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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영이라는 것에도 원칙이 있다.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 자리를 잡 되 너무 가까운 곳, 이를테면 계곡 같은 곳은 좋지 않다. 특히 우기에 는 더욱 그런데, 언제 물이 불어서 떠내려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을 피우되 불빛이 새어나가는 것도 금기 사항이다. 스스로의 위치를 드러내는 멍청한 짓이기 때문에 그렇다. 야영지의 모양을 구성할 때도 지형과 조건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방어진(防禦陳)을 만들 듯하는 게 좋 다. 강호에서는 누구든 적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운찬과 그의 수하들, 왕소팔의 표물을 약탈하기 위한 별동 대라고나 할 장강수로연맹의 정예요원들은 이런 원칙들을 하나도 지키 지 않았다. 일단 우기가 아니고, 그 외의 원칙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다. 산에 서 야영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적이지 산적이 아 닌 것이다. 야영의 원칙 중에는 여름이라도, 그리고 하룻밤만 쉬어가는 것이라 해도 보온에 만전을 기하라는 것도 있는데, 산 속의 기온이라는 건 평 지와 달라서 갑자기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왕소팔의 표행을 습격할 기회만 엿보며 산 속으로 들어왔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뒤늦게 야영을 시작했다. 가을이라 선선하니 기온 따위는 생각지도 않 고 물 있는 곳만 찾아서 야영지를 정했기 때문에 막상 해 떨어지기 무 섭게 기온이 한겨울처럼 떨어져버리자 앞뒤 가리지 않고 모닥불을 피 워댔다. 이런 형편에 방어진이 어디 있고, 은폐, 엄폐는 어디 있으랴. 오백에 달하는 인원들이 모닥불 몇십 개를 피워놓고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구 웠다. 안주가 좋으니 술이 나오는 게 당연하고, 애초에 절도(節度)나 자 제와는 거리가 먼 생할을 해왔으니 참을 리가 없었다. 연운찬을 비롯한 수뇌부부터 술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수적 중에도 머리 있는 자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연운찬에게 말했다. "저기..., 적이 멀지도 않은 곳에서 이렇게 놀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요?" 연운찬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사발에 담아 마시던 화주(火 酒)를 마저 넘기기 위해 목젖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주란 원래 독한 것이지만 그들이 마시는 화주는 더욱 독했다. 뱃사람들이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술이 강한 연운찬이라도 한 사발 을 다 마시기 위해서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렇게 다 마신 후에도 바로 말을 하지는 못했는데,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서 창자를 따 라 내려가는 동안 발산하는 열기를 차분히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 고 아무리 완별하게 술을 소화해도 결국에는 남는 마지막 열기는 입을 벌려 '꺼억' 소리와 함께 토해내고 나서 손등으로 입을 씻고, 수염에 묻 은 술방울을 턴 다음 안주를 -- 안주는 당연히 오리고기였다. 화주에 이 이상 가는 안주는 없기 때문에 -- 들어 한입 가득 씹으면서 비로 소 대꾸를 했다. "적? 누굴 말하는 거냐?" "중원표국 말입니다." "걔들이 왜 적이야?" 연운찬의 즐거운 음주를 방해한 자는 장강수로십팔타(長江水路十八 舵)에 속한 열여덟 개의 수채(水寨)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 와 세력을 지닌 교룡번운타(蛟龍飜雲舵)의 타주, 번운교(飜雲蛟) 한상자 (韓霜磁)였다. 한껏 멋을 부려 지은 소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법 머리에 먹물이 든 자였는데, 연운찬과는 십 년 넘게 행동을 같이 해온 처지였지만 지금처럼 당연한 질문에 반문을 해오면 도대체 무슨 생각 을 하는지 몰라 곤란해하곤 했다. 연운찬의 찬(鑽)이라는 글자는 일종의 송곳을 뜻하는데 수적들이 흔 히 무기로 사용하곤 하는 것이지만 막상 연운찬의 무기는 송곳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가도 사람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생겼냐 하면 그것 도 아니었다. 곰처럼 비대한 몸집에 멧돼지같이 우악스러운 인상, 고슴 도치처럼 무성하게 자란 수염은 '포악스럽다'고 하면 몰라도'날카롭다' 와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그런데도 송곳이라는 별호를 갖게 된 것은 이 인상과는 다르게 간혹 핵심을 꿰뚫는 말과 행동을 하곤 하기 때문 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표국이란 말이야, 우리가 공격하지 전까지는 적이 아닌 거야. 그놈 들에게 적이 되는 건 길을 막고 표물을 내놓으라고 하는 산적들이라고. 우린 수적인 데다 여기서 평화롭게 놀고 있잖은가. 그런데 왜 윌가 표국의 적이 되나?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놀고 있는 동안은 한없이 안 전한 거지. 우린 더 열심히, 소문 나게 놀아야 할지도 몰라. 자, 한잔 더 따라봐! 자네도 한잔 하고." 일설에는 연운찬의 별명인 송곳이 '낭중지추(囊中之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했다. 찬은 어차피 '추(송곳)'의 일종이며, 연운찬이 처음에 는 장강수로십팔타 소속의 수채 중에서도 말석에 속하는 어응타(漁鷹 舵)의 일개 졸개에서부터 시작해서 강북수적들의 우두머리인 총타주까 지 된 것에 근거로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 은 찬은 송곳이라고는 하지만 끝이 갈라져 있고, 그걸 나무에 대고(이 경우 대개는 지나가는 상선의 배 밑판 나무지만) 돌려서 파내듯 구멍을 내는 것이라 보통의 송곳과는 따로 구별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 고 연운찬이 성공한 것도 그가 재능이 있어서, 날카로운 두뇌가 있어서 가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서라고 했다. 중요한 시점에서 간혹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곤 했는데, 묘하게도 그게 승리와 연결되어 성공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운찬의 찬은 '낭중지추'의 '추'와는 다르다 는 이야긴데, 이건 대개 연운찬에게 진 수채들의 채주들과 그 주변 사람 들이 하는 말이고, 그나마 지나가는 배도 없고, 날씨도 구질구질해서 한가할 때 술안주 삼아 하는 이야기니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없 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연운찬은 단지 운이 좋을 뿐, 날카로운 두뇌가 있는 자는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 에 근거를 더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운도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했더니 금세 그들은 수많은 기마병력에 의해 포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표국은 털려고 들기 전에는 적이 아닐 지 몰라도 다른 도적떼는 원하는 물건 가까운 곳에 있기만 해도 적이 된다는 것을 연운찬이 간과한것이다. 이번에 적이 된 도적떼의 정체는 깃발 하나를 보고 알 수가 있었다. 3장에 달하는 거대한 장창(長槍)에 높이 걸려 휘날리는 깃발, 검푸른 밤하늘에 한 장의 먹구름처럼 펄럭거 리는 검은 깃발이었다. 한 장의 거대한 검청색 천이 있다. 이걸 길이가 3장에 달하고, 굵기 는 오리알만큼이나 하며 재질은 남만에서나 난다는 철목(鐵木)으로 해 서 어지간한 보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강인함을 자랑하는 장창에 높이 달면 흑기(黑旗)가 된다. 이 거창한 깃발을 숙영지(宿營地)에서 쉴 때는 땅에 깊이 꽂고, 나무를 보강하여 쓰러지지 않게 하며, 옆에는 보초까 지 두어 관리하고, 일이 있어 원정을 나설 때는 아홉 명이 조를 이루어 항상 행렬의 선두에서 휘날리게 유지하고 관리하는 방회(幇會)가 있으 니 이게 흑기회였다. 흑기회에서 깃발을 관리하는 조를 흑기조(黑旗組)라고 했다. 방회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조인 만큼 명예도 크고, 돌아오는 보수도 후했다. 회주의 관심도 지대해서 이 조에 속해서 1년만 활동하면 반드시 다른 조의 조장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흑기회 안에서 이 흑기조의 조원, 또는 조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장 길이의 철목이라면 같은 길이의 철봉에 비해 그다지 가볍지 않 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혼자서 들 수도 없는 무게, 그래서 흑기조 는 3인 1조가 되어 깃발을 들고 다녔다. 게다가 깃발을 말아서 가지고 다니면 그래도 나을 텐데, 펴기라도 하면 그냥 세워서 들고 있기에도 벅찼다. 깃발이 받는 바람의 압력이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조원 전체가 사력을 다해 버텨야 쓰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흑기 회주 곽천성은 이걸 행진하는 동안, 적어도 전투 중에는 반드시 휘날리 면서 가고 싶어했다. 사람은 둘째치고말이 버티지를 못하는 일이었다. 웬만한 말은 쉬지 않고 두세 시진을 달리면 쓰러져 죽어버린다. 웬만큼 비대한 사람이 올라타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버텨도 발목이 부러지 기 일쑤다. 거기에 거대한 장창을 들고, 그 장창에 엄청나게 넓은 천이 달려 있어서 바람을 가득 안고 휘날리게 되면 코끼리가 아닌 이상 버 티지 못할 것이다. 처음 과천성이 흑기를 상징으로 삼아 들고 다니자고 했을 때, 수하 들은 다들 훌륭한 생각이라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첫 출전을 해보고 난 뒤엔 모두들 박수쳤던 손을 잘라내버리고 싶어했다. 깃발을 들고갈 방법이 없어서 출진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모두들 달려들어 이 생각을 포기하자고 했지만 과천성은 멋을 최고 로 생각하는 사내였고, 불행히도 아집까지 심했다. 십여 필의 말이 주 정앉아 일어서지도 못하고, 또 몇 마리는 간신히 일어섰다가도 발목을 분지르며 넘어가고 난 뒤에 과천성은 다른 방법으로 이 난제를 해결하 고자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흑기조고, 흑기조장이었다. 급히 이 동할 때는 흑기조 세 명이 일렬로 말을 달린다. 그 세 사람으 손에 흑 기가 들려 있는 것이다. 무게를 셋으로 분할한 셈이라 그나마 말이 버 티게 되었다. 적을 만나거나 세력권 안을 지날 때는 조장이 등장한다. 천부의 신력에 발까지 빠른 사내, 그리고 그것 외엔 별장점이 없어서 공식적으로는 '천리마(千里馬)', 뒤에서 다른 사람들은 '당나귀' 내지는 '노새'라고 부르는 사내, 장패(張覇)였다. 그는 한 손에 깃발을 들고도 웬만한 말만큼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삼 년째 흑기조장에 서 물러나지 못하게 되었다. 달리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므로. 깃발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또 있었다. 한 사람이 3장 길이의 막대 기를 들고 다녀야 할 때 생기는 문제들 모두가 장패와 흑기조원들의 고민거리였다. 가령 오늘처럼 산 속에 들어올 때는 길이라도 뚫지 않으 면 운반이 어려운 물건이 이 깃발이었다. 세워서 들고 다니자니 나뭇가 지가 걸리고, 눕혀서 들고 다니자니 나무 둥치가 걸린다. 숲 속의 고불 고불한 길을 이걸 들고 지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서 이번 일, 즉 왕소팔의 황금을 노리는 경쟁자를 먼저 쳐서 도태시키 는 기습작전에서 가장 오래 흑기회 막료(幕僚)들의 머리를 괴롭힌 것이 이 깃발이었다. 이에 비하면 요동의 벌판에서나 위력을 발휘하는 기마 병들을 말에 태운 채로 산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 그렇게 말에 탄 채 소리도 없이 숲을 헤치고 계곡을 건너며, 벼랑을 타고 내려오는 일, 그래서 유람나온 것처럼 떠들고 노는 장간수로십팔타의 멍청이들을 포 위해다가 한 순간 튀어나오는 것은 어린애 장난 처럼 쉬운 일이었다. 고 르고 고른 명마들을 믿고, 오랫동안 단련된 수하들의 기마술을 믿으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 깃발을 다치지 않고 가져와 땀을 닦는 천리마 장패의 어깨 를 두두리며 과천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깃발을 고집하 는 이유는 간단했다. 멋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아주 없지 은 않았다. 지금 같은 경우 깃발은 적에게 대단히 위압적인 힘을 발휘 하는 것이다. 싸움은 기세의 대결이라고 믿는 그에게 이것은 대단히 중 요했다. 어쨌든 여태까지는 성공하지 않았던가. 과천성은 싱글벙글 거리면서, 한편으로는 연운찬을 경멸 어린 눈빛 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에...., 또... 그래서 ...,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에....., 그러니까.... 여러 가지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그래 서..., 가령.... 날 형님으로 모신달지.... 그런 걸 말하는 거다." 과천성의 결정적인 약점이 이것이었다. 지독한 동북지방(東北地方) 사투리를 쓰는 데다가 약간은 말을 더듬는다는 것. 게다가 조리 있게 말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즉, 말재주가 없는 것이다. 한 번 말하려면 대단히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하는데도 별로 유창하다거나 의표를 찌 른다거나 하지를 못해서 그 자신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출중한 외 모,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 멋을 아는 감각까지 완벽하게 갖추 었다고 생각하는데 유일하게 모자란 것이 언변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성격적 편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극단적으로 멋을 추구하고, 둘째로 언변 좋은 자를 극도로 미워했다. 말꼬리 잡는 자도 매우 싫어했는데, 불행히도 오늘 만난 자가 그런 인간이었다. 그 것도 말꼬리 잡기를 매우 좋아하며 그것으로 스스로 언변이 좋다고 자 부하는 자였다. 연운찬은 그들을 포위한 기마대를,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겨 눈 활들을 둘러보며 입에 남은 오리고기를 마저 씹어 넘겼다. 그리고 손을 들어 과천성의 주의를 끌면서 질문했다. "형님으로 모시면 되는 건가? 그걸로 끝이냐는 거다. 목숨도 살려주 고 집으로 돌려보내 준단 말이지. 그럼 그렇게 좋은 걸 왜 안 하겠어? 어이, 형! 형님! 대형(大兄)!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 받으셔!" 그러면서 그는 술잔과 술병을 들고 일어서서 과천성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막무가내로 나오면 이쪽이 오히려 당황하는 법이다. 과천성 은 연운찬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질려서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짜고짜 검을 뽑아 연운찬을 찔러갔다. 이걸 쓰는 사람에게야말로 '찬'이라는 별 호를 붙여야 마땅할 것 같은,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한 협봉검(狹鋒劍) 이 연운찬의 목젖을 향해 일직선으로 육박해갔다. 이것이야말로 연운찬이 노리던 상황이었다. 그는 과천성을 향해 술 잔을 던져 시야를 가리고, 술병은 든 채로 휘둘러, 다가오는 검봉(劍鋒) 을 쳐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술병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속에 반 쯤 차 있던 화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처음에는 술잔에, 뒤에는 이 화주 에 시야가 가려서 과천성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연운 찬은 그 덩치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신속한 동작으로 칼을 뽑아 과천 성을 향해 휘둘렀다. 이 또한 연운찬의 덩치처럼 크고, 두껍고, 긴 대 감도(大坎刀)였는데, 이 순간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마치 가느다란 대 나무 가지를 휘두르는 듯이 날카로웠다. 과천성 또한 녹록하지는 않았다. 언변으로는 딸려도 다른 방면으로 는 어디 한 구석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답게 그는 초공(初功) 의 실패를 후퇴 몇 걸음으로 금방 만회하고, 그 또한 검을 휘둘러 대감 도를 막았다. 특이한 것은 그의 검이야말로 대나무 가지처럼 가는 것인 데도 마치 기둥뿌리라도 뽑아 휘두르는 것처럼 웅장한 소리를 낸다는 점이었다. 가벼운 협봉검으로 무거운 대감도를 막기 위해서 경력을 무 겁게 운용한다는 증거였다. 반면 연운찬은 둔한 대감도로 날랜 협봉검 을 상대하기 위해 경력을 빠르고 가볍게 운용하기 때문에 그런 날카로 운 소리를 낸 것이다. 이렇게 기질도, 용모도, 사용하는 무기에 무공까지 정반대인 두 사람 은 순식간에 수십 수(手)를 교환했지만 어느 한 쪽 밀리지 않고 팽팽하 게 대치했다. 연운찬은 무겁게 검을 휘두르다가도 틈만 나면 기도(氣 度)를 변화시켜서 버들잎을 찌르듯 빠르고 날카롭게 과천성을 찌르곤 했고, 과천성 또한 날래게 도를 쓰다가도 기회를 봐서 대감도의 팔십 근(斤) 무게를 이용해 거칠고 강맹한, 힘 위주의 공격을 하곤 했다. 눈 이 밝고 무공이 뛰어난 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변화였다. 그 눈이 밝고 무공이 뛰어난 자들은 양측에도 몇 안 되는 수뇌부의 인물들이었는데, 양자 공히 '백중세'라고 눈이 전혀 안 밝고 무공은 삼 류 밑바닥을 기는 졸개들과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렇게 판단 은 같아도 반응은 서로 달랐다. 흑기회의 수뇌부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양쪽 우두머리 간의 싸움으로 진행되면 애써 포위한 보람이 없는 것이다. 초반의 기세 로 차지한 유리한 위치도 회주의 서투른 대응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 가지가 되어버렸다. 물론 포위를 했다고 몰살을 시카자는 것은 아니었 다. 장강수로십팔타는 애초에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수뇌부를 전멸 시킨다고 장강수로십팔타를 복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복속시 켜도 처치 곤란이었다. 수적질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들 흑기 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망신을 주고 머리를 조아리게 해서 적당한 예물을 받고 모두 석방, 그 후에는 약간 우위에 서서 적당히 이용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그들 흑기회가 중원 진출 초전에 장강수로십팔타를 꺾었다는 소문만 나도 괜찮았고, 적어도 이 번 표물 강탈 건에서 장강수로십팔타를 손 떼도록만 해도 좋았다. 그런 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급전직하, 두목이 상대편 두목과 피 튀기게 싸우고, 그들은 손놓고 구경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반면 장강수로십팔타의 수뇌부, 특히 번운교 한상자는 희희낙락까지 는 아니어도 내심 즐거워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연운 찬의 임기응변으로 해소시키지 않았는가. 그들을 향한 화살들은 아직 치워지지 않았지만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할 과천성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연운찬이 이기면 좋고, 져도 처음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타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기로야 전부 싸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포위망을 해소하는 것인데, 아무리 흑기 회에 돌대가리만 모여 있어도 그 정도로 정신없는 놈들은 아닌 듯하고, 막상 포위망을 해소하는 은밀한 행동을 취해야할 장강수로십팔타의 인 원들도 적들과 비슷한 상태로 구경에 취해 있어서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한상자도 엉거주춤 구경을 하며 상황이 변하는 것을 지 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상자와 같은 고민을 연운찬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지를 발 휘해서 상황을 바꿔 놓았으면 알아서 나머지 일들을 해야 할 것 아닌 가. 시선을 집중시켜 놨더니 자기들도 같이 구경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 는 일이냐 말이다. 게다가 지금 싸움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싸움이 있다. 그가 이겨버리면 흑기회 놈들이 회주의 복수를 어쩌고 하며 죽자 고 달려들 것이고, 지면 체면이 구겨질 뿐 아니라 진 것을 기화로 불리 한 처지에서 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기기도 쉽지 않 았다. 과천성이라는 이 기생 오라비같이 생긴 말더듬이는 생전 듣도 보 도 못한 기괴한 검술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연운찬과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성격의 고민을 과천성도 하고 있 었다. 꼭 그가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졸개놈들 은! 일이 꼬인다 싶으면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이 나서서 상황을 해결 할 수도 있어야 훌륭한 졸개라 할 것 아니냐. 꼭 다 죽이라는 것도 아 니었다. 그저 들고 있는 활로 몇 놈 쏴서 부상을 입혀놓고, 적절히 위 협하면 아까의 상황, 그 좋던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느냔 말이 다. 게다가 이놈의 미련곰탱이처럼 생긴 놈은 왜 이리 잘 싸우는지. 대 감도 같은 중병(重兵)을 회초리 휘두르듯 가볍게 휘두르는 놈은 처음 보는 과천성이었다. 아무래도 비기(秘技)를 발휘해야 할 것 같지? 과천성은 갑자기 진흙탕 속을 억지로 걸어가듯 발을 옮기면서 뒤로 물러섰다. 소위 창니보(槍泥步)라고 해서 기를 온전히 간직하면서 이동 하는 보법이었다. 연운찬은 과천성이 후퇴하는 만큼 전진하면서 공격을 그치지 않다가 문득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또한 손을 놓고 물러났다. 그 리곤 바로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과천성이 회심의 빛을 은근히 띠면서 숨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검. 버드나무 휘휘 늘어진 가지처 럼 가느다란 그 협봉검이 독사의 혀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그 는 보았다. 그는 표정을 굳혔다. 이젠 정말 장난이 아닌 상황이었다. 이렇게는 되기 싫다고 생각한 바로 그 상황, 좋건 싫건 목숨을 걸고 싸 울 시간이 된 것이다. 연운찬 또한 숨을 고르면서 대감도를 치켜들어서 어깨에 둘러메었 다. 그가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한 초식, 태산압정(太山壓頂)을 사용하려 하는 것이다. 권법에도, 도법에도, 심지어 검법에도 이 초식은 있고, 강호 어느 파에서도, 심지어 떠돌이 약장수도 기초로 배우는 초식이 이 태산압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 동작은 하나, 상재의 머리를 위에 서 아래로 내리치는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운찬은 바로 그 간단한 동작을 자신의 최후 비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습득한 초식이 이것이기도 했다. 똑같이 아래로 내리치는 동작이 라도 벼락처럼 빠르게, 우레처럼 강하게, 태산처럼 무겁게 내리치면 가 공할 초식이 된다는 것이 그이 믿음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 기를 싣는 방법을 연마했던 것이다. 상대의 공격 따위는 무시해도 좋았 다.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내뻗는 공격의 위력이란 대단할 것 없으므 로. 그리고 설사 큰 상처를 입는다 해도 상대는 반드시 죽일 수 있으므 로. 비슷한 생각을 과천성도 하고 있었다. 그가 숨겨놓았다가 지금 내놓 으려 하는 비장의 절초는 독사토신(毒蛇吐身)이었다. 태산압정과 마찬 가지로 어떤 무기에도 적용되며, 무림인이면 누구나 아는, 적을 향해 직선으로 찔러가는 간단한 초식이었다. 알면 누구나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벼락처럼 빠르게, 우레처럼 강하게, 독사의 이처럼 날카롭게 찔 러가도 피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천성의 생각이었다. 방어 따윈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목으로부터 뒷골까지 관통 당하고 내뻗는 공격의 위 력이란 대단할 리 없으므로. 그리고 설사 그가 상처를 입게 된다 해도 상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므로. 긴장이 더해가고, 바람마저 숨죽여 흐르는 듯한 순간, 압축된 살기가 주변 사람들까지 소름끼치게 만드는 그 때에 누군가가 욕설을 뱉었다. 그것이 이 상황을 종료시켰다. "멍청한 것들! 너희 두 멍청이가 죽자고 싸우는 동한 어부는 이득을 챙기는 줄도 모르는구나." 과천성과 연운찬이 솔개 뜬 마당의 병아리처럼 뛰어 각각 한 장씩이 나 물러났다. 그리고 긴장으로 흘린 땀을 닦으며 욕설을 뱉은 자를 보 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빛은 의문이었다. 연운찬이 주위를 향해 물었다. "저 단지머리 영감은 도대체 누구야!" 학처럼 가는 목에 단지처럼 큰 머리를 불안하게 흔들며 소나무 가지 에 서 있는 늙은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욕설은 그 늙은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늙은이, 금대괴두는 안 그래도 불안한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며 소나 무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앗---!" 누구라 할 것 없이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곧 뭉개진 시체 하나를 보게 되는 구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배반하며 금대괴두는 누군가 받쳐주는 손에라도 선 듯이 천천히, 깃털처럼 가볍게 지면에 내 려섰다. 그리고는 연운찬과 과천성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너희들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 지.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을 알고 싶지 않느냐?" 연운찬이 물었다. "뭐가 중요한 일이란 말이오." "어부가 누군가 하는 일이지." "어부가 누군데?" "녹림도 총표파자 사대철인 임태풍일세." 연운찬은 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태풍이 산적이면 산적이지 왜 어부요? 언제 업종을 바꿨대요?" "너희 두 멍청이가 노리는 물건을 먼저 챙기려하니 어부다. 너희는 조개랑 학이고. 조개랑 학이 다투는 틈에 어부가 먼저 이득을 챙긴다는 말까지 해줘야 너의 두 멍청이는 노부의 말을 이해하겠느냐?" 연운찬과 과천성이 아무리 불학무식(不學無識)해도 이쯤 말하면 이해 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씩 안색을 변화시키며 서로를 바라보 았다. 그러나 당연한 일도 학인을 안하면 만족을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 과천성이 그랬다. 그가 금대괴두를 향해 물었다. "그, 그러니까...임태풍.....녹림 초, 총표파자가 왕소팔의 표물 을 노략..... 챙기고 있단 말요?" 금대괴두가 그 불안한 머리를 끄덕였다. 과천성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말은 연운찬이 빨랐다. "전원 출동! 왕소팔을 친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잘밨어요
즐독입니다
잘 읽고갑니다. 항상 고마워요. 건강하세요. 검은 눈동자님.
즐감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보고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