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八章 용유진, 다시 도화령에 가다(一)
1.
용유진이 거령자에 도착한 것은 11월 4일이었고, 표행이 출발한 것
은 그 다음날인 5일, 그러나 실제로 표행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이나 더 지난 11월 8일이었다.
이사에 좋은 길일(吉日)에 출발한다고 11월 5일 일단 북경을 떠나왔
지만, 성 밖에서 사흘을 더 지체햇다가 거령장의 식솔들이 혹은 가마
에, 또 혹은 말에 올라타고 따라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
다.
행렬은 길었다. 중원대협 이장도가 백마에 올라타고 선봉을 선 뒤로
'중원표국(中原표局)' 네 자가 적힌 거대한 깃발을 든 표사가 따랐다. 그
뒤로 역시 중원표국의 대표두 네이 위세를 과시하듯 나란히 말에 올라
행진했다. 이들이 번갈아 가며 이번 표행의 대하계(大화計)를 맡는 것
이다. 표행의 선두에서 소리를 질러 행렬을 인도하고, 만약의 경우에는
녹림도들과 협상을 벌이며, 협상이 깨지면 전투까지 지휘해야 하는 역
활이었다.
오십 대의 우마차가 뒤를 따랐다. 그 각각을 네 마리의 소가 끌고
있었고, 수레마다에 작은 표기(표旗)가 걸려 있으며,표두 하나와 표사
두 명이 호위했다. 표사들은 수레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은 창을
들고 있었다. 창을 무기로 삼지 않는 자들도 어쨌든 각각의 무기에 손
을 대고 있어야 하는데, 표행이 끝나는 날까지 행진중에는 항상 이 자
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전통있는 표국의 규칙이었다.
보통은 수레 하나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붙지 않고, 도 그 반은 짐
꾼 겸 수습표사인 쟁자수(爭子手)로 채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느나 이
번 표행은 전원 표사, 표두로 채워져 있었다. 우마차의 선두에서 소들
의 코뚜레를 연결한 고삐를 쥐고,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채근하는 마
부들까지도 표사였다.
그 뒤를 다시 가마들이 따랐다.이번 표행의 출발이 늦어지게 된 제
일 원인인 거령장 식솔들의 행렬이었다. 가마마다 거령장의 대부인,
부인, 첩과 가족들이 타고 있고, 그 옆으로는 하인과 시녀, 그리고 그
들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걷고 있었다. 이들은 중원표국의 표사들이 아
니라 거령장의 호원무사(護圓武士)들이었는데, 그 수가 대략 백여 명이
었다. 그래서 이 모든 일행이 중간에 먹을 거리까지 대충 준비해서 가느
라고 행렬은 더 길어져서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 리(里)에 걸치고, 호휘
무사의 수만 육백이 넘는 대행렬이 이루어졌다. 자연, 주변에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성분 밖에서부터 행렬의 앞에까지 길 양쪽으로 수많
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웅성대고 있었다. 대개는 빈민들이라 구걸의 손
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지만 표사, 후원무사들에게 가로막혀 접근하지
못했다.
이번에 특별히 초빙된 열 명의 고수는 각자 편한 방법으로, 그리고
각자 편한 위치에서 행렬을 따랐다. 대개는 말을 타고 있었지만 진 장
자는 가신들이 드는 예의 남여를 타고 행렬의 가장 후미를 따라가고
있었다. 왕소팔의 표사 노릇을 하는 것이 못내 부끄러워서 조금 떨어져
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 용유진이 비룡을 타고 건들건들 흔들거
리며 동행했다. 본인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진 장자의
말동무가 되어버려서 그랬다.
"그래서 난 여자들이 싫어. 우리 마누라만 해도 어디 한 번 나가려
면 사흘 전부터 준비하고서도 출발시간이 돼야 화장을 시작한다니까.
아무리 일찍부터 준비하라고 해도 미리 화장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네.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그 화장을 하고는 또 얼굴에 면사는
뒤집어 쓰고, 가마 속에 처박혀서 갔다가 가마 속에 처박혀서 돌아온다
네. 결국 봐주는 사람이라곤 자기 가족, 즉 내게느 처가(妻家)가 되는
거지만, 하여간 가족밖에 없는 거야. 그 얼굴 빤히 아는 사람들에게밖
에 안 드러내면서 왜 화장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걸세."
진 장자는 한탄인 듯 하소연인 듯 말을 하다가 문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옆에 있던 용유진이 한참 뒤쪽에 쳐저 있는
것이다.
"그럼 나 혼자 떠들었다는 거야? 젠장."
용유진은 뒤를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경꾼들 틈에 끼여잇
은 한 소년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쥐새끼처럼 작았고, 시궁창에 숨듯
사람들 틈에 숨어 있었지만 용유진은 소년을 알아보았다. 그는 손을 들
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비척거리며 걸어나왔다. 강위명이었다.
"어떻게 된 것냐?"
"도망쳐 나왔습니다."
강위명은 죄 지은 것처러 주저주저하면서도 대답은 또렷하게 했다.
"왜? 잘 안 해주더냐?"
"과분하게 잘 대해 주시긴 했습니다만...."
"잘 대해 주는데?"
"거기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점소이 노릇을 하는 게 창피하더냐?"
"창피하지는 않았습니다."
강위명은 화를 내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주저하며
말했다.
"단지...., 그것말고도 제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용유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강위명이 먼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바짝 세우고, 애써 어깨를
펴 보이고 있었다.
"어렵게 좋은 곳을 소개해 주셨는데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 말
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는 무언가 더 할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냥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그를 용유진이 불렀다.
"점소이가 싫다면 표사는 어떠냐?"
강위명이 돌아보았다. 용유진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웃
어 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 표국에 쟁자수가 필요하던 참이다."
"쟁자수는 무얼 하는 겁니까?"
"글쎄..., 우선은 내 말고삐를 잡아라. 그 다음 일은 천천히 배우
면 된다."
강위명은 잠시 생각해보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구부리며 인사하고
는 말고삐를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표행은 이미 한참 앞으로 가 있었지만 진 장자는 용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시종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자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군."
강위명을 고용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용유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친구입니다."
"어떤 쓸모?"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요."
물론 용유진도 아직 강위명의 쓸모는 모른다.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이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단 하나, 강위명이 동정을 싫어한다는 것뿐
이었다. 애써 찾으면 하나 더 있었다. 강위명은 그일이 어떤 일이든,
일단 하게 되면 잘할 소질이 있다는 점이다. 어쩌다가 우연히 얻게
된 아이였지만, 바로 그 점을 인정해서 백리제일에게 맡겼던 것이었는
데, 이젠 하는 수 없이 그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제자를 두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지만 역시 하는 수가 없었다. 진 장자의 지적대로 오지랖이
넓어 지게 된 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하는 수 없었다.
강위명은 애초에 표사가 되어, 혹은 빈민굴의 시궁창을 벗어나 천하
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를 따랐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객잔에 소개한 것이 잘못한 일이 된다.
용유진은 안장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이 참에 독행표(獨行표)에서 벗어나 볼까? 돈을 빌려서 표국을 확장
하고....., 사람을 좀 모으면....... 아니 이번 표행에서 받는 돈으로 어
쩌면 가능할지도......'
표행은 소걸음에 맞추어서 매우 느렸고, 바나절마다 멈추어서 쉬었기
때문에 더욱 느렸다.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거령장 식솔들 때문이었다.
걸어서 따라오는 시녀들은 물론이고 내내 가마와 마차에 타고 있는 사
람들까지도 온몸이 쑤신다는 표정들을 하고는 쉴 때마다 나와서 손발
을 휘젓곤 했다.
육백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식사와 잠을 해결하는 것도 문제였다.
보통의 표행에서 아침과 저녁은 중간에 거치는 객잔엣, 점심은 그냥
걸어가면서 만두나 건포로 때우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 표행에서는 그
런 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한 객잔에 다 들어갈 수도 없고, 교대
로 식사를 한다 해도 인원이 너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마련한 방책이
길거리에서 식사하는 것이었다. 선발대가 표행보다 앞서 가서 몇 개의
객잔에 미리 식사를 주문해놓고 표행이 도착하면 표차가 있는 그 자리
로 날라와 식사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귀한 몸들은 따로 마련된 객잔의
자리로 가서 식사를 한다. 강위명은 전자에 끼여 있고, 용유진은 후자
였다.
자는 것도 문제였다. 역시 한 객잔에 다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에 나누어 숙박해야 하는데, 중원대협 이장도는 표사들은 아예 객잔
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귀한 몸들만 객잔
에 숙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산야(山野)에서나 하는 야영을 길거리에
서 해야 했다.
아녀자들이 낀 행렬이라 남녀구별을 엄중히 유지하는 것도 문제였
다. 표사들이나 거령장 호원무사들이 기강이 잡혀 있는 것은 믿을 만했
지만, 그래도 남녀간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거친 사내들
이라 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 색기에 눈이 뒤집혀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래서 표국 측은 표국대로, 호원무사 측은 또 그쪽대로 표시
내지 않고 내부를 다스리며 은밀한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보통의 표행에서는 생기지 않는 잡다하고 번잡한 문제
들까지 해결해가며 행진한 표행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직할부, 북직예
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나흘 후 였다. 그냥 쉬엄쉬엄 걸어가도 이틀이면
갈 거리를 두 배나 걸려서 온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표행은 한층
어려워졌다. 이제부터는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
이었다. 당장은 도화령을 넘어야 했다. 이젠 귀한 몸들도 야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곧 그렇게 됐다.
도화령이라고 하나인 것처럼 부르지만 실제로는 몇 개의 큰 산과 몇
십 개의 작은 봉우리, 그만큼의 계곡들을 가로질러 난 길이 그것이었
다. 그러니 구불구불 높고 낮은 길을 따라 가야 할 여정도 험했다.
그 험한 고개들을 채 반의 반도 못 넘어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
대로는 오늘 안에 고개를 못 넘는 것은 당연하고, 고갯마루에 있는 허
름한 객잔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이장도는 해가 서산에 걸치는 것을
본 시점에서 야영을 결정했다. 고갯길에서 그대로 야영을 할 수는 없으
니 산등성이를 야간 내려간 개울가, 주위로는 울창한 숲이 있어서 제법
바람도 막아주는 곳을 잡아 천막을 쳤다. 물론 거령장의 귀한 몸들을
위한 천막이었다. 표사들은 전원 조를 나누어 경계를 서고, 쉬는 사람
들은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로 둘러앉아 자도록 했다. 그
전에 먼저 식사를 준비하느라 전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용유진은 고
갯길에 그대로 서서 석양을 보고 있었다.
해는 맞은편 회녹색의 산봉우리에 낮게 걸쳐 있었다. 그는 이장도의
조금 이른 듯한 야영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볼 때는 아
무리 빨라도 사흘은 가야 고개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정을
무리해서 단축하려다간 긴 여행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지쳐버리게
된다. 그러면 그 이후의 행보는 더욱 느려질 것이다. 이럴 땐 오히려
쉬엄쉬엄 가는 것이 빠른 길이 된다. 더구나 산 속에서는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것이다.
산에서 해는 빨리 진다. 방금 산봉우리에 걸쳤는가 했더니 어느새
산봉우리를 통째로 삼킬 정도로 크기와 붉기를 더해가다가 하 순간 피
처럼 붉은 잔영을 남기고는 사라져버린다. 그 반대편에서는 이른별들
이 진보라의 하늘가로 떠오르고, 땅위에는 어스름한 순청색 기운이 깔
렸다. 장밋빛 노을이 산봉우리들을 물들이고, 산 아래는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그윽한 청색이 감돌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나무 사
이로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스쳐가다가 잠담해진 순간부터 천지는 혼
몽 속에 잠겨 공요해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깊고 오묘한 푸른색
이 감돌았다.
"아름답군요. 이런 풍경은 처음 봐요."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였지만 용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산 속에서 밤을 맞다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그보다 저
는 소저에게 약간 놀랐습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뒤쪽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고작해야 십
칠팔 세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차림새가 수
수한 것을 보면 거령장의 시녀 중 하나일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
을 용유진은 알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단지 고요한 일
몰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아는 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소녀는 용유진의 말이 흥미 있다는 듯 물었다.
"그래요? 제가 어떻게 표사님을 놀라게 해드렸나요?"
"아, 별건 아닙니다. 대력귀라는 흉악한 명성을 날리시는 소저의 입
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에 놀랐을 뿐입니다."
소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빛이더니 곧 하는 수 없다는 듯 엷은 미소
를 띠었다. 그녀는 용유진의 말대로 대력귀였다. 지금 이 모습은 천면
호리의 역용술이 만들어준 대력귀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젠 제가 놀랄 차례군요. 어떻게 돌아보지도 않고 제가 대력귀라
는 것을 알아차렸죠? 목소리도 다른데."
용유진은 코를 가리켰다.
"냄새죠. 모든 사람에게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저는 개코라서
한 번 맡은 냄새는 안 잊거든요."
대력귀는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몇 번 맡더니 낯빛을 바꾸며 화를
냈다.
"점잖지 못하게 희롱하는 말로 아녀자를 놀리시는 군요. 제 역용법에
는 용모와 신분에 맞춰 체취를 바꾸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혹시 근
본적인 제 체취가 따로 있다 해도 지금 바람의 방향은 서 계신 곳에서
제 쪽, 제 체취가 용 공자의 코에 들어갈 리 없지요. 이래도 냄새 운운
을 고집하실 건가요?
용유진은 미소를 흘리며 손을 저었다.
"농담 한 마디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코가 둔해서 향불을 켜서 갖
다 대고 모르고 자곤 합니다. 게다가 시골 출신이라 촌스러워서 방향
(芳香)의 종류는 구별할 엄두도 못 내지요. 그냥 농으로 던진 말이니 용
서해 주시길."
그는 이번에는 발을 들어 손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사실은 걸음소립니다. 다가오시는 걸음소리를 듣고 알았지요."
"걸음소리요?"
"예, 걸음소리. 제가 코는 둔해도 귀는 제법 밝지요. 하지만 보통 걸
음소리를 듣고 사람을 다 구별하지는 못하는데, 다행히 소저의 걸음 소
리에는 독특한 울림이 있어서....."
"그건 제게서 냄새가 난다는 말보다 더 심한 말씀이군요. 역용을 전
문으로 삼는 제게 독특한 버릇이 있어서 보지 않고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그녀는 이번에는 진정 심각한 표정으로 몇 발짝 걷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용유진을 보는 것이 이번에도 농담 아니냐는 빛
이었다.
용유진은 쓰게 웃었다. 괜히 농담을 하는 바람에 경박한 사람으로
비친 셈이다. 그 인상을 지워 주려니 다시 대력귀의 역용법에 결정적
인 약점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수긍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
존심에 상처를 입시는 셈인데, 일이 이렇게 되니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이었다. 그는 농담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익힌 무공에 따라 걸음소리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특별한 무공을 시전할 때는 보법을 밟거나 진각(震脚:발구르기)을
하거나 해서 소리가 다를 수도 있겠죠. 또, 자기도 모르게 일정한 규칙
성이 걸음에 붙어버린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제 걸
음에 있다는 건가요?"
"아니요. 소저의 걸음에는 그런 버릇 같은 것은 없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또 저를 희롱하시는 건가요?"
대력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입술은 뾰로통하게 내밀어져 성
난 모습이 되었다. 만약 지금도 역용한 상태라면(물론 역용한 상태겠지
만), 저런 감정의 세심한 변하까지 표현해 주는 저 역용술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고 용유진은 내심 감탄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자꾸 오해를 더하게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콕 찍어서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랬소이다. 뭐랄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 기풍(氣風)같은 거랄까요?"
"기풍이요?"
"혹은 기세, 또 혹은 기백, 어쩌면 후천지기(後天之氣)의 자연스런 발
로(發露) 같은 것일 수도 있지요."
"점점 어려워지는군요."
"한 마디로 말해서 소저의 걸음에서는 소림무상신공(少林無上神功)
의 기풍이 느껴진다는 겁니다."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불평을 터뜨릴 것같이 움찔거리던 대력귀의
입이 꼭 다물어졌다. 용유진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어중이떠중이 무공에는 해당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일가를 이룬 상
승무공의 경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무상신공을 배운 사람
은 무상신공으로 생각하고 무상신공으로 밥을 먹고, 무상신공으로 걷
는다는 거지요. 그 사람의 생활 자체가 수련이 되고, 무공시전이 되는
셈이라는 겁니다. 나는 예전에 상승지경에 이른 무당 검객을 만나본 적
이 있는데, 그의 몸가짐 하나하나에서 무당검법의 기풍을 느낄 수가 있
었지요. 유장하면서도 강한, 법도가 없는 듯하면서도 면면히 흐르는 법
과도를 느끼게 하는, 거센 물결을 안으로 간직한 거대한 강과도 같은
기풍을 말하는 겁니다. 같은 도교 문파라 해도 추상(秋霜)처럼 삼엄하
고 엄격한, 그러면서도 세월을 깊이 간진하고 침묵하는 산처럼, 때로
는 분노한 듯 깎아지른 절벽처럼 오연한 기풍, 즉 화산검법의 기풍과는
매우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소림무상신공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니, 먼저 제가 소
림무상신공을 익힌 것으로 봤다는 건가요?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용유진은 희롱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변명할 수 없을 것처럼 빙글거
리면서 말했다.
"뭐랄까, 무상신공에는 그런 기백이 있습니다. 한없는 자비로 중생
을 계도하려 하느 것이 불가의 근본, 그러나 도저히 말이 먹히지 않는
사마외도(邪魔外道), 나찰과 아귀들을 대하여서는 이 몸이 지옥으로 떨
어지더라고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노라, 하고 외치며 달려드는 것 같은
기백 말입니다. 정의와 절대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근본
적인 무량(無量)의 자비로 뒤를 받치고는 달려드는 그 기세를 보면 죄
가 있건 없건 일단은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니까요. 전에 무
상신공을 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절 때리려고 달려들 때, 꼭
그런 기분을 느꼈었지요. 공교롭게도 그 사람도 여인이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 용유진은 대력귀를 바라보았다. 대력귀는 그의 시
선을 피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이미 어두워진 하늘로 시선
을 두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다시 용유진을 보았다.
"용 공자의 안력이 실로 놀랍군요. 언젠가 들통이 날 줄 알았지만
이렇게 일찍 정체를 드러내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용유진은 손을 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정체를 밝혀낸 건 아니고.....!"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절대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그 상대
가 용 공자고 보면 제독(提督)께서도 용서해 주시겠지요."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손을 올려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허
리를 숙여 그에게 깊이 읍했다.
"격조(隔阻)하였습니다. 소녀 권정(拳精), 용 공자께 문안드립니다."
권정.
용유진은 이 소녀를 알고 있다. 과거 그녀의 주먹에 맞아 코피가 터
지고, 뒹굴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보령군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근
삼 개월간 매일같이 그녀와 싸우던 시기의 일이었다. 그녀와 힘을 합쳐
사면초가의 함정을 뚫고 나온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보령군주를 구하기
위해 당금의 황제, 당시의 황태자와 함께 했던 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는 권정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역용술은 확실히 그
도 감탄할 만큼 신묘해서 원래는 알아보지 못해야 옳을 일이었지만, 권
정은 그날 거령장에서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이다. 대력금황기를 사용한
것이다.
용유진이 알기로는 대력금황기는 그와 황태자밖에 모른다. 그는 유
출한 적이 없으니 황태자로부터 누군가에게로 유출되었다고 불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황태자 주변의 누군가에게일 것이다. 그래서 유심히 본
그는 권정의 특유한 기풍을 알아차린 것이다.
권정이라면 납득이 갔다. 보령군주를 보호하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느 황태자라면 권정에게 대력금황기를 잔한다 해서 이상할 것
이 없었다. 그녀가 천면호리의 후계자로, 해청의 소개를 통해, 여기 거
령장 왕대야의 이삿짐 호송에 끼여들었다는 건 적잖이 이상한 일이었
지만, 그녀가 입에 담은 이름 하나로 인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떤 이상하고 황당한 일도 전혀 이상하게, 황당하게 보이
지 않도록 하는 이름, 제독이었다. 동창과 제독태감의 이름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으므로.
권정은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말했다.
"용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소녀의 안계가 넓어지는 듯하군요. 저는
제 걸음에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었네요."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도 한 번 변해 예전에 그가 알고 있던 그 얼
굴로 돌아와 있었다. 단정한 용모에 오랜 무공수련으로 쌓여진 절도가
배어 어딘지 딱딱해 보이는 표정, 권정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매로 한
번 가렸다 나타나는 동안에 바뀐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재주라고
생각하며 용유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의식하지 않고 있어서 드러난 것이지요. 의식하고 있으면 금방 가
릴 수 있는 것이요."
"의시가는 것만으로 간단히 고쳐지겠습니까? 오랫동안 제 걸음에 밴
것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간단한 일이지요. 다른모습으로 변장했을 때는 다른 무공을 생각
하면 되는 겁니다. 의식적으로요. 제가 알기로는 소저는 상당히 많은
종류의 무공을 익히고 계시지요? 그럼 더욱 쉬워지겠지요."
권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용유진의 말로 한 가지를 깨닫고
는 아차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소녀가 한 가지 더 실수를 했군요. 거령장에서 대력금
황기를 쓰는 게 아닌데....., 소림무공을 쓰면 다들 알아볼까 해서 남
들이 모르는 무공을 썼는데, 원래 용 공자께서는 음..., 어른께서 그
걸 시전하는 걸 보신 적이 있지요?"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 소생도 그걸 익혔소. 어른의 후의에 힘
입은 것이지요."
"아.....!"
용유진이 화재를 돌렸다. '어른'이라고 돌려 말하긴 했지만 황제를
자꾸 거명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보다 소저께서 대력귀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것은 의외군요. 천면
호리의 후계자라는 신분도 있으셨던가요? 아니, 그보다 해 노사와 모
종의 관계가 있어 보이던데.....?"
"소녀는 그보다 용 공자님을 이렇게 만나뵌 게 더 의외네요. 표사가
되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번 일을 맡으셨을 줄이야."
질문을 질문으로 반격당한 셈이었다. 용유진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간
단하게 대답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요. 표사가 되고 보면 의뢰를 거절하기가 쉽
지 않아서."
"소녀도 그렇습니다. 종복(從僕)이 되고 보면 임무를 거절하기 어렵
지요."
그 한 마디를 하고 권정은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
만 용유진은 그 한 마디로도 그녀가 넘칠 정도의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이 여기 온 것, 지금 하는
일 모두가 모종의 임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의 입으로부터 더
이상의 사항이 나오도록 한다는 것은 그녀를 해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은 꼭 한가지 사항만은 더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가
알기로는 권정은 보령군주의 호위였다. 원칙적으로 황제와 보령군주의
명령 외에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모종의 임무는 황제, 또
는 보령군주가 내린 것일 터였다. 그런데 아까 그녀는 제독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건 동창의 제독태감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녀의 임무가
제독태감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걸 시인하는 것이다. 신분을 위장하
고, 도둑질을 하고, 표행에 끼여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동창의 방식다
웠다.
그럼 그녀는 그새 동창의 위사라도 된 것일까? 동창이 이 표행에 관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건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비록 그 자신이 동창 위사 출신이라 해
도, 아니 그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는 동창이 개입해서 좋은 일이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군주나 황제가 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이쪽도 여러 모로 복잡한 문제
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동창의 개입보다는 나
았다. 최소한 그쪽은 말이 통하는 상대니까. 그러나 동창은 이익 외에
는 설득이 불가능한 단체였다. 그 단체를 움직이는 핵심이 그이 사부라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용유진은 둘 중 어느 쪽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가 맡은 이 표행의
성패가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권정을 바라보며 도대체
당신의 주인은 누군가라고 물을까 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묻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밝게 웃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녀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시오?"
권정이 어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좋은지 어떤지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음....확실히 여인네들은 여행할 기회가 좀처럼 없긴 하지요."
"그런 것도 있지만, 소녀는 원래 궁내에서 태어나서 거의 궐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지요."
"궁내에서 태어나요?"
용유진으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궁내에서 태어날 수 있는 사람
은 황족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궁비(宮秘)라는 것이지요."
고래로 황궁 내에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그 목
적만을 위해 탄생되고, 키워지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걸 궁비라고
통칭하는데, 권정은 그 중에서도 무비(武婢)라고 하는 부류의 출신이었
다. 무공을 배워 황궁의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되고, 키워지는
아이, 그들의 어머니 또한 무비였고, 외할머니 또한 무비이며, 그녀의
아이 또한 무비일 것이다. 이렇게 운명지워진 모계 혈통의 여인족이 무
비인 것이다. 남자는 태어날 때 처리되고 여인만 키워진다는 비장한 일
을 배경에 깔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권정이었다.
용유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일반의 사람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끝은 모르는 거대권력 아래에서 자행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다. 황제와 국가로 통칭되는 그 권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
이 왜소해지는 것이다. 이 시대에 그것은 운명으로 짐 지워지므로 누구
도 반항할 수 없고, 반항하는 자의 앞에는 험난한 인생이 기다리기 때
문에. 그러므로 그도 권정을 위로할 한 마디 말도 던지지 못했다.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 좋아질 거요. 오늘 같은 저녁과 또 다른 아침들을 맞아보면
틀림없이 좋아질 거라는 걸 제가 보장하지요."
권정도 모처럼 그 딱딱한 표정을 풀고 티없이 웃었다.
"벌써 좋아지는걸요."
"그래요, 다행이군요. 사실 여행의 재미는 풍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
지요."
"또 다른 것은?"
용유진은 어둠 속에 잠긴 먼 산을 가리켰다.
"모험이지요. 예기치 않은 만남과 행운, 혹은 위험과 고난들을 혹은
즐기며, 혹은 헤쳐나가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들이지요."
권정은 눈을 반쯤 감고 용유진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뭔가요? 저 어슴푸레한 빛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대규모의 인원이 야영을 하느 걸 거요. 우리 일행만큼이나
대규모로....."
"도적일까요?"
"어쩌면 그럴 거요. 사실 우리처럼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모이지 않
았다면 이 정도 인원이 한 군데에서 야영을 하는 일이란 흔치 않지요.
그 흔치 않게 많은 일행이 우리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걸 나
는 우연이라고 보고 싶진 않군요."
말을 하다가 문득 용유진은 권정을 향해 미세하게 표정을 바꿈으로
써 신호를 보냈다. 권정이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이 용모가 다시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옆으로 진 장자가 다가왔다. 용유진의 신호는 그것을 알
린 것이다.
진 장자는 한때는 부호로 산 사람답게 어슬렁거리는 걸음새로 다가
왔다. 그러면서도 곁눈으로는 권정이 용모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가에
흐르는 호기심의 빛이 매우 엉큼스러워 보여 용유진은 쓴웃음을 흘렸
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 그는 말했다.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근데 이 소저는 누구신가? 뵌 적이 없
는 것 같은데?"
용유진은 희미하게 미소를 흘렸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으신 게 틀림없습니까?"
진 장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권정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무례하
다 싶을 정도로 뚫어지게 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 번 본 여인의 얼굴은 절대로 잊지 않네.
그런데 분명 이분 소저는 기억에 없군."
"수수께끼를 하나 드리지요. 진 장자께서는 이분을 보신 적이 있습
니다. 그것도 최근에. 하지만 처음 보는 것도 맞지요. 기억을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말하자면 구면이면서도 초면인데..... 자, 이 분
은 누굴까요?"
진 장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좀 재주가 많은 편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자신 있는 게 수수
께끼 풀기지. 나는 단 한 번도 못 맞춘 적이 없거든. 빨리 푸느냐 늦게
푸느냐가 문제일 뿐일세. 자, 나는 생각 좀 해봐야겠군. 방해하지 말게
나."
권정이 기대어 섰던 소나무를 떠나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저는 이만 내려가서 식사나 해야겠군요."
"아, 그래, 그거야!"
진 장자가 손뼉을 쳤다. 용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쉬운 문제이긴 했지만, 벌써 맞추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생각났네. 식사하라는 말을 전하
러 왔다는.....!"
용유진은 포권을 하며 절까지 해서 감사의 뜻을 과장해서 표했다.
"그런 일로 귀하신 몸께서 여기까지 오시게 하다니, 송구스럽습니
다."
"아,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고....!"
진 장자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가 누군데 일개 표사의 식사
를 걱정해서 여기에 왔을 것인가. 며칠 계속된 거친 식사에 질린 데다
가 마침 용유진이 안 보이자 따로 요리를 하나 해서 살피러 왔다는 것
이 그의 진짜 목적이었다.
어른답지 않게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날 때부터 부호로
자라온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맛있는 과자를 기대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어린애처럼 입을 내밀고 서 있더니 문득 말했다.
"방금 저 여자가 대력귀인가?"
용유진은 정말로 놀랐다.
"어떻게 그리 빨리 맞추셨습니까?"
"봤지만 보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역용을 떠올렸을 뿐이네."
진 장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고는 대력귀가 내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재주 없는 것이 여자의 덕이라고 하지."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여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야. 글이든 무공이든."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여자를 너무 무시하시는 말씀 아니신가요? 제가 알기로는 뛰
어난 여인네들도 적지 않은데, 단지 남녀유별을 내세워 그 재능을 발휘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 아닐까요?"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네.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평을 주장하면 살기
가 힘들어. 여자가 너무 재주가 넘치면 대개 그 인생이 꼬이기 마련이지."
용유진은 말문이 막혀 조용히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진 장
자의 말이 의외로 사리에 닿는 데 당황한 것이다. 그는 어쩌면 진 장자
의 능청에 속고 잇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
장자는 말을 돌렸다.
"이번에 초대된 소위 고수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 각각 한 마디의
말로 그들을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네. 그 중 하나가 아까
그 말이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
"가령 남궁 소가주는?"
"짖지 않는 개가 사람을 물지. 위험한 놈일세."
위험한 인물이다. 용유진은 진 장자의 평가에 동의했다.
"중원대협에 대해서는?"
"공작새 같은 놈일세. 화려해 보이지만 바람이 불어 꽁지 깃이 흩어
지면 더없이 초라해지는 거지."
"중원대협에 대한 평가가 유달리 박하시군요."
진 장자는 고개를 저었다.
"박하지 않아, 전혀! 그는 오히려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
다네.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세(勢)를 타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천하고
있어서지. 하지만 기반 없는 누각은 금방 무너지는 거야."
용유진은 더 따져 묻지 않고 빙긋거리기만 했다. 진 장자는 아마도
이장도와 왕소팔이 사이가 좋아 보여서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고 생각
했기 때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 장자가 표사와 물주의 관계를 몰라
서 하는 생각일 것이다. 맡은 일만 묵묵히 해서 퉁명스러워 보이는 사
람도 있고, 물주와 잘 사귀어서 어차피 하는 여행을 되도록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사람도 있다. 용유진도 그런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고, 이
장도도 그런 듯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현재까지 이장도의 일처리는
훌륭했다. 적지 않은 인원, 적지 않은 표물을 운송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게 일행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표사라면 싸우는 능력을 우선으로 평
가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에서 더 능력을 쳐줘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그도 해청이 그를 평가하여 말하기를 '최고의 표사이긴 하지만
최고의 표국주는 아니다'라고 한 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다. 현재
로서는 최고의 표국주는 이장도인 것 같다고 그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싸우는 능력, 전투에 임해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서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불빛에 대해 보고를 해야겠군.'
이번 표행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이장도인 이상 그가 발견한 수상쩍
은 징후에 대해서도 보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
려가려다가 그는 문득 진 장자에게 질문할 것이 하나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어떻습니까? 저를 보고 느끼신 점은?"
진 장자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용유진은 대답을 기다리며 역시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하지. 지금까지는 훌륭한 요리사라는
것만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뿐이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지
만 자네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일세."
용유진은 빙긋 웃었다.
"진 장자께서도 마친가지입니다."
생각없이 한 말이지만 용유진은 문득 자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버렸다. 진 장자는 확실히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맹한 사내가 아니었다. 예전에 보여준 무공만으로
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공만 높을 뿐 다른 능력은 보통 이하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방금 보여준 통찰력으로 생각해 본
다면 이 사람이 재산관리를 잘 못해서 패가망신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이 왜?'
급기야 왕소팔의 보표 노릇을 하게 되었을까. 혹시 모종의 목적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유진은 오늘 몇 개의 의문을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표물을 나르
다 보면 그것을 노리는 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러나 이번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권정의 경우 표물
을 노리고 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황제, 혹은 군주가, 또는 동창이
일개 부호의 재산을 노린다고 보기는 쉽지 않았다. 진 장자도 마찬가지
였다. 그가 표물에 욕심을 낸다면, 그럴 사람이라면 애초에 가산을 탕
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분명히 모종의 목적이 있
어 보였다. 그는 문득 이번 표행에서 가장 강한 적은 소위 초빙된 사대
고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을 느끼고 아연 긴장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냥' 표물을 노리는 자들부터 해결할 일이다.'
그는 진 장자를 보았다. 진 장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맹하게 서 있
다가 그를 보았다. 용유진이 말했다.
"저녁 드시러 가시죠."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해요~^^
ㅈㄷㄱ~~~~~``````````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보고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