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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그레이엄 회장(맨 왼쪽)이 번스타인ㆍ우드워드 기자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2년 6월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신참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란 사람이 결정적인 제보를 해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지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닉슨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제출한 녹음 테이프도 일부가 빠진데다가 결정적인 대목까지 지워져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이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1974년 8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딥 스로트’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다.
[1999년] 모리스 그린,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
← 모리스 그린이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며 결승점 테이프를 끊고 있다.
미국 육상선수 모리스 그린이 1999년 6월 17일 벌어진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도노번 베일리(캐나다)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서 세운 종전기록(9초84)을 0.05초 앞당긴 것이자 1991년 칼 루이스(미국)가 9초90 벽을 허문지 8년만에 이룬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모리스 그린은 1997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아테네세계선수권 100m에서 9초86의 기록으로 도노번 베일리를 누르고 우승, 세계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8세때 육상을 시작한 그린은 20대 초반까지는 무명이었다. 고향의 캔자스시티 대학생이던 1995년 4월 텍사스 릴레이 대회서 9초88로 칼 루이스를 누르고, 이어 전미선수권에서는 2위를 차지해 관심을 끌었지만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탈락했다. 그린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에서 또 탈락하자 "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 ‘단거리 사관학교’인 UCLA의 존 스미스 감독 휘하로 들어갔다. 아토 볼든, 존 드러먼드 등 세계 정상급 선수와 연습한 그린은 1997년 전미선수권에 이어 세계선수권마저 제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탄생했다./조선
[1950년] 소설가 채만식 사망
← 1930년대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
1902년 6월 17일 태어남 / 1950년 6월 17일 죽음
1930년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이 1950년 6월 17일 6ㆍ25직전 고향 근처에서 병고로 사망했다. 이날은 그가 세상에 나온 지 꼭 48년째 되던 날이었다.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귀국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1935년부터는 개성에서 형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매진했다.
그는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했으며, 식민지 하의 왜곡된 사회와 경제질서를 풍자하는 소설들을 주로 썼다. “시대의 허위에 대해 민감했고 또 진지했던” 그는 초기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끝내 카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탁류’와 ‘태평천하’ 등이 있으며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단편집도 계속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창작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또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일제시대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기도 했다.
[1902년] 소설가 채만식 출생
"인테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테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프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테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 -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채만식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작품들로 높이 평가되는 소설가이다. 전라북도 옥구 출생으로,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했다. 1923년 귀국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1935년부터는 개성에서 형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매진했다. 1924년 단편 <세 길로>로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등단 초기에는 프로 문학에 대한 동반자작가로서의 작품들을 썼으나, 1934년부터는 자전적 소설인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보듯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들을 발표함으로써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보여주었다. <치숙>(1937)·<태평천하>(1937)·<탁류>(1937~38) 등은 1930년대의 타락한 한국 사회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브리태니커
[1928년] 에어하트(Earhart, Amelia), 여성 최초 대서양 횡단비행
← Earhart, Amelia
1928년 6월 17일 미국의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직접 혼자서 조종하여 횡단한 것은 1932년 5월 20일이다).
이어서 미국 횡단비행과 상업비행 발전을 위한 운동에도 참여했다.
1935년에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위험한 항로를 단독으로 비행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2년 후에는 조종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로키드 엘렉트라'로 세계일주 비행을 시작했는데, 국제 날짜변경선 근처 태평양 중심부에서 실종되었다.
남편인 출판업자 조지 P. 퍼트넘이 그녀의 전기 <솟구치는 날개 Soaring Wings>(1939)를 펴냈다./브리태니커
[1906년] 일간신문 <만세보> 창간
← <만세보> 창간호
1906년 6월 17일 일간신문 <만세보>가 창간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천도교에서 펴낸 신문으로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발의로 이인직이 신문발행 허가를 받았다. 사장은 오세창, 총무 겸 주필은 이인직, 편집 겸 발행인은 신광희·권동진·장효근 등이었다. 블랭킷 배판 4면 체재에 7단제를 실시했고,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 토를 달았다.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인직의 <혈의 누>·<귀의 성>을 연재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남겼다. 고종도 만세보를 애독해 1,000원을 하사할 만큼 인기를 끌었으나 경영난으로 이듬해 1907년 6월 29일 293호로 막을 내리고 만세보를 인수한 이인직이 이완용 내각의 친일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개제하여 7월 18일부터 간행되었다.
[1818년] 프랑스 작곡가 구노(Gounod, Charles-Francois) 출생
← 구노
1818. 6. 17 프랑스 파리~1893. 10. 18 파리 근처 생클루.
오페라 〈파우스트 Faust〉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곡가.
아버지 프랑수아 구노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화가였고, 어머니는 폭넓은 교양을 갖춘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어린 구노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구노는 1835년까지 생루이 국립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철학으로 학위를 딴 뒤,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라이하가 죽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프로망탈 알레비와 장 프랑수아 레쉬외 밑에서 공부했으며, 3년 뒤 칸타타 〈페르낭 Fernand〉으로 로마 대상을 받고 3년 동안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 머물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이탈리아로 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곡가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팔레스트리나의 방식을 모방한 미사곡은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중요하다. 로마를 떠나 빈으로 가서, 이탈리아에서 작곡한 미사곡과 진혼곡을 각각 1842, 1843년에 발표했다. 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갔다. 또한 라이프치히에 들러 펠릭스 멘델스존과 4일을 함께 지내면서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교향곡 Scottish Symphony〉 공연과 토마스 교회에서 열린 멘델스존의 바흐 오르간 작품 연주회에 참석했다.
파리로 돌아와서 미시옹 에트랑제르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고, 2년 동안 주로 신학을 공부했다. 1846년 생쉴피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성직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1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진혼곡과 〈테 데움 Te Deum〉을 완성하지 않은 채,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오페라인 〈사포 Sapho〉(1851)ㆍ〈피투성이가 된 수녀 La Nonne sanglante〉(1854)는 베를리오즈가 호의적인 평론을 써 주었는데도 별로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성 카이실리아의 미사 Messe de Sainte-Cécile〉(1855)에서 종교음악과 세속적인 작곡방식을 혼합해 보려고 했다. 그후 몰리에르의 희극을 토대로 한 〈돌팔이 의사 Le Médecin malgrélui〉(1858)를 발표하여 희가극 쪽으로 잠시 방향을 바꾸었다. 1852년부터 〈파우스트〉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1859년 3월 19일에 초연된 이 작품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의 그늘에 가려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의 시를 토대로 한 〈미레유 Mireille〉(1864)를 비롯해서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1867) 등 그후 작곡한 오페라와 후기의 오라토리오들은 오늘날까지도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1852년 파리 오르페옹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2개의 미사곡을 비롯한 합창곡을 많이 작곡했다. 1870년부터 5년 동안 런던에서 구노 성가대(나중에 로열 합창단으로 이름이 바뀌었음)를 조직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오라토리오 작곡에 바쳤다. 소프라노 독창과 합창, 관현악을 위한 비가(悲歌) 〈갈리아 Gallia〉는 1870년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패배한 것에서 영감을 얻어 쓴 곡이며, 1871년 5월 1일 런던 만국박람회 개막일에 런던의 앨버트 홀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오라토리오〈구원 La Rédemption〉·〈삶과 죽음 Mors et Vita〉은 1882년과 1885년 버밍엄 축제에서 연주되었으며, 1888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의 선율은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독창성이 뛰어나다. 그는 성악곡과 관현악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그 음악이 갖는 특성을 너무 가볍게 파악했다는 느낌을 주고, 종교음악에 나타나 있는 신앙도 너무 피상적일 때가 많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 제1권 중 〈전주곡 C장조 Prelude in C Major〉에 덧붙인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작곡가로서 독창성, 여유, 표현상의 순박함을 보여주는데 그의 음악이 1920년대 신고전주의 음악가들에게 명성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순박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노가(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이 아닌) '순수한' 작곡가라는 이유로 그를 존경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시학 Poétique musicale〉이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만이 아니라 〈돌팔이 의사〉·〈비둘기 La Colombe〉·〈필레몽과 보시스 Philémon et Bausica〉까지 찬미하고 있다.(F. Goldbeck 글)
[1703년]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Wesley, John) 출생
1703. 6. 17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1791. 3. 2 런던.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운동을 창시한 인물이다. 비국교도였다가 엡워스에서 교구 목사가 된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런던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원에서 6년간 공부한 뒤, 1720년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24년 졸업한 뒤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1725년 옥스퍼드 주교에게 부제임명을 받았고, 다음해에 링컨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1728년 9월 22일에는 사제임명을 받았다.
1729년 10월 연구원으로서 상주(常駐) 요건을 채우기 위해 옥스퍼드로 돌아가 동생 찰스와 로버트 커크햄, 윌리엄 모건과 함께 조직한 종교연구 모임에 가담했는데, 이 모임은 질서정연한 연구와 경건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조롱조로 '질서주의자들'(Methodists)이라 불렸다. 웨슬리는 찰스로부터 모임의 지도권을 물려받아 회원수가 늘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질서주의자들'은 자주 성찬식을 가졌고 1주일에 2일을 금식했기 때문에 '신성 클럽'(Holy Club)이라고도 불렸다. 1730년부터 이 모임은 정규활동에 사회사업도 포함시켜서 옥스퍼드 교도소를 방문하고, 죄수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이들의 빚을 갚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했다. 빈민가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손길을 뻗쳐 음식·옷·의약품·책 등을 나누어주고 학교도 운영했다. 1735년 웨슬리 형제가 떠나자 신성 클럽도 해체되었다.
1735년 4월 아버지가 죽은 뒤, 옥스퍼드 시절의 친구 존 버턴과 북아메리카 조지아의 식민지 총독 제임스 오글소프 대령으로부터 복음전도협회의 요원이 되어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관장하고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설득을 받았다. 이 사명을 위해 사제임명을 받은 찰스와 함께 웨슬리는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이민온 모라비아교도들을 소개받았는데, 이들은 그가 추구해오던 영적인 평정을 누리고 있는 듯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는 실패로 끝났고, 자기가 맡게 된 회중들에 대한 사역도 신통하지 못했다. 그는 이들을 대상으로 신실하게 사역하기는 했으나, 성직자로서 고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반감을 샀다. 순진한 마음으로 서배너의 최고행정관의 조카딸 소피아 홉키를 사랑하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리자 그녀에게 성찬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비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도 저질렀다. 1737년 12월 조지아에서 도망쳐나왔는데, 그것은 소피아 홉키 일화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런던에서 그는 모라비아교도 페터 뵐러를 만났는데, 이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성서 교리를 강조한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을 발견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가(街)에서 영국국교회의 후원을 받는 모라비아교도들로 주로 구성된 모임에 참석하여 루터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 서론을 읽고 있는 동안 지적인 확신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바뀌었다. 당시 35세였던 그는 이 순간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설교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 회중들은 그의 열정이 싫어서 곧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웨슬리는 종교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신앙 열정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모라비아교도들과 비슷한 '속회'를 도입했다. 이것은 각 종교단체 안에 구성된 작은 모임들로서, 성(性)이 같은 사람, 혼인한 사람들로서 일신상의 비밀을 함께 나누고 비판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회원 자격을 한정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임을 위해 1738년 12월 ‘속회 회칙’(Rules of the Band Societies)을 작성했다.
1년 동안 기성 교회단체들을 대상으로 일했으나, 그의 방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거세졌다. 1739년 훗날 영국과 북아메리카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위대한 설교자가 된 조지 화이트필드는 웨슬리에게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지역의 민중에게 가라고 설득했다. 웨슬리는 개종자들을 규합하여 지속적인 교제와 영적 성장을 위한 집단으로 만들었는데, 런던의 한 집단으로부터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곧이어 런던과 브리스톨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이와 같은 집단들이 생겨났다. 회원들이 무자격자들이라는 추문을 미리 막기 위해 1743년 감리교 단체들을 대상으로 〈규율 Rules〉을 발행했다. 새로운 단체를 세우기 위해 그는 순회 설교자가 되어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그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헌신적인 평신도들을 통한 사역을 추구했고, 이들도 순회설교자들이 되어 감리교 단체들을 관할하는 일을 도왔다. 웨슬리의 설교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갔으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에는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주교가 그의 설교자들 가운데 일부를 미국에서 일할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자, 웨슬리는 1784년 독자적으로 이들을 성직자들로 임명했으며, 같은 해에 그가 만든 단체들은 영국국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역한다고 선언했다. 말년에 웨슬리는 영국 제도(諸島)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920년] 프랑스 생물학자 자코브(Jacob, Francois) 출생
← 자코브(1965)
1920. 6. 17 프랑스 낭시~.
세균의 조절작용에 대한 여러 가지 발견으로 1965년 앙드레 르보프, 자크 모노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자코브는 파리대학교의 의학부와 과학부에서 의사자격(1947)과 과학박사학위(1954)를 받았다. 자코브·르보프·모노가 수행한 연구는 대부분 1950년에 자코브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연구조교로 있을 때 밝혀낸 것이다. 1960년 연구소의 세포유전학실의 실장이 되었고, 1965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세포유전학 교수, 1977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세균의 유전자가 일렬로 원을 이루며, 이 원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절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58년 모노와 자코브는 세균의 효소합성 조절에 대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의 첫번째 주요성과는 구조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하는 '조절유전자'의 발견이었다. 이후에 '구조유전자'는 유전형질을 전달(유전)할 뿐만 아니라 리보핵산(RNA)을 전사하고, 그중 전령RNA(mRNA)에 의해서 효소 등의 여러 가지 단백질이 해독·합성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코브와 모노는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일부를 복제하여 유전정보를 세포의 다른 부분으로 운반하는 mRNA의 존재를 추정했으며, 정상적인 세포에서 조절유전자와 구조유전자 사이의 균형이 세포가 여러 가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균형이 깨질 경우에는 세포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거나 세포를 파괴하는 새로운 효소를 생산하게 된다./브리태니커
[1994년] 사막화방지협약 채택(사막화방지의 날로 지정)
사막화방지협약 채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날
사막화는 기후변화와 인간활동 등으로 인하여 건조·반건조 지역이나 건조한 저습(低濕)지역의 토양이 침식되거나 산림이 황폐화되는 등 사막 환경이 확대되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이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자 국제사회는 1970년대 초반부터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아프리카들의 발제로 사막화 대책이 국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1994년 6월 17일에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기상이변과 산림황폐 등으로 심각한 한발이나 사막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국가들의 사막화를 방지하여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막화방지협약(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을 채택하였다.
1994년 제49차 국제연합총회에서는 사막화방지협약 채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6월 17일을 사막화방지의 날로 지정하였다. 우리나라도 중국 고비사막 및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 북한의 산림황폐화 등으로 사막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적 협력이 증진되고 우리나라 산림녹화 및 사방기술을 피해국에 지원하고 있다.
[1898년] 영국의 화가, 디자이너 번 존스(Burne-Jones, Edward Coley) 사망
O.J.심슨사건은 이후 미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재판이 진행돼 체포후 474일 만인 1995년 10월 2일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합의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전체 12명중 흑인9명(남자1명, 여자8명)과 백인여성 2명, 멕시코계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무죄평결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평결발표이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평결에 동의하는 반응은 33%,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은 56%로 나타났다./조선
[1994년] 제15회 월드컵 미국서 개막
← 94미국월드컵축구대회 개막식 광경
1994년 6월 17일 꿈의 구연 미국 월드컵축구대회가 아시아대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됐다. 전대회 우승팀인 독일과 볼리비아전을 시작으로 1994년 7월 18일까지 한달 동안 52경기를 소화한 이번 월드컵은 한국이 경기를 갖는 댈라스를 비롯,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등 9개도시에서 펼쳐졌다.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전에 앞서 열린 개막식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24개 참가국들의 공연단이 자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였으며 한국은 로스엔젤레스 교민무용단이 고유의 부채춤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한국은 스페인과 2-2 무승부,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독일에 3-2로 패해 2무1패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결승전은 브라질과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갔으나 0-0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로 3-2 승을 한 브라질이 우승했다./조선
[1992년] 한글 로마자 표기법 단일안 합의
←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됨에 따라 서울 퇴계로 주변의 도로표지판에 써있는 `을지로` 표기도 ‘Euljiro’로 바뀌었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남북한 단일안이 마련됐다. 1992년 6월 16, 17일 이틀간 파리소재 프랑스표준협회(AFNOR) 회관에서 열린 제5차 기계화를 위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남북한 회의에서 양측은 쌍방제안을 절충시킨 단일 표기법안에 합의, 1987년 5월 모스크바 1차 회의이후 5년간에 걸친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
정수웅 공업진흥청 차장과 홍린택 규격위원회 위원장이 각각 남북한 수석대표로 참석한 이번 5차 회의에서 양측은 자음의 경우 북한측 안을 ,모음은 한국측 안을 수용하는 절충안에 합의했으며 1992년 6월 17일 오후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단일안을 공식 제출했다. 남북한 단일 로마자 표기법이 합의됨에 따라 국내 지명, 인명표기 방식이 통일돼 국내외 표기상의 혼란이 해소되게 됐으며 한글 및 어문학 분야에서 남북 간 격차를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남북한간의 단일안에 따르면 한글자음 ‘ㅂ’ 은 영문 알파벳 ‘p’ 로 결정돼 ‘부산’의 경우 ‘pusan’으로 확정됐으며 ‘ㄱ’ 은 ‘k’ 로, ‘이’는 ‘i’ 로 각각 표기되게 됐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에는 종전 표기를 인정하는 예외를 두기로 양측은 합의했다./조선
[1970년] 부산항과 일본혼슈 시모노세키항을 잇는 부관 카페리호 부산 입항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간을 운항하는 부관(釜關) 카페리호가 1970년 6월 17일 새벽 0시 30분 기시 노부스키 일본 전수상 등 귀빈과 승객 4백3명, 선원 44명 및 자동차 8대를 싣고 부산항 제2부두에 입항했다.
25년 만에 새로 등장하는 부관 카페리호는 3천8백톤급의 호화여객선이며 일본 아카다키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시속 21노트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을 7시간에 달렸다. 선장 105m에 선폭은 17.5m, 여객정원은 6백2명으로 귀빈실 2명, 1등 50명, 특2등 1백여명, 2등은 4백50명이다. 이밖에 승용차 60대와 8톤짜리 콘테이너 70개를 적재할 수 있었다.
카페리운항이 두 나라의 우호다리로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는 도로교통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제면허가 통하지 않아 승용차의 통관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임시방편으로 `자동차 임시수입에 따른 통관요령`을 내놓아 부관 카페리에 의해 운송되는 외국인 또는 교포의 승용차는 임시통관시키거나 여권기간동안에 재수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배는 6월 25일 다시 한국측의 관계인사와 보도진 등 500여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에 입항해 일본측의 환영을 받았다./조선
[1950년] 신장이식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50년 6월 17일 미국 시카고의 메어리 병원에서 49세의 신장병 여성이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 피부와 뼈, 각막, 폐 등을 이식한 예는 있었지만 신장을 이식한 수술은 처음이었다. 신장을 제공한 사람은 환자와 똑같은 혈액형의 동년배 여성으로 수술하기 몇분 전 사망했고,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은 1개월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집도는 로욜라 스트레치 의대의 리처드 로라 박사가 담당했다./조선
[1943년] 독립운동가 이원대(李元大) 선생 사망
← 이원대 선생(1911. 12. 29 경북 영천~1943. 6. 17.)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마덕산(馬德山)·공문덕(孔文德). 호는 달문(達文).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화북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한 이원대 선생이 1943년 6월 17일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1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안병철의 권유로 독립투쟁을 결심,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난징 조선의열단 간부학교에 입교한 후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선생은 난징ㆍ상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1943년 3월, 산시성 부곡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조선
그밖에
2005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평양서 면담
2004년 브라질, 1억 8000만년된 가장 오래된 물고기 종(種)발견
1998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의사당건물을 점령
1997년 국무회의, 러시아와의 ‘형사사법공조조약안’ 의결
1996년 ‘패러다임 이론’ 창시한 토마스 쿤 사망
1994년 김일성,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회담.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2호 양주별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고명달씨 별세
1989년 헝가리 개혁파의 기수 나지 전총리 복권
1986년 해경, 충남 서산 앞바다서 표류중인 중국선박(선원19명) 보호중이라고 발표
1983년 교황, 폴란드 방문중 계엄해제 자유노조 부활 요구
1982년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포클랜드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
1980년 계엄사, 부정축재 국기문란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1977년 국무회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 가결
1971년 미국-일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967년 중국, 수소폭탄 실험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을 대행
1953년 동베를린서 반정부데모 격화
1950년 아랍연맹7개국중 5개국 아랍집단안보조약에 조인
1950년 덜레스 미국 국무성 고문 내한
1947년 팬아메리칸 항공, 최초로 세계일주항로 개설
1944년 아이슬란드, 덴마크로부터 독립
1944년 일제 미곡강제공출제 실시
1931년 제6대 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 우가키 가즈시게) 임명
1925년 제네바 무기무역국제회의서, 독가스사용금지 조약 조인
1925년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연맹전 개최됨(~6.30)
1919년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설치
1902년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공사, 러시아공관에 모여 철도, 광산 등의 이권탈취 모의
1901년 청나라, 미국 의정서 조인
1895년 일본, 대만에 총독부 설치
1867년 고종4년, 육전조례 간행
1862년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사망
1789년 제3신분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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