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없다 [오탁번]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 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 속삭임, 오탁번 유고시집, 서정시학, 2024
* 오탁번시인과의 첫번째 인연은, 홍정순시인이 등단할 때
시사랑회원들이 축하하러 갔다가, 우리 테이블에 오셔서
말씀은 한마디도 안하시고 찬찬히 우리를 관찰하셨댔다.
맑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뽀빠이처럼 앉아계셨었다.
두번째 인연은 원서헌에서 시에 대한 강의를 하실 때
시사랑회원들이 우르르 갔었댔다.
대부분 남아서 술도 마시며 일박도 했었다.
차디찬 마룻바닥을 걱정하며 동송님이 실내화를 보내주셨었다.
세번째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고 속삭임 없이 하늘로 가셨다.
몇학번이세요?라고 물으면
- 나, 오탁번이야!라고 하실텐데......
첫댓글 폭설이 내리던 날
원서원에서 하룻밤
나무 난로옆에서
추위를 녹이면서
오탁번 시인의
시의 세계를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경청할때가 생각이 납니다
애련리 좁다란 길이 눈으로 가득해서 간신히 운전해서 드나들었었죠. 애련리라는 마을 이름이 정감갔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