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36호
스펀지
한명희
내가 텅 빈 구멍이어서
자주 헛헛해진다는 걸 안다.
인정하기 싫지만
구멍이 점점 늘어난다는 걸 안다.
나 자신만으로는
나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제만 해도 아침에는 프로작을 넣어주었고
점심에는 타이레놀을, 저녁에는 슬립 에이드를 넣어주었다.
수시로 카페인과 알코올도 부어주었다.
그런다고 견고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다고 진중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대로 그냥 두면 바짝 말라 부숴져버릴 거라는 것.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단단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안다.
-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여우난골, 2024)
***
한명희 시인의 신작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에서 한 편 띄웁니다.
참고로, 종이비행기를 타고 스위스를 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시집입니다.
- 스펀지
이 시에서 시각적으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뭘까요?
저는 마침표(.)였습니다.
유독 5연에서만 마침표를 찍지 않았거든요. 분명 시인의 의도가 있었을 텐데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시집 속에서 이 시 바로 전에 나오는 시가 「이십 대」라는 시입니다.
"서서 죽고 싶었다/ 가다가 죽고 싶었다/ 가방이 텅 비었어도/ 계속 걷고 싶었다// 이십 대였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시인은 이제 오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지요.
그리고 오십 대인 지금의 모습을 스펀지로 빗대어 말합니다.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려봅니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이렇게 고백하고 있네요.
이십 대의 나는 언제나 길 위에서 중얼거리곤 했다. 파편같은 단어들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폐허, 무너진 왕국의 백성들, 가벼운 기쁨과 무거운 슬픔들, 비명과 절규,
폐선, 침몰한 함선의 선원들, 가벼운 희망과 무거운 절망들, 익사와 객사,
폐가, 재개발 철거촌 난민들, 가벼운 살림과 무거운 자본들, 실업과 실직,
폐렴, 폐결핵 그리고 폐경기, 가벼운 동물과 무거운 식물들, 자업과 자득,
폐지, 끝끝내 버려진 종이들, 가벼운 말들과 무거운 기억들, 육체와 정신,
그렇게 이십 대는 갔다. 가벼운 만남들을 무거운 이별로 대체하면서...
그리고 지금을 생각하니, 놀랍게도 한명희 시인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제만 해도 아침에는 프로작을 넣어주었고/ 점심에는 타이레놀을, 저녁에는 슬립 에이드를 넣어주었다./ 수시로 카페인과 알코올도 부어주었다."
단단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겠다 다짐하는 아침입니다.
2024. 5. 13.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