓글씨가 하난 걸려 잇는데요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
눈길을 주는 혼자는 거의 없습니다
- 이 문재 시 ‘우리의 혼자‘
[혼자의 넓이],창비, 2021.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던져진 존재
우리를 키운 것은 9할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바꿔야 미래가 달라진다
*
심청이 아빠에게
공양미 삼백 석 영수증을
건네며 말했다
다음엔 아빠가 빠져
*
왼종일 물을 긷던 콩쥐가
팥쥐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우리 가출하자
*
마침내 거북이가 걸음을 멈추고
잠들어 있는 토끼를 깨웠다
토끼야, 바다로 가야겠다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가보세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네
- 이 문재 시 ‘전환 학교‘
* 작가들 , 2020년 가을호
이곳 원주민들은 @에 모여 산다
@ 뒤에서 가을이 민첩하다 분주하다
전국의 활엽수들이 사 일 만에 낙엽을 생산했다
비밀번호 정책은 대성공이었다
원주민들은 너도나도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저들은 자신의 비밀번호에 갇힐 것이다
디지털 정책은 완벽 완전하다
@에 불이 들어와 있다
오늘 달빛은 아무래도 악성 바이러스 같다
저런 달무리가 며칠 더 계속되었다간
원주민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을 회복할 것 같다
경계하고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
자정에 외계인 관련 뉴스를 하나 띄우고
내일 아침 톱은 EQ를 높이는 웰빙 음식들이다
이곳 비밀번호들은 의외로 건강에 예민하다
가을을 완수했다
새벽까지는 전원을 꺼놔도 되겠다
- 이 문재 시 ‘제국호텔‘
먼 별
먼 별 비처럼
풀잎의 지붕 위로 내려온다 아직도 다친
가슴을 비추어 주며 바람이 시작하던 언덕으로
나의 어떤 이름 하나 달려간다 그 시절
걸어 나가면 지구의 끝에 닿으리라
사랑의 끝에 태양은 소금 몇 줌 남겨 놓으리라
믿었지만 늘 바라보는 언덕 위의 먼 별
비처럼 내려오는 별빛처럼
푸른 바람 한 줄기 멈추어 서는 이곳에서도
지구는 단추를 풀어 가슴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때는 햇빛의 가운데에 나무를 심고
한입 가득 생수를 머금고 기도처럼
불을 밝히기도 했었다 사방의 어느 곳으로 달려 나가도
물은 먼지처럼 쌓여 수평선을 이루고
남아 있는 언덕의 모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모양을
지킬 것이므로 양손에 든 불빛으로 나의
그림자 언덕에 흔들리다 쌓이고 바람은 아무 데서나 시작하여
물방울들을 움직여 놓았다
지구의 어깨에 나무 한 그루 심고
다친 가슴이 흘러내린다
갑자기 멈추어 선 저녁 위로 나의 온몸은 흘러내려
등받이 없는 저녁의 의자와 함께 나는 핏빛이다
시작의 복도를 지나 뚜벅거리며 밤은 유리창을 열고
나는 차양 위에 내다 넌 젖은 소망이나
자유를 걱정하지만 노을의 낡은 잔등은 일전의 길을 따라
방풍림을 바람에서 건지다가 바다로 내려간다
푸른 복도의 끝으로 다친 가슴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그날의 비망록에도 나는
햇빛에 피리어드를 찍었고 내가 버린 눈물 구름으로
떠돌 것이며 나의 이 모든 것들이 지구를 빙빙 돌아다니다가
바람이 시작되는 시간이거나 먼 별
첫눈처럼 내리는 시간에 다시 지구의 어떤 외로운
언덕으로 뛰어내리리
먼 별 비처럼 지구의 어떤 밤으로
끊임없이 내려오는 외로운 언덕에서
나는 지구에서 지구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 이 문재 시 ‘지구에서 지구로 걸어가는 동안‘
* 산책시편, 민음사(1판1쇄1993, 개정판1쇄 2007)
창밖에, 목련이 하얀 봉오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목련꽃 어린 것이 봄이 짜놓은 치약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런, 늦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양치질할 새도 없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뿌리들을 있는 힘껏 지구를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태양 아래 숨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꽃들은 저마다 황짝 자기를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호객 행위였습니다.
만화방창, 꽃들이 볼륨을 끝까지 올려놓은 봄날 아침, 나는 생명에 가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자유로로 접어들자 차가 더 막혔습니다, 흐르는 강물보다 느렸습니다.
느린 것은 느려야 한다, 느려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 마음뿐, 느림, 도무지 느림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유*가 없는 것처럼, 정말 느린 느림은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윤호병, 『아이콘의 언어』,문예출판사, 2001.
- 이 문재 시 ‘정말 느린 느림‘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가는 길에 은행 잎 구른다
저무는 시월 소리 내면 읽히지 않고
저녁에도 부는 바람 가끔씩 있어
긴 그림자 버짐 같은 먼지 일으킨다
한입 시린 무거나 배춧속 같은
그날들도 큰 소리로 읽기엔 부끄럽다
가는 길 갈수록
가슴 설렐 일 드물 것인데
가는 길 어느새 가파르다
지는 노을 산 그림자
한 짐씩 어둠의 푸른 데로 옮겨 앉는다
이 밤 한 번 그리움에 져 주자
나 아직도 나에게 들킬 일 남아 있는가
- 이 문재 시 ‘가는 길‘
[산책시편], 민음사, 2007.
저렇게 산이 가파르다간 하는데
상쾌한 물소리 들린다 도계가
가까운 마을들 근신하듯이
밤길 홀로 걸어, 실상사(實相寺) 다리를
건넌다 예부터 실상인가 별들은
지독한 피부병처럼 잔뜩 성나 있고
천왕봉 날망은 잘 버려져 있다
지리산은 지금 지이산(智異山)
밤에 우는 새소리는 띄엄띄엄
뼛속으로 깃들어 참회가
모자라는 한 생애를
잠 못 들게 한다 근신하라
근신하라고 한다 돌아온 길이며 건너온
물길들하며 또, 한 방울 눈물에도
젖어 드는 허물들하고,
그 순간 한 발짝을 못 내밀게 하던
미안함들이 여기까지 따라와 있다
지이산 한 자락, 생애의 지리에
너무 어두워, 실상을 찾지 못해
하룻밤 눕는데, 문밖에서
누가 오늘 앞산은 허, 지이산이구나
하고 간다 이 근신은 언제 해맑아져
그대 앞에서 떳떳해질 것인가
지리(地理)여, 지이(地異)여, 지이(智異)인 것이여
그 사이사이에 실상은 있는가
- 이 문재 시 ‘실상사 가는 길 1 ‘
이쯤에서 쓰러지자
이쯤에서 쓰러져서
조금 남겨두기로 하자
당분간 이렇게 쓰러져 있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을 살릴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아픔이 기쁜 아픔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의 기쁨이 아픈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아니다
상체를 완전히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도록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자신의 새로운 시간과 만날 수 있도록
이렇게 하체의 힘으로
끝끝내 서 있도록 하자
숨을 죽이고
가느다란 허리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 기다리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누군가의 맨 처음이 시작되도록
누군가의 설레는 맨 앞이 되도록
- 이 문재 시 ‘모래시계’
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
아무리 날아도 하늘이 넓은 것은 아니다
두어 뼘 날개가 작고
눈이 너무 작을 뿐이다
새가 먹이를 공중에서 구할 수 있다면 발은 도대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둥지의 뿌리를 땅 속에 박고
공기의 계단에서 녹스는 날개짓으로
새는 결코 하늘에서 하늘을 염려하지 않는다
새의 날개도 결국은 마른 땅에서 썩는다
- 이 문새 시 ‘새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민음사, 1988
너는죽음이다
너만이 우리를 튼튼하게 만든다
노발리스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삶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허약하게 만든다
오늘 아침 문득 떠오른 말이다
우리 삶이
우리의 죽음을 튼튼하게 만들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의 죽음이
우리 삶을 튼튼하게 만들지 못해서 그렇다
삶이여 삶인 것이여
죽음의 손을 부여잡을 일이다
죽음이여 죽음인 것이여
언제 어디서나 삶과 어깨동무할 일이다
매일 밤 함께 잠들고
매일 아침 함께 일어날 일이다
매일 낮 함께 하늘을 우러르고
매일 저녁 함께 어두워질 일이다
삶에게는 죽음이 필요하다
죽음에게도 삶이 필요하다
죽음에게도 죽음이 필요하다
모든 삶에게 삶이 더 많아야 하는 것처럼
모든 죽음에게도 죽음이 더 많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이 더
그래야 우리의 죽음이 더
* 앤디 메리필드, [마술적 마르크스주의](김채원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3)에 나오는 글귀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 이 문재 시 ‘약간의 마법이 스며 있는 평범한 이야기*‘
- 빛과 소금 1
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뜬 오늘 아침에 알았다.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정오가 오기 전에 알았다.
소금은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소금은 빛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가장 무거운 앙금이다.
소금은 오직 헤를 바라보면서
소금기 다 뺀 물의 잔등을 떠미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소금은 있는 힘껏 빛을 끌어안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놓친 그대여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인 그대여.
- 이 문재 시 ‘혼자만의 아침 ‘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2014.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 이 문재 시 ‘큰 꽃 ‘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 문재 시 ‘오래된 기도 ‘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에,2014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거야, 아마 이런 저물 녘에
무관심해지다 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 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 이 문재 시 ‘저물 녘에 중얼거리다 ‘
[산책시편], 민음사, 2007.
-식탁이 지구다 2
음식을 들기 전에
올리는 기도가
아름답다.
아니다.
음식을 다 들고 나서
드리는 기도가
더 아름답다.
아니다.
음식을 드는 동안
음식을 몸안으로 모시는 동안
내내 기도해야 한다.
아니다.
소화 다 하고 난 음식을
몸밖으로 내보내드릴 때에도
음식이 온 곳으로 돌아가실 때에도
가지런히 두 손 모아야 한다.
- 이 문재 시 ‘독실한 경우 ‘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고장이 난 것이다
안쪽에 녹이 잔뜩 슬었다
연결 부위가 다 뻑뻑해졌다
눈도 어두침침하고
호흡도 많이 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는 탈이 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기억력이 상상력으로 승화되지 않으며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자존감
자신감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너는 탈진한 것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념의 껍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무기력이 분노를 부둥켜안지 않아서
기억이 미래를 움켜쥐지 않아서 탈이 난 것이다
꿈이 따뜻한 이야기를 빚어내지 못해서
우리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녹슬어버린 것이다
너 민주주의 말이다
아니다
고장 나 녹이 슨 것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우리들이다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시민들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세련되게 나약해진 우리 혈기 왕성한 괴물들이다
- 이 문재 시 ‘녹이 슬었다‘
* <서정시학> 2014년 봄호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 리 문재 시 ’ 봄 날‘
* <문학청춘> 2011년 여름호
봄이 고이더라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 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에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이고여서
너럭바위에도 잔뿌리를 내리더라
낮게 갠 하늘 한 걸음 더 내려와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봄이 고이고
곷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줄탁 줄탁이라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 이 문재 시 ‘봄이 고인다‘
<서정시학>, 2010년 여름호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 문재 시 ‘푸른 곰팡이‘
가지 않은 곳은 모두 미래다
그날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도
읽지 않은 그 책의 몇 페이지도
옛날이 아니다
산정에서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얼음 속에서 얼음 속으로
샹그리라, 라고 발음하는 것 같다
샹그리라, 오래된 투명한 단단함이
내장하고 있는 깊고 멀고 높은 소리
만년설 맨 아래를 지탱하는 소리
샹그리라
화살기도하듯이 외운다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시샤퍙마 초오유
희박한 산소를 모아 중얼거린다
저기, 히말라야 하이웨이
내 전생들이 새카맣게 올라오고 있다
- 이 문재 시 ‘샹그리라 ‘
[제국호텔],문학동네,2005.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에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이 문재 시 ‘햇빛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해서
온종일 누워 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 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 마시며 알았다
모든 진정 고마움에는
독약 같은 미량의 미안함이 묻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따로 혼자 있지 못한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엊저녁 너는 고마움이었고
오늘 아침 나는 미안함이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 이 문재 시 ‘손은 손을 찾는다 ‘
[노작문학상 제 7회 수상작품집]동학사.2007.
전광판 뉴스를 읽다가 지하도 계단에서 넘어진다
기쁜 날에는 자기소개서를 쓰리라 했었다
일회용 반창고로 그 하루의 해진 데를 감추며
참담한 날에도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 있었고
빌딩빌딩 현기증에 휘청거린다 어쩌다 보니
나를 나라고 부를 사람이 나밖에
없어졌다 전광판에 내일의 날씨가 반짝인다
지하도에서 풀려나지 못한다
앞서 간 즐비한 빚들이 빛난다 번쩍인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 간다 집과 나
그리고 빌딩들, 왜 추락에만 가속도가 붙느냐
길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처구니 없다 어쩌다 내가 이곳까지
끌려왔는지 어이가 없어졌다
전광판이 휘황하다 저기에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하다니
- 이 문재 시 ‘어처구니 ‘
* 이문재 시집 || 산책시편 , 민음사 , 2007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 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 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 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 나무들
- 이 문재 시 ‘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선글라스 끼고 활보
도회지 한복판 교차로 횡단보도 건너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거리
날마다 커지는 찬란한 본사 유리 건물을 지나
쨍쨍한 햇빛 속으로 활보
투스텝으로 깨금발 까치발로 활보
경복궁 광화문 앞을 활보
대왕과 장군은 본체만체
미래가 왜 앞에만 있단 말인가
너희의 미래는 왜 앞만 보고 있단 말인가
여름이라면 여름의 정면
캠페인이라면 캠페인의 잔등
증후군이라면 증후군의 발바닥
대형 사건 사고라면
대형 사건 사고의 엉덩이를 쏘아보며 활보
소풍가듯이 행진하듯이 활보
미래는 뒤에 있을 수도 있다
십 년 후 십 년 전 대체 어디가 앞이란 말인가
미래는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다섯 시 열한 시 방향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색안경을 끼자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쓰자
색안경을 써야 더 잘 보인다
문제는 색안경을 내가 골라야 한다는 것
내가 고른 것을 당당하게 쓰고 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색안경을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마음에 맞는 선글라스를 끼고
마음에 맞는 사람의 손을 부여잡고
변두리의 한복판에서 도심지의 텅 빈 중심까지 활보
지하에서 옥상까지 현관에서 광장까지
다자인 사무실에서 쇼윈도까지
현금지급기에서 방범용 폐쇄회로 카메라까지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쓰레기하치장까지 활보
우리의 새로운 거처는 거리
우리는 도시의 거리에서 만나야 한다
대오 없이 왁자지껄 무질서하게 활보
기도하듯 중얼거리며
잊지 말자고 한눈팔지 말자고 떠들며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며
카니발처럼 덥석 손부터 부여잡으며
흰소리 헛소리라도 좋다 잠꼬대라도 좋다
잡은 손 놓지 않고 활보
거리에서 거리로 활보 활보
우리의 새로운 장소는 거리
우리가 기필코 되찾아야 할 거처는 거리
도시를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한다
건물을 거리로 나오게 하고
도로를 거리로 올라서게 해야 한다
색안경을 낀 우리의 새로운 터전은 거리
거리에서 노래 부르자
거리에서 춤추고 떠들고 외치며 꿈꾸자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이 우리의 미래가 된다
색안경을 빼앗겨서 거리를 빼앗겨서
우리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미래가 보인다면 색안경 너머로 보일 것이다
미래가 온다면 거리로 올 것이다
미래가 있다면 거리에 있을 것이다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면 거리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광장은 거리
선글라스 끼고 활보
도회지 한복판 교차로 건너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거리
날마다 커지는 찬란한 본사 유리 건물을 지나
쨍쨍한 햇빛 속으로 활보
탄탄한 어둠 속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함께 활보 활보 활보
- 이 문재 시 ‘활보’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돌아와
톡톡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 온갖 욕심 버린다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 이 문재 시 ‘지구의 가을‘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여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이 문재 시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 이 문재 시 ‘어떤 경우‘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팍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이 문재 시 ‘아직 멀었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 이 문재 시 ‘손의 백서‘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 이 문재 시 ‘사랑이 나가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리라를 에돌아 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 이 문재 시 ‘밖에 더 많다‘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 이 문재 시 ‘민들레 압정‘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
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 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 이 문재 시 ‘물의 결가부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 내린다
복숭아같이 생긴 여자아이가 걸어간 곳
아주 희박하게 눈발이 흩날리고
머릿발 서 있는
강원도의 힘센 산들이 집중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꽝, 하고 문 열고 나온 휴가병이
국괭이 들고 내려가
꽝꽝 언 계곡물을 내리친다
넓은 이마에서 푸른 김이 피어오른다
강원도의 골짜기 골짜기들이
딴딴한 가슴팍으로 메아리를 받아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발 굵어지고
복숭아같이 생긴 여자 아이
또박또박 강원도 속으로 떠나고
강원도 계곡물 겨우내
시퍼렇게 깊어진다
점점
점점 눈발은 굵어지고
하얀 눈 때문에 앞은 캄캄해지고
강원도는 주먹밥 같은 눈물을
마구 집어던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 이 문재 시 ‘눈 냄새’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 같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 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을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을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윗저고리에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아무 말 없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 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아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 이 문재 시 ‘꽃 멀미‘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이 문재 시 ‘노독(路毒)‘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훌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 이 문재 시 ‘낙타의 꿈‘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 이 문재 시 ‘도보 순례자‘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 이 문재 시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 이 문재 시 ‘길에 관한 독서‘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우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찻잔이나 옷걸이에는 일부러 먼지를 묻혀놓고
상류의 폭우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그는
그림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방 속에서 오래된 무관심을
꺼내 놓는다
여름 휴가
여름의 휴가
나는 그를 아직 알 수 없다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 이 문재 시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치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 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궈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 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 이 문재 시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붙여 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올릴는지
- 이 문재 시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대웅전에서 간화선 대토론회가 열린 날이었다
밖에는 소슬, 소슬한 가을비 내리고
법당 안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스님들과 학자들이 부처님 앞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는 성능이 좋았고 청중들은 다소곳했다
화두에 대하여, 참선에 대하여, 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수십 개 촛대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스님과 학자, 신도 사이에서 조주 무(無)자 화두를 놓고
논쟁이 오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런데 나를 만나면?
나는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포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대웅전 천장에 빼곡하게 걸린 연등 사이에서
참새 두 마리가 사뿐히 내려와 앉는 것이었다
참새 두 마리가 법당 안에 사선(斜線)을 그릴 때
포르릉, 하고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참새 두 마리가 쌀 뒤주 위에 앉아
연신 쌀을 쪼아먹으며 짹짹, 짹짹거렸다
간화선 대토론회 사이에서 듣는 참새 우짖는 소리
그 새소리가 그렇게 맑고 고울 수가 없었다
젊은 부처들에게 얻어맞아 매번 죽는 부처님께서
씨익, 웃고 있었다
- 이 문재 시 ‘활구活句 ‘
** 이 문재: 대한민국의 시인.
1959년 9월 22일, 경기도 김포시 출생. 64세.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동인을 통해 등단했다.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 등의 시집을 냈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2022년 11월 14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할 때 이문재 시인에게
사전 의뢰해 함께 게재했던 추모시 <이제야 꽃을 든다>가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글쓰기와 시 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첫댓글 이문재 시인
긴 시숲에
한찬동안 머물렀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두손이 모아지는
겸허한 자세로
감상 잘 했습니다
시들을 모으고 다시 읽으면서,, 아픔을 많이 느꼈던것 같습니다. 시인의 마음에 제대로 동조하지 못하면서 감정대로 무심하게 읽어나간 느낌.., 세상의 잣대로 보면 ‘~꺼리’밖에 되지 않는게 세상의 일상이지만,,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를 읽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