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에 한 젊은이 있으니
나이 스물에 이미 마음은 늙었네
―이하(李賀)
1
아 이토록 슬픈 그림이 또 어디 있으랴 찢어진 우산 위
로 비는 내리고, 개구리 덤벼드는 실개천에 그는 붉은 목
욕 가운 을 걸치고 서 있구나 미친 척하려고 아버지 중절모
까지 빌려 쓰고 나왔구나 닭! 학! 사쿠라! 보름달! 이 고귀
한 왕자들 가운데 빛도 안 나는 비광, 돈 못 버는 왕좌의
군주이기에 더 슬프구나 그리하여 무직이니까 그대의 정체
는 일단 시인이지?
2
'미친님'이라 불리는 이 비 오는 그림 속의 배우. 이자보
다 더 잘 이하를 연기한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이 배우를
연기한 나는 햄릿이었다 그리고 하남성으로 잠입해 들어가
폐병쟁이 이하가 되었다 나는 이하가 나귀 타고 지나가던
무성한 갈대밭이었다 갈대처럼 황제의 귀에 소근거리던 내
시였으며 이하를 모략한 관리였으며 그 관리의 아버지 하
느님 헌법이였으며, 이하를 몰래 사랑한 계집종이었다 나
는 당나귀의 국민.주권.영토이자, 이하가 시를 담아 두던
비단주머니였고 그가 드나들던 기방의 댓돌이었으며 아아
이 우주가, 이 시시한 실패가 나였으며......
3
시인과 관리가
관리와 부자가――
시를 쓴 족자와 장식품이,
하나는 부인
하나는 대감
하나는 부인
하나는 노인
만져 보니 잔디는 플라스틱
젖가슴은 실리콘
시는 플라스틱
시인은 골프채를 들고
플라스틱 위에 선다
이 놀이를 하기로 되어 있던 나는
지금은 백치와도 같은 분노만 끓어오르는 熱덩어리
수백 개째 남의 술상을 뒤엎은 뒤
택시비를 빌려 귀가한다
4
마음은 장님의 눈처럼 안도 밖도 없는 헐렁한 검은 구멍
일 뿐. 그 안엔 애써 간직할 추억도 숨기고 지킬 비밀도 없
네 마음이 열려 버린 자는 꼭 다물었던 항문이 열려 버린
익사체 더 이상 바다를 막을 힘도 없이 원시의 세포막이
최후로 찢어지며 몸 안 가득 물이 찬다―향년 27세. 이
름: 이하. 과거를 보러 갔다가 햄릿처럼 아버지의 유령이 출
현하는 바람에 신세를 망침.
5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가야 한다고요? 마차에 타게나
그러면 그대의 폐와 간을 새걸로 바꿔 줄게 계속 투전판에
껴서 피워 대고 마셔 댈 수 있지 그런데 패는 비광일세......
염병할 하늘의 딜러! 목욕 가운은 놀이 중인 다섯 살짜리
의 발아래서 임금님의 망토처럼 질질 끌리고 실개천은 줄
줄 눈 아래로...... 이제 그만 내 모자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와 이 자식아......
6
그리하여 나는 청춘의 불을 꺼 준 시간의 단비에 대해
서 감사할 것이다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아서 고
마울 것이다 처녀에게 애를 배게 하던 못된 비바람이 더
이상 내 성기 속에 살고 있지 않아서 이젠 편안할 것이
다......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민음사, 202009.
첫댓글 서동욱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요.
정확한 지적, 감사합니다. 서동욱시인이 보시면 서운하시겠어요.ㅠ,ㅠ
예,,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