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평(下馬評)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사용해야 !!
필자고향에는 역사 깊은 향교(鄕校)가 있다. 명색이 뼈대가 있는 고을에는 지금까지 향교(鄕校)가 있다. 향교(鄕校)는 조선(朝鮮) 시대의 지방(地方) 교육기관(敎育機關)이다.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鄕校)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下級) 교육기관이다 향교에는 공자(孔子)의 모시는 문묘(文廟) 사당(祠堂)도 있다
※사학(四學)-유생(儒生)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이다. 사학(四學)은 중학(中學), 동학(東學), 남학(南學), 서학(西學)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이하가 겸임한다.
자랑스럽게도 필자 고향에 향교(鄕校)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있다 그 향교 앞 큰길에 “하마비(下馬碑)”라고 쓴 돌 비석이 서 있었다. 필자가 고향을 떠난 지 50여년이 넘었기 때문에 “하마비(下馬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지 궁금하다.
“승마(乘馬)”가 말을 타는 글자라면 “하마(下馬)”는 말에서 내리는 글자다. 옛날 주요 교통수단은 말(馬)이었다.
지금 표현으로 “하마(下馬)”는 “하차(下車)”와 같은 말이다. 말(馬)이건 자동차(自動車)건 타고 내리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인데 굳이 “하마(下馬)”라 하고 또 비석까지 세울 필요가 있을까
그 까닭은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통령 실이 용산(龍山)으로 옮겨졌지만 문재인 대통령 때까지는 대한민국 건국후 청와대(靑瓦臺)가 대통령 실이었음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통령 실이 있는 청와대(靑瓦臺)는 경비가 삼엄하여 일반인들은 감히 그 주변에 얼씬할 수 없었다. 필자도 20년전인가 역사유적지 자료에 필요하여 경복궁 뒷산 북악(北岳)에 관한 자료를 답사하기 위해 청와대 정문 앞을 갔는데 정문 앞 약 200m앞에서 돌아가라는 제지를 당한 기억이 난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移轉) 당시의 궁궐(宮闕)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는 권력(權力)과 권위(權威) 명령(命令)의 상징이었다.
이시대의 왕(대한민국 대통령)이 거처하는 청와대는 감히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필자는 일찍부터 청와대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아래의 2가지다.
1.청와대(靑瓦臺)의 처음 이름은 경무대(景武臺)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그 뒤 윤보선대통령이 푸른기외집이라는 뜻의 청와대(靑瓦臺)로 바꾸었다 경무대(景武臺)는 고종 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그 후원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조선을 병합한 일제(日帝)는 경복궁 후원의 시설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939년 일본 총독 관저를 지었다. 총독관저의 명칭은 헐린 건물 중 하나인 “경무대(景武臺)”의 이름을 땄다. 경무대(景武臺)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경복궁(景福宮)의 “경(景)”과 경복궁의 북문(北門)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에서 따왔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래서 필자는 청와대 자리가 왜놈의 조선지배 총독부였기 때문에 대통령 집무실로서는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실 이전을 반대했는데 일본의 발에 짓밟힌 곳에서 대통령 책상을 놓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친일"이라는 말을 내 뱉고 있다
2.지금은 거의 공동묘지(共同墓地 공원묘지라 한다)에 매장을 한다. 그러나 선영(先塋)을 별도로 모시는 예절을 따르는 집안들은 선산(先山)에 조상의 묘지를 별도로 모신다. 선산(先山)에는 고인(故人)의 무덤들이 세대(世代) 순서로 묘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쉽게 말해 손자(孫子)는 제일 아래에 묻혀있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일 윗자리 어른은 묘지의 맨 윗자리에 묘가 있다. 죽은 뒤에도 장유유서(長幼有序)다 ※장유유서(長幼有序)-오륜(五倫)에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경복궁(景福宮)은 묘지(墓地)는 아니지만 통일 조선의 맨 윗자리 궁궐이다. 대한민국 500년 역사의 상징이며 출발점이다. 경복궁(景福宮) 위에 후세의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것은 역사의 질서를 훼손(毁損)한다는 생각이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景福宮)을 신축(新築)하면서 전해지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여기에 다 쓸 수 없다. 아무튼 경복궁위에 청와대가 있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본다는 필자의 생각이다 서울에 다른 곳에 명당이 많다 왜 하필 역사에 패륜(悖倫) 행세를 하는가 !
2005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 1990년 2월에는 새 대통령 관저 신축 공사장 바로 뒤의 바위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쓰인 표석이 발견됐다. “하늘아래 제일 복이 많은 장소”라는 뜻이다. 감정 결과 조선 중기의 것으로 판명됐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는 왜 그곳에 사는 주인들에게 복(福)된 운명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까.
다시 “하마비(下馬碑)” 이야기로 돌아온다. 왕(王)과 신하(臣下) 또는 왕과 백성의 관계가 이렇게 벌어지게 된 것은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자 자신의 존재를 “하늘”처럼 만들고 만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왕과 백성은 대등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진시황이 엄한 법령을 만들어 군신(君臣)간 왕과 백성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처럼(天壤之差) 차이가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궁궐은 성역(聖域)이 되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야말로 전제군주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중국역사의 이런 영향이 조선까지 미쳤다.
그리고 궁궐 앞을 지나갈 때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했다(하마下馬)해야 했다. 그리고 곳곳에 높은 사람 높은 관청이 있는 곳에는 소위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필자의 고향 향교 앞 “하마비(下馬碑)”는 향교에 공자(孔子)의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儒敎)이기 때문에 공자(孔子)의 위상은 상급(上級)이다. “하마비(下馬碑)”는 조선 태종(太宗) 때 처음으로 나무로 만들어 종묘(宗廟)와 대궐문(大闕門) 앞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5년의 절반을 유턴하면서 개각(改閣)을 할 것이라는 말이 무성하다. 그리고 “후임자들이 하마평(下馬評)”에 오르고 있다는 말들이다. 그런데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하마(下馬)”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하마(下馬)”는 글자대로 현직에 있는 각료(閣僚)들이 물러간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하마평(下馬評)”을 새로 입각할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하마평(下馬評)”에 이름이 오른다는 것은 다음에 입각(入閣)한다는 뜻이다. “하마평(下馬評)”은 현직 각료가 물러난다는 말로 써야 한다.
신문기자가 “하마(下馬)”에 대한 의미를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민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 “하마(下馬)”가 물러가는 것인지 새 인물이 들어오는 것인지를---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