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37호
바이칼 호수의 젖은 눈빛
김윤배
(전략)
열차가 속도를 늦추며 플랫폼으로 들어선다
브레야역이다
철로 주변에 늦게 핀 맨드라미가 검붉다
늦가을 정취가 물씬한 역은 한적하다
역사가 긴 잠을 깬 듯 나른하다
역무원들이 나와 열차를 맞는다
열차가 서자 경비병들이 열차 칸마다 막아선다
내무인민위원들이 열차 칸칸에 올라
불평분자로 점찍은 사내들을 색출해 체포한다
저들이 어찌 불평하는 사내들을 알았을까
열차 칸마다 그들이 박아놓은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체포되어 끌려간 사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용건을 일일이 확인한다
똥오줌을 참아 방광이 터질 듯한 사람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린다
플랫폼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사내들은 플랫폼에 서서 오줌을 갈기고
아낙들은 기찻길을 넘어 뛴다
하차가 느려지고 배설이 다급해진 사내가 경비병을 밀치며 소리쳤다
간나새끼, 너 똥 안 싸고 살아? 아랫배가 터질 지경이라고
얼결에 넘어박힌 경비병이 소리쳤다
저 놈을 체포해!
경비병들이 몰려들었다
사내는 경비병들에게 끌려갔다
사내의 발등으로 오줌이 흘러내렸다
사내의 붉은 눈빛이 플랫폼에 쏟아져 내렸다
사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말은 두려운 무기였다 사내가 끌려가고 나서
말의 불행이 숨어 있는 플랫폼은 조용했다
플랫폼은 똥을 누고 오줌을 누는 사내들의 묵묵한 표정이었다
경비병들은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쳐 바지를 올릴 여유도, 치마를 여밀 여유도 없었다
강제이주열차에서 절박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시간은 늘 아팠고 멍들었고 쫓겼다
빅토르는 엄마를 부축하며 돌아오는 예카테리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다
멀리서 그녀가 웃는다
미소가 슬프다
예카테리나 엄마가 홑청처럼 펄럭인다
저 펄럭임으로 어찌
이 혹독한 여정을 견디어낼 수 있을지
강제이주열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브레야역을 떠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왜 요지부동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순명이 살아남는 길인 것을 깨달은 사내들이었다
요지부동은 이틀을 지나고도 요지부동이었다
시간은 브레야역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온갖 소문들이 열차의 칸을 옮겨 다녔다
소문들은 입도 눈도 귀도 날개도 있었다
불안을 말하고 불안을 보고 불안을 들었다
소문들은 그 많은 불안을 칸마다 날며 옮겼다
1층의 전역 하사관인 사내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개새끼들!
그 고함소리에 열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게 말이 돼? 왜 머무는지, 언제 출발하게 되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냐?
학생 그렇지 않아?
사내의 성깔이 빅토르에게 날아왔다
빅토르는 웃었다
야, 웃음이 나와?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카테리나가 빅토르 옆으로 다가 앉았다
빅토르는 사내의 시선을 피했다
어른이 말하는데 왜 대답이 없어?
사내의 목덜미에 핏발이 섰다
사내들에게는 숨기고 있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발톱은 분노가 비등점에 이를 때까지 부드러운 근육 뒤에 숨어 있었다
발톱은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 깊었다
빅토르는 열차 밖으로 나갔다
경비병에게 물었다
언제 출발하는가?
모른다
이게 말이 되는가 왜 머무는지 언제 떠나는지 말해줘야 하니 않나?
그걸 나도 모른다니까
누가 아나? 사령관? 역장?
글쎄
만나게 해줘
그건 안 돼 너희들은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다
그때 초급장교가 이들에게로 걸어왔다
왜?
이 녀석이 열차가 왜 안 떠나느냐고
그건 아무도 모른……
초급장교는 빅토르에게 말하다 말고 그의 어깨를 잡는다
야, 너 빅토르 아냐?
오, 보리스 너였어?
둘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너 군대 갔었어?
응, 2학년 마치고, 초급장교로, 1년 됐네
그랬구나 왜 안 보이나 했지, 청년당원 모임에 자주 갔었다
너는 열혈이었지
너 또한
그랬나?
어떻게 돼가는 거야
나도 몰라 이 열차가 중앙아시아로 이주되는 1호 열차라는 거밖에는
이건 말도 안 돼
그 이상은 말하지 말자 네가 여기 있는 거 알았으니 자주 들릴게
보리스가 목이 긴 붉은 장화를 거만하게 되돌려 갔다
그의 어깨가 강철 같았다
빅토르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사내에게 말했다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개새끼들!
사내는 혼잣소리를 했다
열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사내의 아낙이 삶은 감자를 예카테리나에게 건넸다
그녀는 사내의 거친 말을 용서 빌고 싶었다
예카테리나는 사양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밀어놓았다
예카테리나는 빅토르를 쳐다봤다
빅토르는 아낙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넸다
예카테리나, 조금 전 밖에서 보리스를 만났어
보리스?
나 대학 2학년 때 바이칼에 갔었지? 기억 나?
응, 기억 나
그때 같이 갔던 러시아 친구 보리스, 극동대학교 의학과 2학년 학생이었잖아
아, 그 보리스
그 친구가 초급장교가 되어서 이 열차를 타고 있어
그래?
예카테리나의 눈이 커졌다
열차 안은 추웠다
난롯불이 꺼져갈 때마다 누군가 장작을 던져 넣었다
시든 영혼을 던져 넣는 제의처럼 경건했다
작은 원형 난로는 열차 구석을 모두 데우지 못했다
2층은 따스한 공기가 올라가 견딜 만했다
1층은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와 영하의 기온을 보였다
바닥에 깐 널빤지는 틈새가 벌여져 차가운 바람이 솟구쳐 들어오고는 했다
열차 안은 퀴퀴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환기를 해도 목재 벽과 바닥에 배기 시작한 냄새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지린내와 구린내는 더 이상 후각을 자극하지 못했다
마비된 후각은 지린내와 구린내를 구별하지 못했으나
독한 냄새 뒤에 숨은 향기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지린내와 구린내는 향기였다
그 향기로움은 삶의 원천이며 구원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때나 오줌을 누고 똥을 쌌다
2층의 백군 출신 사내는 요강을 가지고 올랐다
요강은 새벽이면 찰랑찰랑 넘쳤다
열차를 내릴 때마다 경비병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지만
배설은 그것보다 훨씬 절박했다
먹고 싸는 일이 인생이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는 사내들은
싸고 돌아오는 잠깐 동안 언제나 행복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몸이 몸이게 하는 것, 마음이 마음이게 하는 것이 행복이었다
싸는 일은 몸이 몸이게 하는 일이었다
싸는 일은 마음이 마음이게 하는 일이었다
(후략)
- 서사시집 『시베리아의 침묵』(달아실어게인 시인선, 근간)
***
한국근현대사사전에는 "한인강제이주"를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1937년 소련정부가 연해주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일. 이는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예방조처로 취해진 것으로서, 스탈린의 민족 강제이주정책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결과, 연해주에 있던 한인 약 20만 명이 모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우즈베크 등지로 이주되어 소련시민으로 동화되었다. 그러나 이주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인명과 막대한 재산손실을 빚어냈으며, 현재도 당사자인 한인교포들은 소련정부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사전으로 요약할 수 없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역사책으로 축약할 수 없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당시 한인(고려인)들의 도저한 아픔들이 있습니다.
김윤배 시인의 대서사시 "시베라이의 침묵"을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시와 시인의 자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시인입네 행세했던 일들이
아프고 부끄러운 오월의 아침입니다.
2024. 5. 20.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첫댓글 시도 감상평도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작아지는 한 사람 머물다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훌륭한 글을 이제서야 보다니 시인은 과연 어떤자세여야 하는가? 이문재처럼 그렇게 하는게 진정 시인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