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청원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치유를 청하는 겁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치유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압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악령 들린 아이의 아비보다
믿음의 수준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면’이란 말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돌팔이 의사에게도 할 말이 아니고,
의사 특히 명의에게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없이 무엇 하러
의사에게 오고 어찌 치유를 청한다는 말입니까?
고칠 수 없다면 의사가 아니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에게 가서 물을 것이 아니라
가기 전에 그 의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확신이 선 뒤에 가 청해야 합니다.
능력의 하느님과 가능성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믿음의 가장 초보이자 기초입니다.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
사랑과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상태에서 왔고,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믿음도 확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은 어떤 뜻입니까?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는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 선의에 대한 확신은 있습니다.
다만 선의의 내용이 뭔지 모를 뿐입니다.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며
안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쳐 주시는 것만 사랑과 선의라고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에 대해
알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가
고쳐 주시는 선의보다 더 큰 선의라고 믿는 겁니다.
다만 그것이 왜 더 큰 선의인지 지금은 알 수 없고,
미래 언젠가는 주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안 들어주셨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의 더 큰 선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믿음과 청원은 내가 원하는 호의를
밝히거나 요구치 않고 그저 주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뭘 원하는지 주님께서 되물으시면 그때
내가 원하는 호의를 말씀드려도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