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은 '주색겸비' 회원이신 항쉬범님이 고인이 되신 날이었고, 또 몇몇이 담양에 사시는 빨강밥님 댁에 찾아든 날이기도 했지요. 담행여행은 진작에 다녀왔으나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을 두고저 이제사 여행담을 올립니다. 함께 떠나고 싶으셨으나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했던 분들께 담양 소식 전합니다.
좌우간 우리는 담양으로 떠났어요. 마담 샘과 할미꽃, 여름산 이렇게 셋이서요.
날씨는 맑았고, 바람 건듯 불고, 집 떠나는 세 여인네의 맴은 홀가분했죠(물론, 우리의 마담 샘은 내려가는 내내 생전의 항쉬범님 얘기를 하고 또 하며 안타까워하셨답니다).
이러저러 찾아든 담양 주평리에 커다란 팽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빨강밥님이 창이를 델꼬 마중 나오셨더군요.
창이를 잃은 뒤에, 새로 들어온, 낯가림이 아주 심한 창이
파란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 서자 창이는 낯선이들과 눈만 마주쳐도 뒤꼍으로 달아나고 또 달아나고, 빨강밥님 또한 창이 못지 않게 어쩔 줄을 몰라 하시대요. 그래서 더욱 용감해진 객은 제 집 드나들듯 쌀독을 뒤지고, 김치를 꺼내와 마당에 앉아 삼겹살판을 거하게 벌였지요. 이에 질 새라 봄볕은 땃땃하게 내리쬐고, 빨강밥님은 바짝 마른 대나무로 모닥불을 지펴 주셨어요. 대나무 말간 불을 쬐면서 노릇노릇 아주 잘 구워진 삼겹살에 쐬주를 마시며 봄날을 즐겼습니다. 가끔씩 불구덩이 속에서 대마디가 뻥뻥 터졌고, 우리들의 창이, 고놈은 삼결살을 던져 줘도 그 근처도 못오고 침만 젤젤 흘리더만요.
"아가, 우린 너한테 관심 한 개도 엄따."
멋드러진 돌담과 이쁜 소나무 두 그루, 간이 온실, 뒤곁 텃밭까지.... 둘러보니 있을 거 다 있었어요.
딱따구리 한 마리 나뭇가지로 날아와 울길래 담장 밑에 과꽃 씨를 뿌렸어요. 까만 씨앗들이 이렇게 속삭였어요.
"꽃필 때 오노."
아, 배도 부르고, 술기운도 오르고 해서 우리는 동네 대나무 숲길을 어슬렁거렸지요. 대숲에도 들어가 봤어요. 바람이 불면 댓잎 떨리는 소리가 일제히 살아나고, 바람이 멈추면 물속처럼 고요했습니다.
이번에는 영산강변으로 낚시를 갔습니다. 해가 뉘엇뉘엇, 바람 쌩쌩 불어와 쫌 춥드만요. 그래, 여인네 서이 웅크리고 있었더니 한 남자 강둑에 불을 지르드만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갈대식구들 활활 타오르며 다음 생을 기약하고 나서 우리에게 온기를 나눠 주었어요.
"영산강 방화범으로 보이는 한 남자와 공범으로 보이는 두 여자를 공개 수배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어뜨케 하까?"와 "글쎄요...."를 반복하면서 때론 느린 듯, 때론 빠른 듯 봄날의 하루를 즐기고 파란대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우리으 창이, 눈이 마주쳐도 뒤곁으로 달아나지 않고 멀찍이 서 있기만 하대요. 우리 너이는 너머나 이쁜 이불 속에 몸을 녹이며 빨강밥님의 그림과 목판화를 구경했습니다. 빨강밥님은 아조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가셨스미다.
주평리 들판에 어둠이 내려앉자 까마귀떼 수백 마리가 창공을 이리로 저리로 몰려다니다 대숲으로 내려앉대요. 까만 놈들이 너울너울 고만고만해 보여도 늠름한 놈, 까부는 놈, 날개 다친 놈... 제각각이라 올려다 보기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자 우리는 주평리 번화가에서 청국장에 밥먹고 전라도 제일 번화가 광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선 마담 샘의 오랜 친구 허형만 시인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셨죠. 고운 시집도 받고, 술도 마시고, 노래 부르는 사이 밤은 깊었습니다. 다들 노래를 어찌나 잘 부르시던지.. 특히, 빨강밥님이 부르는 노래는 참으로 듣기에 좋았습니다.
밤 10시쯤, 광주에서 허 교수님과 헤어져 주평리에 다시 잠깐 들렀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들으 창이, 어둠 속에서 캉캉 짖대요. "창이, 너 밤 되니까 세졌구나!" 창이가 또 한 번 우리를 웃게 하대요.
밤 11시쯤, 빨강밥님과 창이와 잠든 까마귀떼와 대숲, 주평리 산하를 두고 우리는 서울로 향했습니다, 도착하니 새벽 3시쯤.
파란대문 집을 활짝 열어 주신 빨강밥님, 광주에서 따뜻하게 맞아 주셨던 허형만 시인님 고맙습니다 .
또 운전하시랴 고생하신 할미꽃님도, 특히 많이 웃게 해준 우리으 창이도.
" 창이야, 부디 행복하게 잘 살그래이."
이상입니다. 제가 여행 중 사적인 생각에 빠져 흘려 들었던 재미난 이야기들은 다른 분들이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첫댓글 대숲에 날아 온 바람소리 싸르르르 싸아 생생합니다~~ 창이는 목걸이를 만들어 이름표를 달고, 빨강밥님 전화번호를 적어 두세요.
목에다 뭘 감고 달지를 못하겠더라구요..ㅠㅠ
이르케 불을 질르며 놀아쎄요.
저렇게 불을 질르고 놀았습니다. 상경누님 허형만 선생님도 참 고마웠습니다.
엘에이의 상경 언니가 커피와 치즈 등을 따로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카페의 백**씨께서 맛있는 롤 케잌을 보내주셨는데, 그만... 헤푼 마담이 도서관 사서분들께 나눠 들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해되죠?
고즈넉한 뜰이 곧 바빠지겠지요. 과꽃 필 때 또 가요. 단정한 저 지붕은 기와무늬의 양철지붕이랍니다.
생생보도...잘 보았습니다. ^^
몬 가서...울었제?
울창한 대나무길도 멋지지만, 불장난?이 못내 부럽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