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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21~32 / 네 이름이 무엇이냐?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
(창 32: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창 32: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창 32: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어긋났더라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 32: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할렐루야!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시지요?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저는 복음을 깨달은 후에 복음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이 나의 것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곱이 복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야곱이 복음을 깨닫는 과정은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한 것 같이 아주 극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복음을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창 32:21~23) 야곱은 먼저 예물과 아내와 자녀를 다 얍복강을 건너보냈습니다.
야곱은 홀로 얍복 강에서 밤을 보냅니다. 야곱의 내면은 밤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오는 에서와 400명의 군사로 인하여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33장에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과정을 보면 지금 가족들이 어떤 순서로 에서를 향해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33장 2절에 보면 맨 앞에는 여종과 자식을 두었습니다. 다음에는 레아와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라헬과 요셉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서대로 앞이 아니라 뒤에 있게 합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족을 죽이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늦게 죽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맨 뒤에 있었던 것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죽는 것을 보면 자신은 혼자만이라도 살겠다고 도망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진짜 사나이라면 가장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해야 옳습니다. “형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의 아내와 자녀는 죄가 없으니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반대였습니다.
“형님, 가족은 다 죽이십시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족들은 다 죽고 자신 혼자만 살려고 하다니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입니다.
24a를 보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는 죽음 앞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장자의 명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돈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났을지라도 하나씩 나왔지 둘이 함께 나온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을 때도 혼자 죽는 것이지 둘이 함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기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대일로 서서 자기의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4b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넘어뜨리고자 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넘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을 넘어뜨리고자 했을까요? 야곱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족에 대해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뒤로 물러나는 자가 아니요.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씨름을 걸자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은, 우리도 씨름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형 에서와 씨름하여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외삼촌 라반과 씨름하여 아내 라헬을 얻었고 양과 씨름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씨름하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나 십자가를 지실 때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심각한 고민이 있을 때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할 때 첩, 브닌나로부터 많은 괴롬을 당했습니다.
이때 한나는 사람들과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의 종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과 씨름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집에서 남편이나 아내와 씨름하기보다는 말 안 듣는 자식과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25a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여기 그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여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져주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들에게 간절히 울고 떼를 쓰면 져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위대한 점입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도하며 응답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응답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일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리지 말고 감이 떨어지지 않으면 감나무를 흔들고 그래도 안 되면 감나무에 올라가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25b를 보십시오.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위골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한 기도의 응답으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 되게 하셨습니다.
환도뼈는 대퇴골이라 하고 골반뼈라고도 합니다. 골반뼈가 부러지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치신 것은 야곱이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막 구해달라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완전히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면 그 사람이 건지려는 사람을 붙들고 함께 물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힘이 다 빠졌을 때 구하면 순순히 따라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해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폐병과 심장병으로 생명의 환도뼈를 맞았습니다. 최자실 목사님은 사업이 부도가 나서 물질의 환도뼈가 부러지고 빅토리 위고는 외동딸이 죽는 환도뼈를 맞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로 환도뼈를 맞고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밀려나는 환도뼈를 맞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맞고 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이 죽는 환도뼈를 맞고 선교사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환도뼈가 부러진 후에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환도뼈가 부러지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매달렸습니다. 환도뼈를 맞고는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축복하지 아니하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12:3,4절에 보면 울면서 매달렸다고 말합니다. 환도뼈를 맞은 후에 야곱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만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도망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전에는 교만하게 기도하였지만, 이제는 겸손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떠나려고 하고 야곱은 매달렸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음뿐이 없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훌륭한 점은 환도뼈를 맞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도뼈를 맞고 마음에 쓴 뿌리가 더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환도뼈를 치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는가, 하고 하나님께 불신과 원망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지만, 절대적인 자세로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야곱이 울면서 축복해 달라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지금 물질도 얻었고 사랑도 얻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얻기를 바라는 축복을 다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갖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쓸데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복을 주셨습니까?
27~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이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다리를 잡은 자, 빼앗는 자, 속이는 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기적인 자입니다. 자신이 강해서 어지간히 힘들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인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죄악으로 형 에서와 갈등하였고 외삼촌 라반과도 갈등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야곱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에서 하나님의 황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진정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복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창 32:29) 야곱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며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창 32:30)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답답함이 사라지고 영생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생겨났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로 사단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야곱의 내면이 바뀌니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그는 에서가 와도 지금이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그는 에서가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야곱이 외적으로 바뀐 것은 환도뼈가 부러지고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평생을 절뚝거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평생 지고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위기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환경을 바꾸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복음을 알고 하나님 한 분을 소유하고 마음에 참 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시고 지켜주시고 복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허물을 감당하시고 나를 칭찬하여 주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서와 같이 400명의 군사가 와도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같이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알고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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