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는 정조의 할머니다. 법적으로는 그러하다. 영조(1694~1776년)에게는 2명의 왕후와 4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정조는 후궁 영빈 이씨의 손자이고, 정순왕후는 영조의 두 번째 왕후였다.
할머니가 손자와 대결한다는 것은, 유교적 가족질서를 국가질서의 이념적 기초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는 생애의 대부분을 정조와의 대결에 바친 인물이다. 그는 영조의 부인으로서보다는 정조의 라이벌로 살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순왕후는 법적으로는 정조의 할머니가 되지만, 나이로 보면 누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65세의 영조와 결혼한 정순왕후는 14세였고 정조는 7세였다. 나이로 치면 일곱 살 연상의 누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조와 같은 세대였던 정순왕후는 그야말로 일생을 다 바쳐 정조를 공격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정조가 추구한 개혁정치는 결국 정순왕후를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에 의해 송두리째 뽑혀버리고 말았다. 정조 측에 대한 정순왕후의 정치적 공격 가운데에서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오빠 김귀주를 동원해 정조의 아버지를 궁지에 내몰다.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안 되는 1761년에 사도세자가 아버지 몰래 평안도를 다녀온 사건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평안도 여행은 반대파에 의해 역모를 위한 사전답사로까지 확대·재생산되어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 여행으로 이어지고 만다. 정조가 세손이 된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처음에 나경언이란 인물이 이 일을 고변했을 당시에, 영조는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서 세자의 평안도 여행을 극비에 부치도록 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영조에게 올린 밀봉 편지에서 이 일을 문제 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편지에서 김귀주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을 포함해서 탕평파 전체를 공격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국왕의 측근세력인 탕평파 전체를 공격하는 내용의 편지였기에 그 파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20살 전후밖에 안 된 김귀주가 오로지 누이동생만 믿고 벌인 일이라서 국왕 영조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비에 부치라고 명한 평안도 여행사건을 김귀주가 어떻게 알고 이렇게 공격적인 서한을 영조에게 올릴 수 있었을까? 정순왕후가 김귀주에게 그런 정보를 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정순왕후는 김귀주를 앞세워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에 가담했다.
▲ 홍국영의 씨앗을 제거하려고 왕위계승문제에 개입하다.
정순왕후는 홍국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주력했다. 왜냐하면, 홍국영은 김귀주 세력을 압박하고 정조를 국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조와 홍국영을 분리시킴과 동시에 홍국영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정순왕후는 홍국영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홍국영과 손을 잡은 은언군(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과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의 처단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그는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의 양자(상계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80년 2월에는 중전 효의왕후가 병 때문에 후사를 얻을 수 없으니 하루빨리 비빈을 간택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려 정조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자, 일각에서는 후궁인 원빈(홍국영의 누이)의 양자인 상계군(사도세자의 손자)을 후사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경우 홍국영 집안이 득세할 것이란 우려 때문에, 그는 다른 여자를 정조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위와 같은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순왕후가 당사자인 정조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 같은 교서를 대신들에게 내렸다는 점이다. 국왕의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국왕의 결혼문제에 관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는 정조와 홍국영을 분리시키려는 의도에서 또 홍국영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국왕의 권위에 흠집을 내곤 하였던 것이다. 홍국영을 옆에 두면 둘수록 국왕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정조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 은언군에 대한 공격으로 국왕을 괴롭히다
정순왕후는 정조 외에도 은언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정조와 은언군의 공통점은 둘 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은언군의 경우에는 그가 정순왕후의 숙적인 홍국영과 손을 잡았다는 점 때문에, 더욱 더 정순왕후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국왕과 달리 은언군은 그저 힘없는 왕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순왕후에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은언군의 신변을 놓고 국왕과 정순왕후 사이에 길고 긴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정순왕후 측은 역적 혐의를 씌워 은언군을 사형으로 몰려고 했고, 국왕은 격렬한 저지를 벌여 결국 강화도에 귀양 보내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789년(정조13)에 정조가 왕명을 내려 은언군을 한성으로 데려오도록 했지만, 정순왕후 측의 훼방으로 이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로 돌아갔다. 1794년(정조18)에는 정조가 은언군을 데려오도록 가마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 정순왕후는 이 일을 저지하라는 전교를 대신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국왕인 자신보다도 정순왕후를 더 두려워하는 일부 대신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의 고뇌가 어떠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은언군을 사이에 둔 이산과 정순왕후의 신경전은 이후에도 첨예하게 계속되었다. 혈육에 대한 의리가 남달랐던 정조는 은언군을 한강 근처로 불러내서 만난다든가, 경기감영으로 순찰을 가는 도중에 살짝 만난다든가, 아예 강화부로 찾아가서 만난다든가 하는 등등의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때마다 정순왕후는 대궐 밖에 나가서 살겠다든가 아니면 밥을 안 먹겠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개혁정치를 완수하기 위해 친위부대 장용영까지 만들 정도로 비장했던 정조. 그는 개혁의 최대 장애물인 정순왕후를 상대로는 이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법적으로는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예법질서를 전제로 개혁을 추구해야만 했던 정조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 이산의 개혁정치를 송두리째 뿌리 뽑다.
정순왕후는 정조보다 7년 먼저 태어났지만, 그보다 5년 늦게 죽었다. 그래서 정조의 사후에 그의 개혁정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48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은 정조의 상여를 보면서 정순왕후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의 권력을 쥐고 정조가 이룩해 놓은 개혁정치의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의 개혁 파괴는 ‘정조의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집중되었다.
정조 재위 당시만 해도 천주교는 그저 사학(邪學)으로만 규정되었을 뿐 그 활동은 용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명분으로 이가환·권철신·홍낙민 등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을 유배시키는 등 남인세력을 일소하고자 했다. 천주교 소탕을 명분으로 정조의 인적 기반에 대한 숙청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은언군 집안은 물론이고 북학파 박제가를 포함해서, 정조의 보호 혹은 사랑을 받던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또 정조의 친위군대인 장용영도 없애버렸다. 정조의 개혁정치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인적 기반을 철저히 말살한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정순왕후의 행적 가운데에서 다른 일들은 단순한 정치투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정조의 사후에 그의 개혁정치를 송두리째 말살한 것은 단지 정치투쟁의 차원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영조와 정조의 개혁은 임진왜란 이후로 꺼져 가던 조선을 살리기 위한 일종의 르네상스 개혁이었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청나라에서 꽃핀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르네상스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수구보수의 입장에 서서 정조의 개혁을 송두리째 말살하는 정치적 행적을 남겼다. 조선왕조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불씨 중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19세기에 조선왕조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