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생명 말씀(2023.5.28.) 말씀/ 마태복음 5: 3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믿음의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할 때, 막연히 멀리 미래의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고, 현실의 천국, 삶에서의 천국을 도외시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는 붙들고 살지만 신자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야 할 특권입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의 천국을 누리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주시는 ‘팔복’은 인간의 높은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삶에서 천국을 누리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요”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현재적으로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게십니다. 천국은 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우리 안,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놓친 사람들은 금식하며 슬퍼해야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혼인집 잔치처럼 천국을 ㄴ리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랐을 때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그 때 제자들도 나아오자(1). 예수님은 이 소수의 무리 중심으로 팔복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어떻게 하면 천국을 소유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은 대게 인간적 성공, 출세,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굴리고, 사람을 부리고, 다른 사람을 명령하며 부릴 수 있습니다. 돈은 세상에서 맘몬(신)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물질적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어로 ‘poor in spirit’, ‘프토코스’라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빈곤,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서 갈급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거지의 특징은 최대한대로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굽히고 누워서 가장 약한 신체를 보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간절한 심령으로 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은혜들을 덧입음으로써 진정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자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도 심령이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갑부, 미국의 억만장자 휴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자신도 자기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습니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돈이 전 세계에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무서운 병이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병이었습니다. 그는 친구, 친척 심지어 자식들과 아내까지 의심했습니다. 모두 쫓아내고 혼자 살았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독을 숨겨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음악도 들을 수 없고 누구와 악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경호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현관 손잡이도 손수건으로 싸서 열었습니다. 식사는 마켓에 가서 깡통 음식만 사서 먹었습니다. 그것도 의심스러워 아주 조금씩 먹었습니다. 얼마후 휴즈는 죽었는데 병명은 아이러니하게 영양부족 이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뿔뿔히 흩어져 버리고 빈손으로 이 땅을 떠나갔습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무조건 나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매이게 된다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눅18:25).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하고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는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 보니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죽어 장사 되었는데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눅16:19-23). 성경은 부자가 나빴다는 말도, 거지 나사로가 훌륭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현실에 부족함이 없이 살았기에 하나님께 매달릴 필요도 없고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지 않았고, 나사로는 세상에 기댈 것도 없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나사로는 천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부자가 들어가는가,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 아니고 누가 가난한 심령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가 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가난한 심령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가난한 심령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 비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을 지니려면 비워야 합니다. 특히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진 이유 중에 하나가 탐욕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못했을 때 이들은 불평 불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상대적 세상에서 살다 보면 끊임없이 비교하며 탐욕을 부리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딤전6:8). 우리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우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탐심이 없습니다. 넓은 초원에 많은 초식 동물들이 몰려다니고 주변에 맹수들이 있지만 공격하는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는데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들도 보면 많은 둥지, 남 보다 더 큰 둥지를 짓지 않습니다. 여우도 자기가 잠자고 쉴 공간의 굴 하나만 만들고 삽니다. 수 백년 수 천년이 지나도 집을 헐어 큰 집을 짓거나 고급으로 짓고 “이 굴은 내 것이다”하고 도장 찍어 등기하는 짐승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백 년도 못 살면서 욕심을 부리고 먹지 못할 것까지 저축하고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행복합니까? 부자가 된다고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침대를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책은 살 수 있지만 기억력은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은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장식품은 살 수 있지만 아름다운 마음은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좋은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말 좋은 것은 못합니다. 특히 천국은 돈으로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쪽 나라의 임금님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워있었습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임금님의 병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가 홀연히 찾아와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임금님은 온 나라 방방곡곡에 신하들을 보내 행복한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어스름 무렵 왕자님도 이제 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길가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행복에 찬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저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이렇게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는 기뻐하며 신하를 시켜 금은보화를 대가로 주고 그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속 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심령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채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불교는 비우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입니다.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은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더 좋은 영적인 천국의 은혜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 욕심을 비운다면 이제 신령한 은혜들로 채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극 영적인 것을 끝없이 갈망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고,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며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우리 영혼 속 사람이 말씀으로 넘치고 영적인 것으로 채워지게 되면 자연 시와 찬미와 노래가 흘러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심령이 부요해지고 세상 적인 것으로 주리지 않게 됩니다. 아모스 선지가가 마지막 시대를 향하여 예언한 말씀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인생의 기갈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영적인 말씀으로 채워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멘. 사도 바울이 장막을 치며 개척자로 살며, 몸의 가시로 인해 고통 당하면서도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말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인하여 자신이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2:9). 존재가 부요한 사람은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서 어떤 자가 진정 부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것이 없다”(마8:20)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처럼 가난한 분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거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4평자리 아파트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걸음 더미에서 일으키셨습니까(삼상2:8).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셨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부요하신 자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8:9). 예수님의 부는 소유나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부자셨습니다.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의가 다 그 안에 있으십니다(잠8:18). 모든 건강 장수도 그 안에 있습니다(잠3:16).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교회나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환란과 궁핍함을 당했던 서머나 교회를 보고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셨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한 라오디게아교회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고 책망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겉만 번지르하고 내용은 가난하고 가련한 영혼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부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베풀고 나눠주는가에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을 비우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유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타울러가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날을 주셨군요, 친구여.” 그가 말하자 거지는 대답했습니다. “나쁜 날이 하나도 없다는 걸 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타울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행복한 삶을 주셨군요”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결코 불행하지가 않아요.” 타울러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 나는 날씨가 좋아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비가 와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나도 기뻐하는데, 왜 불행하지 않은 때에 불행해야 합니까?” 타울러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왕이요.” “그럼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거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내 마음에 있소” 그는 가난한 거지였지만 왕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소유는 가난했지만 마음은 천국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셋째, 나누는 삶을 살야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지겨워합니다. 그러나 진정 부자가 되려면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야하고 하나님 앞에 늘 거룩한 거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심령으로 늘 바라고 갈망하며 얻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눠주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움켜쥐고 주지를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궁핍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흩어 구제를 합니다. 그런데 잠언을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된다고 합니다(잠11:24). 물은 고이면 썩고, 흐를 때 신선해지고 더욱 채워집니다. 이처럼 가난에 동참하여 베풀고 주면 영혼이 맑아집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눠줌으로써 가난한 자와 자신을 일치시킬 때 그리스도의 부요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가난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진 가난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소유하게 되고 천국이 자기 삶의 터전이 됩니다. 성프란시스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가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가난을 사랑하여 가난과 결혼하였습니다. 가난을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가난해짐으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려고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가난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함으로서 가난한 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가난한 자를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가난하지만 베풀고 나눠주고 섬기는 것이 복된 것은, 그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가난한 자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진정 부요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주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면 나눠줄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존재는 이미 주로 인해 이미 부요한 자입니다. 아무것 없어도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모든 것을 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줄수록 더 부요한 자가 됩니다. 이런 인생 멋지고 행복한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이 가난하면 그렇게 됩니다. 모임을 할 때 마다 느끼지만 풍족한 말씀의 교제 그리고 풍족한 음식들이 따릅니다. 지난 수요일 독서 모임에 참외를 준비하고 고구마를 굽고 다과를 준비했는데 최광휴 선교사님이 상추와 딸기를 가져오셨습니다. 빨깐 달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조금있으니 천영란 권사님이 싱싱한 오디를 보내주셨습니다. 먹음직한 자색 오디로 다과상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영진 서교사님이 전주에서 참여하시면서 명품 모싯니 떡을 사오셨습니다. 초록색 떡으로 상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재중 집사님이 사진을 보고 이넌 댓글을 달았습니다.“그냥 보아도 복이 가득차 있어보입니다. 오늘도 배움에 갈급해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밑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심령은 가난한데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넘칩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가난이 아아니라 영적인 심령의 가난입니다. 주님이 없이 못사는, 말씀 없이 못 사는, 배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가난...그런데 모든 것이 넘칩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나는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하나님을 늘 갈망하는가? 누군가를 늘 섬기고 나눠 주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다는가? 스스로 모습을 보면 내가 진정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처럼 가난하지만 인생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고, 없는 것 같아도 많이 나눠주는 부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제 가난을 불행으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부자를 그렇게 동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 알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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