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에 있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는 르네상스이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다.
특히 미술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다. 당시 이탈리아 출신 화가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거장들이 여럿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독일 출신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다.
당시 독일은 철학과 인문학 분야와는 달리 미술에서만큼은 변방 취급을 받았다.
〈자화상, 손과 베개의 연구〉,
소묘, 1493, 28×20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뒤러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화상 때문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린 화가로 뒤러를 꼽는 데 미술사가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전인 중세에는 화가라는 신분이 석공이나 구두 만드는 사람들과
비슷한 수공업자 취급을 받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화가'가 아니라 '화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뒤러는 스스로 이름 없는 화공이길 거부했다. 화가로서 남달랐던
뒤러의 자존감은 그가 남긴 자화상에 짙게 배어있다.
Adam and Eve (1507)
Galería online del Museo del Prado de Madrid: Adán y Eva
Adam and Eve
standing on either side of the tree of knowledge with the serpent
Self-Portrait at 28, 1500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500, 67×49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자화상의 아버지
인물을 그리는 초상화(portrait)는 'portray'의 어원인 라틴어 'protrahere'에서 유래한다.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인 자화상(self-portrait)을 태동시켰다.
자화상은 화가가 자기 자신을 모델로 그리는 초상화인 셈이다.
흔히 모델료가 없는 가난한 화가들이 궁여지책으로 자신을 모델삼아 그리기 시작한 데서 자화상의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뒤러의 자화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자화상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는 그림이다.
자화상은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의 나르시즘(narcissism, 자기애–역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Self-portrait, 1498,
〈장갑을 낀 자화상〉,
Museo del Prado, oil on wood panel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했다.
그는 평생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은 스물아홉 살에 그린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에는 화가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절정을 이룬다.
뒤러가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그린 시기는 스물아홉 살 생일이 돌아오기 바로 전이다.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은 그 크기가 실제와 같다.
화려한 모피 코트를 차려 입은 화가는 정면을 응시한 채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심장을 가리키고 있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에 정면을 응시한 자세는 오로지 그리스도나 왕에게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만이 입을 법한 모피 코트를 화가가 걸치고 있는 모습도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이었다.
비록 서른이 채 안된 젊은 화가였지만,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나는 (기술 좋은 화공이 아닌) 예술가다!'라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외쳤던 것이다.
실제로 뒤러는 그림 안에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내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써 놓았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뒤러가 예술가의 창의력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능력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당시 뒤러의 패기와 열정을 감안하건대 아주 근거 없는 얘기만도 아닌 듯싶다.
〈1492년 자화상〉,
소묘, 1492, 20.4×20.8cm, 소장처 불명
뒤러는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엄격함과 치밀함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북유럽 화풍에
인체를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 르네상스 화풍을 접목시켰다.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가리켜 뒤러가 자신의 화풍에 변화를 시도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껏 섬세해진 뒤러의 화법은 라파엘로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굵고 풍성한 머릿결을 표현한 기법을 보고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뒤러의 그림 속 머리카락은 아마도 특수한 붓으로 그렸을 것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뒤러는 배경을 비롯한 모든 사소한 주변 환경을 생략하고 오로지 인물의 신체만을 돋보이게 강조함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림 속 뒤러는 삼각형 구도 속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얼굴, 머리카락, 의상은 물론 빛에 반사된 일정한 공간까지 정밀하게 묘사함으로써 풍부한 질감을 전달한다.
〈나체의 자화상〉,
소묘, 약 1505~1507, 29.2×154cm, 독일 바이마르 시립 박물관
뒤러는 소묘와 유화 등 다양한 형식을 이용하여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는 렘브란트 이전의 서양 미술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뒤러는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그리기에 앞서 이십 대 초반에도
자화상 몇 점을 그렸다. 이 가운데 〈스물두 살의 자화상〉은 뒤러가 정식으로
그린 첫 번째 자화상이다.
여행 중에 그린 이 작품은 휴대의 편의를 고려해 송아지 가죽에 그렸다.
당시 그는 도제로서의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작품을 그렸던 장소는 아마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도시–역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화가는 매우 세련되고 사랑스런 청년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름을 많이 잡아 몸에 꼭 끼는 흰색 상의와 좁은 소매의 검은 외투는 당시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패션을 짐작케 한다.
긴 곱슬머리는 양쪽 어깨에 흘러내리고 이제 막 나기 시작한 옅은 갈색의 수염은
풋풋한 남성미를 자아낸다.
그림 밖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뒤러 특유의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뒤러가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받기 전에 그린 것이어서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북유럽 화풍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뒤러만의 뛰어난 조형 능력과 색채미가 돋보인다.
〈스물두 살의 자화상〉에서는 뒤러가 손에 들고 있는 푸른 나뭇가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는 엉겅퀴에 속하는 식물로 독일에서는 '남자의 충절'을 의미한다.
미술사가 들은 이 그림을 두고 뒤러가 약혼녀인 아그네스(Agnes Frei)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Arc de triomf per a Maximilià I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스물두 살의 자화상〉 등 뒤러의 자화상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장갑을 낀 자화상〉이다.
〈장갑을 낀 자화상〉까지 이렇게 세 점의 작품을 가리켜
뒤러의 3대 자화상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장갑을 낀 자화상〉은 뒤러가 스물일곱 살 때 그린 것이다.
이때 그는 남유럽을 두루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의 화풍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알프스 풍경은 뒤러가 수년 전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해서 알프스 산을 넘었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작품의 배경에 풍경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창을 그려 넣는 회화 기법은
15세기 네덜란드 지역(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 지방까지
포함한다. –역주)에서 시작되어 유럽 각지로 유행했는데,
세속적인 초상화 외에 종교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림 속 뒤러를 보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신감 외에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그는 베네치아 풍의 복장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흑백의 줄무늬 모자를 썼다.
머리 스타일과 수염의 세부 묘사는 화가가 여전히 북유럽 화풍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 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01
〈네 명의 사도〉,
캔버스에 유채, 1526, 215×7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네 명의 사도〉,
캔버스에 유채, 1526, 215×7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풀밭〉,
수채, 1503, 40×32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산토끼〉,
수채, 1502, 25×23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푸른 비둘기의 날개〉,
수채, 1512, 20×20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뒤러는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회화 이론에 관한 저술로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1512년 그는 젊은 화가들을 위해 미술 교과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의 평생지기였던 인문학자 빌발트 피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1470~1530)는 뒤러가 예술과 건축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에 출판된 『측량론』은 독일 최초의 미술 이론서이다.
『축성법-도시, 성곽, 부락의 방어공사』는 1527년에 출판되었고,
마지막으로 『인체비례론』은 뒤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528년에 출판되었다.
『축성법-도시, 성곽, 부락의 방어공사』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7년 출판
현재 뒤러의 작품은 판화, 유화, 수채화와 소묘 등 일천여 점이 전해온다.
그 중 판화가 가장 많으며 독립된 작품(목판과 동판 포함)으로 4백여 점이 있다.
뒤러는 당시는 물론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판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목판화는 1420년경 유럽에 처음 전해졌는데, 뒤러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책의 삽화 혹은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되어 크게 성행했다.
대량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화가의 이름을
매우 효과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측량론』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5년 출판
『인체비례론』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8년 출판
〈기사, 죽음, 악마〉, 동판화, 1513, 24×19cm, 소장처 불명
뒤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뉘른베르크의 고택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D%C3%BCr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