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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14
#.1 씬. 강석의 집 앞.(낮)
강석 차 다가와서 멈추는.
강석 : 여깁니다.
단아 : (안전벨트를 푸는)
강석, 단아, 차에서 내리는.
강석 : (인터폰을 누르는)
문 열리고.
강석 : 들어가시죠. 하단아 교수님. (빙긋이 웃으며 대문을 열어주면. 표정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단아)
#.2 씬. 강석의 집 마당.(낮)
강석, 앞서 걷고 뒤에서 따라 걷는 단아.
강석 : 댁하곤 분위기가 다르죠?
단아 : .....
강석 : (놀리는 느낌으로) 돈 냄새만 무지 풍기는 집이구나, 그런 생각 하죠?
단아 : 아무 생각 안하는데요.
강석 : 그건 정말 무신데. 하긴 그게 그쪽 특기니까.
#.3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아줌마, 문 앞에 서있고, 강석, 단아 들어오는.
천갑, 영자, 소파에 앉아있는.
강석 : 하단아 교수님 모셔왔습니다.
천갑, 영자 일어서는.
단아 : (인사하는)
영자 : 어서 오세요.
천갑 : 이거 귀한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시간 경과.
천갑, 영자, 강석, 단아, 차 마시며 앉아있는.
영자 : (한껏 우아한 자태로 차를 각자의 잔에 따라 앞에 놔주는)
단아 : 고맙습니다.
영자 : 어렵게 구한 황산모봉이니 들어봐요. 중국에 있는 황산 알죠?
거기서 나는 찻싹 하나, 찻잎 하나씩을 넣어서 만든 일창일... 뭐라 그랬는데....
하여튼 특등급이예요. 제일 비싼 거.
단아 : (차를 마시는)
영자 : 어때요?
단아 : 차 맛이 깊네요.
강석 : (단아를 보고 미소를 짓는) 그 댁에선 좋은 차 마시면 늘 똑같은 말을 하기로 약속이 돼있나 보죠?
단아 : (보면)
강석 : 하회장님께서도 제가 대접한 차를 드시고 같은 말씀을 하셔서 말이죠.
천갑 : 그런 거 하나만 봐도 집안 내력은 속일 수 없다는 거 아니겠냐?
야, 야, 우린 일어나자. 여자분들 공부 하시라고 자리 비켜 드리자구.
강석 : 네.
천갑, 강석 일어나는. (천갑이 일어나자 단아도 따라 일어서고)
천갑 : 왜? 일어나시나?
영자 : 화장실 가게요?
단아 : 아니, 어른께서 일어나셔서....
천갑 : 아. 아이고, 편하게 해요, 편하게,
우리 집도 명문 종가긴 하지만 그렇게 격식 같은 거 따지면서 안 살거든.
#.4 씬. 천갑의 방.(낮)
천갑, 들어오면서.
천갑 : 애는 쓸만하네. 우리 집 며느리도 저런 비슷한 한 애가 들어와야 할 텐데.
#.5 씬. 강석의 방.(낮)
강석, 들어오는.
강석 : (웃옷을 벗고 책상 앞에 앉는. 아래층이 조금 신경 쓰이는 느낌으로)
#.6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영자, 단아 앉아있는.
단아 :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영자 : 어, 어떤 분야라니?
단아 : 역사신지, 민속학이신지, 아니면 규방 문화에 대해선지.
영자 : 그게 다 한통속 아닌가요?
단아 : 네?
영자 : 내가 유머 감각이 좀 뛰어난 편이예요.
앞으로 나랑 공부하려면 내 유머에 익숙해지셔야 할 텐데, 하교수님.
단아 : 관심 있으신 분야를 말씀 해주시면 제가 수업 계획을 짜보겠습니다.
영자 : 관심 있는 분야? 난 역사라는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에요.
역사에 역자만 들어가면 뭐든 다 관심 있지 뭐.
단아 : 그럼, 고대사부터 시작하시는 게 어떨까요?
영자 : 고대사라면?
단아 : 선사 구석기 시대부터 공부를 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영자 : 그 시대엔 골동품이 뭐가 있는데요?
단아 : 네?
영자 : 제가요, 제일 관심 있는 분야는 그거거든요. 골동품.
뭐 앞으로 친해질 테니까 내가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난 너무 공부 위주의 지식보다는
현실에,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이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공부라는 게 뭐겠어요?
진짜 살면서 필요하고 써먹을 수 있어야 공부한 보람이 있는 거 아니겠냐구요?
단아 : 그럼, 민속학 쪽이나, 규방 문화 쪽으로?
영자 : 어떤 쪽이든 상관없고, 난 다른 여편네들이 모르는,
아니 다른 평범한 가정주부들이 잘 모르는 거 있잖아요? 왜?
단아 : 무슨 말씀이신지?
영자 : 골동품 속지 않고 고르는 법이라든지.
단아 : 저도 그 쪽으론 아직 공부가 부족한 편이라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영자 : 아니, 역사 공부 하신다면서요? 그것도 박사 받으신다던데?
박사까지 되실 분이 골동품에 대해서 모르신다면 좀 이상하다.
단아 : 그건 분야가 다른 쪽이라서.....
영자 : (일어서며) 여보, 강석아. 여보, 강석아.
천갑, 런닝 차림으로 뛰어나오는.
천갑 : 왜? 왜?
강석, 2층에서 내려오는데.
영자 : (놀라서 천갑 앞으로 다가가며) 여보? 여보? 옷 좀.
단아 : (영자가 일어서고 천갑이 나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갑 : 어. 갑자기 부르니까 그렇잖아. (얼른 방으로 들어가는)
강석 : (다가오는) 왜요? 어머니?
영자 : 하교수님이 골동품에 대해서 잘 모르신단다.
박사까지 받을 거라면서 골동품에 대해서 모른다는 게 말이 되니?
단아 : (당황해서 서있고)
영자 : 무슨 공부부터 하고 싶냐고 해서 내가 난 남들이 모르는 것부터 좀 해야겠다, 그랬지.
골동품 쪽부터 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천갑, 옷 입고 나오고.
천갑 : 무슨 일이야, 대체?
영자 : 아니, 골동품에 대해서 모르신다잖아, 그게 말이 되냐구?
역사 공부해서 골동품 속아 사면 그게 말짱 꽝이지 뭐냐구.
강석 : 어머니? 그런 공부는 최선생님하고 하실 수 있잖아요?
영자 : 그치만....
강석 : 하단아 교수님은 학문으로 역사 공부를 하신 분이세요. 실용적인 공부하곤 거리가 머시다구요.
보세요? 딱 보면 답답한 모범생 그대로잖아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거기에 맞춰서 진지하게 역사 공부 한번 해보세요.
영자 : 그치만 얘. 공부라는 게 배워서 누구 야코 죽이는 맛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머리 깨져라 공부하니?
강석 : 그거야 그렇죠.
단아 : (강석을 보는. 이 집안 식구들이 희한하기만 하다)
강석 : 하지만 공부 하시다 보면 남들이 모르는 것도 아시게 될 거예요.
아, 그거. 월경 서답 장대에 꽂고 하는 굿판 얘기 있죠?
단아 : .....
강석 : 그런 얘기부터 천천히 시작해보세요. 난 아주 재미있던데.
천갑 : 월경 서답이라니? 그걸 어디다 꽂고 뭘 해?
#.7 씬. 천갑의 방.(낮)
천갑, 강석의 팔을 들고 끌고 들어오는.
천갑 : 야? 너 저 아가씨랑 따로 공부 한 적 있냐?
강석 : 네?
천갑 : 월경 서답인가 뭔가 하는 얘기가 뭐냐구?
강석 : 혜주 교수님이세요.
천갑 : 그래?
강석 : 혜주가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 강의실에 한번 들어가 본 적 있어요. 그때 들은 얘기예요.
천갑 : 그런 거냐? 난 또, 저 아가씨랑 너랑 벌써 무슨 썸씽이 있나 해서 덜컥 했다.
내가 말했지만, 그건 절대 안돼, 너.
강석 : 알고 있어요.
천갑 : 근데, 네 엄마가 너무 뽀록낸 거 같지 않냐? 명문 종가 여편네 티 너무 안내는 거 아니냐구?
강석 : (미소 지으며) 눈치 못 챘을 거예요. 저 아가씨 보기보단 둔한 거 같거든요.
천갑 : 그래, 그럼 다행이구.
#.8 씬. 호프집.(낮)
현규, 앉아서 술 마시고 있는.
현규 : (핸드폰을 들어서 눌러보는. 전화기가 꺼져 있어 하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화가 나서 핸드폰 던져버리고 술만 벌컥 벌컥 마시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그 모습 보고 있는 혜주.
#.9 씬. 강석의 집 거실.(밤)
단아, 일어서는.
영자 : (일어서며) 저녁 먹고 가요.
단아 : 아닙니다.
천갑, 방에서 나오고, 강석 2층에서 내려오는.
아줌마, 부엌에서 나오며.
아줌마 : 상 다 차렸는데요, 사모님.
영자 : 같이 저녁 들고 가요.
단아 : 아닙니다. 다음에.....
영자 : 먹고 가지 그러나.
천갑 : 그래요. 같이 먹읍시다.
단아 :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요.
천갑 : 그래요? 그럼 할 수 없고.
영자 : 서운하네. (얼른 준비해뒀던 봉투를 꺼내는) 이거요. 레슨비는 선불이잖아요?
단아 : 아닙니다.
영자 : (쥐어주며) 받아요. 일주일에 이틀이나 집으로 불러서 공부하는데 공짜로 하면 써.
단아 : 저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서.....
영자 : 부담스러운 액수 아니니까 받아요.
천갑 : 그래요, 받아둬요. 우린 돈에 관련해선 철저한 사람들이라 남의 시간 공짜로 뺏고 그런 짓 못하거든.
단아 : (하는 수 없이 받고) 그럼. 고맙습니다.
강석 : 기다려요. 차키 가지고 내려올 테니까.
단아 : 아닙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강석 : 명문 종가의 후예로 저도 예의를 지켜야죠.
천갑 : 박기사더러 모셔다 드리라고 하지 그러냐?
강석 : 명문 종가의 후예들끼리 예의를 갖춰야죠, 아버지.
제가 집에 있는데 기사더러 모셔다 드리라고 하면 쓰겠어요?
천갑 : 그래? 그렇다면 뭐 네가 모셔다 드리든가.
#.10 씬. 길.(밤)
강석이 운전하는 차, 그 옆에 앉은 단아.
단아 : 전철역 앞에 세워주세요.
강석 : 집도 아는데 모셔다 드리죠.
단아 : 불편해요.
강석 : (보고) 나도 편하지만은 않아요. 그쪽하고 차 안에 둘만 있는 거.
단아 : (보고)
강석 : 제사 때 보니까 연로하신 어른은 오빠분이 댁까지 모셔다드리는 거 같던데.
단아 : 저 그렇게 연로하지 않아요.
강석 : (큰 소리로 웃고) 농담도 할 줄 압니까?
단아 : 농담 아닌데요.
강석 : 근데 좀 웃겼어요. 어때요? 느낌이?
단아 : (보면)
강석 : 진짜 원단 졸부 집안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뭐 그런 느낌이었냐구요?
단아 : .....
강석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내가 정곡을 찔렀나보군.
그래도 흥미는 생기지 않아요? 이런 집구석도 재밌다 뭐 그런 거?
단아 : 재밌다는 생각 안했어요.
강석 : 그럼 웃긴다? 역시 돈만 가지곤 안 되는구나?
니들이 아무리 돈으로 떡칠을 하고 덤벼봐라, 우리 같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지?
단아 : 그러고 싶지 않잖아요?
강석 : .....
단아 : 그쪽은 그런 마음 없는 거 아닌가요?
강석 : .....
단아 : 세워주세요. 전철역이예요.
강석 : .....
단아 : 세워주세요.
강석 : (차 멈추는) 조심해요.
단아 : .....
강석 : 나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거. 그럼 진짜 이 여자가 게임을 걸어오는구나, 그렇게 믿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단아 : (차에서 내리는)
강석 :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단아의 뒷모습을 깊은 시선으로 오랫동안 보고 있는)
조심해. 네가 나에 대해 아는 척 하면, 나도 그러고 싶어질 테니까.
#.11 씬. 강석의 집 거실.(밤)
강석, 들어오면, 영자, 전화 중이다.
영자 : 어머, 사모님 그거 모르셨나보네. 그게 진도굿에 아직 남아있다는데.
여자들의 힘, 정말 놀랍지 않으세요? 월경 서답까지 장대에 꽂고 나가서 한판 굿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천갑, 방에서 나오는.
천갑 : 아이고, 다리 저려. 이것도 못할 짓이네.
강석 : 또 방에서 드세요?
천갑 : 사람이 끈기가 있어야지. 왜 벌써 들어와? 집까지 안 데려다 줬어?
강석 : 전철역 앞에 내려줬어요.
천갑 : 그랬냐. 네 엄마 아주 신났다. 아, 밥 먹다 말고 무슨 전화가 그렇게 길어?
영자 : (손 흔들며 조용히 하라는) 그 역사 모임에선 그런 거 공부 안 하시나 봐요?
태종태세 문단세, 뭐 그런 거 공부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특히 우리 같은 여자들 입장에선 생생하게 살아있고, 우리 삶에 진짜 도움이 되고 그런 공부가
진짜 중요한 거 아닌가요? 전 오늘 공부하면서 진짜 감동 너무 많이 받았어요.
이게 바로 여자들의 힘이구나. 우리 여자 선조들이 이렇게 지혜롭고 깡이 셌구나,
눈물까지 핑 돌더라니까요. 네? 어머, 그러세요.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 끊고) 아이고, 속이 확 뚫리네.
영자가 전화 하는 사이 천갑과 강석, 영자 쪽으로 움직여 있고.
영자 : 이 여편네, 자존심 상해서 어쩔 줄 모른다. 남편 들어왔다고 급하게 전화 끊는 거 봐.
천갑 : 아예 공부 한 거 중계방송을 해라. 하루 공부하고 그러면 나중엔 전화통 붙잡고 살겠다.
영자 : 강석아, 강석아. 그 아가씨 선생으론 제대로 골라온 거 같다. 말도 조근조근하니 재밌게 하고.
그래, 이런 게 공부지 뭐. 아줌마, 나 국 좀 다시 덥혀줘요. 떠들었더니 배고프네.
천갑 : 너도 어서 들어가서 밥 먹어.
강석 : 네.
천갑 : (강석 어깨 잡으며) 단물 빼먹는 동안은 잘 해줘라. 네 엄마 얼굴 핀 거 봐라.
강석 : ......
#.12 씬. 호프집.(밤)
술을 마시고 있는 현규. 거의 만취의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 혜주.
#.13 씬. 전철역.(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단아.
#.14 씬. 강석의 밤.(밤)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강석.
#.15 씬. 노래방.(밤)
현규, 맥주병을 들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위로,
농구 하다가 뛰어가던 현규, 매몰찬 느낌의 단아 표정.
장례 때 울고 있는 단아를 바라보던 현규.
장례 때, 법적으로만 그렇다면서요, 하고 외치던 현규의 모습.
#.16 씬. 길.(밤)
걸어가고 있는 단아, 그 위로 현규의 노래 이어지고.
#.17 씬. 종가집 전경.(밤)
#.18 씬. 만기의 방.(밤)
만기, 단아, 앉아있는.
만기 : 할만은 하드냐?
단아 : 네.
만기 : 네가 보기에 어떻드냐? 그 사람들?
단아 : 심성이 나쁜 분들 같진 않았어요.
만기 : 심성이 나쁜 사람이야 있겠느냐. 살면서 환경이 사람을 모질게 만드는 거지. 애썼다, 가서 쉬거라.
단아 : 네. (일어나서 나가는)
#.19 씬. 마루.(밤)
단아, 만기의 방에서 나오면. 동동 걸어오는.
동동 : 말씀 끝나셨어요?
단아 : (미소 짓는) 우리 동동이 하루하루 더 의젓해지네. 오늘은 현지하고 아무 일 없었어?
동동 : 그냥 넘어가는 날도 있어야죠. 그래야 저도 살죠.
그 사이, 마루에서 조만, 울리는 전화 받는.
조만 : 네, 맞는데요.
단아 : 우리 동동이 할아버님 집에 와서 살더니 말하는 게 너무 어른스러워진다.
동동 : 애들이 이상하대요.
단아 : 뭐가?
동동 : 말 하는 게 애 늙은이 같대요. 이런 게 인생인가 봐요. (만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단아 : (미소 짓는)
조만 : 단아야, 남교수님이시라는데.
단아 : (보고)
조만 : 너 핸드폰 안 된다구.
단아 : (다가가 전화 받고) 여보세요?
남교수E : 왜 핸드폰이 계속 꺼져있어?
단아 :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남교수E : 자기, 처가살이와 시집살이 비교 논문 자료 가지고 있지?
단아 : 네.
남교수E : 그거 하나만 복사해다 줘. 내 조교애가 또 날려먹었다.
단아 : 네, 알았어요. 네, 네, 들어가세요. (전화 끊는)
삼월, 부엌에서 나오며.
삼월 : 저녁은?
단아 : 먹었어요.
삼월 : 안 먹었으면 먹어, 차려줄게.
단아 : 아니에요. (방으로 움직이는)
삼월 : 오늘따라 왜 또 저리 지쳐보이누.
#.20 씬. 단아의 방.(밤)
단아, 들어와 가방에서 핸드폰 꺼내 전원 켜놓고, 그러다 봉투가 눈에 들어오고, 봉투를 꺼내는.
무심히 돈을 꺼내보다가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 단아, 놀라서 굳어지는.
#.21 씬. 길.(밤)
태영, 차 운전해서 오면, 음주 단속 중이다.
태영 : 니들 때문에 술 회사 다 망하고 말지.
(하는데, 말순, 취객한테 멱살까지 잡힌채 실랑이 중이다. 그 옆에서 장기 말리고 있고)
너 오늘 된통 걸렸다. 어, 어.
(취객이 심하게 말순을 몰아붙이는 분위기다. 태영,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말순 엎어치기로 취객을 넘어뜨리고 있는. 태영, 눈 커지는)
장하다. 나말순. 저건 자체가 살인무기야. 살인무기. (차창 여는)
취객 : (일어서며) 너 사람 쳤어? 경찰은 사람 쳐도 된다 이거지?
말순 : 선생님께서 먼저.
취객 : 어. 어, 나 허리 삐끗했다, 이거. 나 그렇지 않아도 디스크 있는 몸인데. (주저앉고)
말순 : (황당하고)
장기 : 그러니까 조심 좀 하라니까 정말 왜 그래요? (취객에게)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취객 : 네가 보기엔 내가 괜찮냐?
태영 : (구경하는 심정으로) 저 음주 단속 받고 싶은데.
장기 : 오늘은 그냥 가십쇼.
태영 : 나 꼭 받고 싶은데.
말순 : (노려보면서 음주 단속기 들고 다가오는데)
취객 : 야, 사람 쳐놓고 지 볼일 본다 그거지. 대한민국 경찰 무서운 게 없구나, 없어.
말순 : 가세요. 오늘은.
태영 : (빈정거리며) 오늘도 사고 치셨나 봐요? 나말순 경찰님?
어쩌신대요? 깽 값 좀 무셔야 할 거 같은데. 그럼 수고 하세요. (휘파람까지 불면서 차 움직이는)
말순 : 저걸 그냥.
장기 : 나경장님, 나경장님, 이 일부터 수습 좀 하시구요.
태영 : (차 멀어지면서 휘파람 불며) 허리 꼭 나가셨으면 싶네요. 그럼 쟤 좀 안 보게 될 텐데.
#.22 씬. 석호의 사무실.(밤)
석호, 일하고 있고, 수영 그 옆에.
수영 : 들어가세요.
석호 : 아니다. 먼저 들어가거라.
수영 : 요즘 너무 과로 하시는 거 같으세요.
석호 : 늙어서 그런지 일에 능률이 떨어지는구나.
예전엔 한번 보면 파악 할 수 있었던 일도 요즘은 두세 번 봐야 될 때가 많아.
수영 : 그럼 집에 가지고 가서 보시죠.
석호 : 일은 여기서 하는 게 편해. 어서 들어가.
수영 : 너무 오래 있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차키 놓으면서) 차는 두고 갈게요.
석호 : 아니야, 운전하는 것도 귀찮다. 가지고 가라.
수영 : (하는 수 없이 차키 들고) 그럼 제 방에 가서 일 하고 있을게요. 일 다 끝나시면 부르세요.
석호 : 그럴 거 없어. 너도 피곤할 텐데, 나 기다리느라 사무실에 있을 거 뭐 있냐. 들어가.
수영 : 아버지?
석호 : (보면)
수영 : 태영이가 지레 짐작한 거라곤 생각이 들지만, 혹시....
석호 : .....
수영 : 이영인 실장님께서 편찮으신 건가요?
석호 : 왜?
수영 : 아버지, 요즘 좀 안 좋아 보이시는 거 같아서요?
태영이 말 흘려들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네요.
석호 : 그런 거 아니다. 그리고 나 이영인 실장과는 정리 했다.
수영 : .....
석호 : 말년에 주책 좀 떨었지 뭐. 그 일로 니들 마음 어수선하게 할 일 없을 테니 걱정 하지 말구.
수영 : .....
석호 : 들어가라니까.
수영 : (돌아서서 나가는)
#.23 씬. 회사 복도.(밤)
수영, 걸어오는데, 진아, 쓰레기통 옮기려 낑낑거리고 있다.
수영 : 퇴근 안했어요?
진아 : (보고 인사하는) 오늘은 처음 뵙네요.
수영 : 뭐하는 거예요?
진아 : 쓰레기통 물로 닦아야 해서요. 내일 저희 회사 사장님 순시 하러 나오신대요.
수영 : 그런 걸 왜 혼자서 해요?
진아 : 신참이 하는 거라네요.
수영 : (같이 옮겨주는)
진아 : 됐어요, 하지 마세요. 누가 보면 어쩌려구요. 아직 야근하는 직원들 계신데.
수영 : 어디로 옮기면 되는 거예요?
진아 : 됐다니까요.
수영 : 어디냐구요?
#.24 씬. 여자 화장실.(밤)
수영, 진아, 쓰레기통 들고 들어오는.
영인, 화장실 안에서 나오다 보고.
영인 : (약간 의아한 느낌으로) 뭐해요? 하실장?
수영 : 아직 퇴근 안하셨습니까?
영인 : 일이 좀 남아서요.
진아 : 실장님, 너무 고맙습니다, 저 혼자 해도 되는데. (꾸벅 인사하는)
수영 : (나가는)
영인 : (손 씻으면)
진아 : (물로 쓰레기통 닦으면서) 하수영실장님, 너무 착하신가 봐요. 청소하는 사람들한테까지 너무 친절하세요.
영인 : (대수롭지 않은 느낌으로 손 닦고 나가는)
진아 : (속상하고) 나 혼자 할 수 있다니까.
#.25 씬. 석호의 사무실.(밤)
석호, 일하고 있으면. 영인 들어오는.
석호 : (보고, 다시 서류 보는)
영인 : 이젠 본 척도 안하는 거예요?
석호 : .....
영인 : 이렇게 사람 무안하게 만들 거냐구요?
석호 : .....
영인 : 선배?
석호 : (서류 탁 덮고 일어서는)
영인 : (보면)
석호 : 나가서 얘기하죠.
#.26 씬. 야외 장소. 한강변 정도.(밤)
석호, 영인 서 있는.
영인 : 선배 나한테 실망 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말 했잖아? 선배, 사랑은 한다구.
석호 : 그거, 하지 말아주십쇼.
영인 : (보고) 선배.
석호 : 그동안 저한테 가져주셨던 감정 고맙게 생각합니다.
영인 : 왜 이래? 선배?
석호 : 우리 거기까지만 하기로 하죠.
영인 : 나한테 완전히 질려버린 거야?
아니면, 말 안 듣고 끝내 내 마음대로 해버렸다고 시위하는 거야? 지금?
석호 : 사람마다 자기가 타고난 운명이라는 게 있죠. 잠시 동안 제가 착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헛꿈을 꿨던 거 같습니다.
저, 이제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영인 실장님.
영인 :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냥 우리 예전처럼 그렇게 지내자고 했잖아?
애는 못 낳아주지만, 결혼은 할 수 없지만, 우리 관계 끝내고 싶지는 않다구.
석호 : 저는 끝냈습니다.
영인 : 이거 너무 일방적인 거 아냐?
석호 : 전.....
영인 : (보면)
석호 : 죽는 그 순간까지 다시 사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주셨던 마음은 고맙게 간직하겠습니다.
#.27 씬. 회사 앞.(밤)
일에 지쳐서 걸어 나오는 진아, 어깨 손으로 두들기면서.
수영의 차 앞에 와서 서는.
진아 : (보고)
수영 : (차 창 내리면서) 타요.
진아 : 그냥 가세요.
수영 : 타라니까요.
진아 : (하는 수 없이 뒷문 열고 올라타는) 진짜 이러시지 말라니까요. 하실장님 얼굴 깎이시는 일이예요.
수영 : 늦게까지 일 한 사람 버스 타고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회사 일 하느라 고생하는 사람이잖아요. 월급도 많이 못 받으면서.
진아 : 다른 분들한테도 이러세요? 늦게까지 일하면 다 기다렸다가 태워다 주시냐구요?
수영 : .....
진아 : 아니죠? 그런데 왜 저한테만?
수영 : 밥 먹었어요?
진아 : (보다가 킥 웃는) 진짜 못 말리세요.
수영 : 사람이 단순한가 봐요? 그 말만 하면 웃는 거 보니.
#.28 씬. 길. (밤)
운전하는 수영, 뒤에 앉아있는 진아.
조용한 차안, 진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 들려오고.
진아 : (당황하고)
수영 : 밥 안 먹었어요?
진아 : 회사 식당에서 저녁은 안하잖아요?
수영 : 고기 먹을래요?
진아 : 저 빚더미에 올려 앉혀놓고 섬 같은 데로 팔아 먹으시려구요?
수영 : 내가 그렇게 터프해보여요?
진아 : 과대망상 있으세요?
수영 : (웃는)
#.29 씬. 길가 포장마차.(밤)
수영, 진아, 오뎅과 떡볶이를 먹고 있다.
진아 : 저번엔 라면 제가 쐈으니까 오늘은 쏘시는 거예요.
수영 : 내가 갈비도 사줬잖아요?
진아 : 치사하게 구실 거예요?
수영 : 에이, 터프한 내가 쏠게요. (오뎅을 들고 있다가 아줌마에게) 저기....
아줌마 : 네?
수영 : 작은 접시 없습니까?
아줌마 : (툭하고 작은 접시 하나 내주면)
수영 : (작은 접시에 간장 덜어서 오뎅을 찍어먹는)
진아 : 진짜 무지하게 터프하시다. (간장 종지에 푹 찍어서 오뎅을 먹는)
#.30 씬. 길.(밤)
포장마차에서 계산하고 돌아서는 수영, 따라오는 진아.
길가에 있는 두더지 게임을 발견하고 달려가는.
수영 : (보는)
진아 : 오백 원만 꿔주실래요? 전철 패스 밖에 없어서요.
수영 : 알차게 뽑아먹네요. (기계에서 천 원짜리 지폐 넣고 동전을 뽑아 진아에게 건네는)
진아 : (받아서 얼른 게임기에 넣고 두더지를 잡기 시작하는) 이거 보기보단 재미있어요.
수영 :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니에요?
진아 : (보는)
#.31 씬. 게임장.(밤)
진아, 수영의 손에 총을 들려주는. 진아 총 들고 열심히 쏘기 시작하는.
진아 : 폭력적인 건 이런 걸 폭력적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어, 어, 다 죽는다, 어서요. 두 명이 같이 해야 한단 말예요.
수영 : (하는 수 없이 총 들고 쏘지만, 참으로 어색하다)
진아 : 터프 하시다면서요?
수영 : 대체 이런 거 왜 해요?
진아 : 죽이고 싶은 놈이 있었거든요.
수영 : .....
#.32 씬. 길.(밤)
게임장에서 나오는 수영과 진아.
진아 : 그 자식, 죽여 버릴까 그랬었는데, 5천원으로 해결 봤어요.
수영 : (보면)
진아 : 딱 5천원어치 총질하고 나니까 후련하드라구요.
수영 : 하지 말아요.
진아 : (보면)
수영 : 다음부턴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도 저런 건 하지 말아요. 피 막 번지고 그러는 거, 안 좋잖아요?
진아 : 죽이고 싶은 사람 없었어요?
수영 : 없었어요.
진아 : 한번두요?
수영 : 한번두.
진아 : 아저씨 배신한 사람 있었잖아요?
수영 : 그런 사람.....없었어요.
진아 : 어디서 도 닦고 내려오셨나 봐요.
수영 : 앞으론 죽이고 싶은 사람 같은 건 만들지 말아요.
진아 :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수영 : .....
진아 : 다 걸었는데 배신하면, 죽이고 싶고 그런 거 아닌가.... 나만 못 되서 그런 건가.....
수영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난....다 건 적이 없어서, 못 느낀 건지도.
진아 : 그동안 신세 진 것도 많으니까 노력해볼게요. 죽이고 싶은 사람 만들지 않도록.
어쩌면 진짜 쉬울지도 모르거든요.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죽이고 싶을 일도 없을 테니까.
#.33 씬. 수영의 방.(밤)
수영, 씻고 들어와서 앉는.
진아E : 다 걸었는데 배신하면, 죽이고 싶고 그런 거 아닌가. 나만 못 되서 그런 건가.
수영 :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수영. 너 뭔가를 걸어보긴 했던 거냐?
#.34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울리는 핸드폰.
단아 : (번호 보고, 하는 수 없이 받는 느낌으로) 밤에 너 왜 이러니?
혜주E : 선생님? 저 혜주예요.
단아 : (당황하고) 혜주? 이혜주?
혜주E : 네, 선생님.
단아 : 네가 어떻게 이 전화로.....
혜주E : 선생님. 큰 일 났어요.
#.35 씬. 종가집 앞.(밤)
집에서 뛰어나오는 단아. 뛰어가는.
#.36 씬. 길.(밤)
현규, 남자1,2와 싸움이 붙어있는. 남자1,2 깡패처럼 보이는 불량한 청년들로.
남자1 : 이 새꺄, 술을 처먹으면 곱게 처먹어야지, 어디서 성질이야?
남자2 : 이 새끼가, 사람을 봐가면서 시비를 걸어야지.
혜주, 핸드폰 들고 안절부절 하는 느낌으로.
혜주 :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현규 : 죽여, 새끼들아. 죽여.
남자1 : 이 새끼가 죽으려고 빽을 쓰나.
현규, 죽기 살기로 덤벼들고, 남자1,2 거의 묵사발을 내는 느낌으로 현규를 두들겨 패고.
혜주 :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달려들고)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남자1 : 이건 또 뭐야? (팔로 밀치고. 그 참에 혜주 옆으로 밀려 넘어지면서 입가가 터져 피가 흐르고)
현규, 지지 않고 남자1,2와 엉겨 붙어 싸움을 하는.
#.37 씬. 길.(밤)
현규, 길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앉아있는. 거의 만신창이가 된.
혜주, 벽 옆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차마 옆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고 서있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단아가 보이는. 혜주, 얼른 벽 뒤로 몸을 숨기는.
단아 : (현규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는. 슬픈 눈길로 바라보는)
천천히 다가가는 단아.
단아 : (현규 앞에 무릎을 꺾고 앉아 바라보는) 왜.....이러고 있니?
현규 : (천천히 눈 뜨는)
단아 : 왜?
현규 : (단아의 목 뒤로 팔을 감아 와락 잡아당기는)
단아 : (굳어지는)
그 모습, 멀리서 숨어 보고 있던 혜주,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가는.
단아 : (몸을 빼내려고 하면)
현규 : 조금만....조금만....이러고 있어요.
단아 : 널.....어떻게 해야 하니?
#.38 씬. 병원 응급실.(밤)
현규, 손을 인턴이 꿰미고 있다, 그 옆에 서있는 간호사.
단아, 측은한 시선으로 현규를 바라보고 있는.
현규 :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감고 앉아있다)
단아 : .....
의사 : 입술하고 눈가는 꿰미지 않아도 되겠네요.
단아 : (현규를 보면)
현규 :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39 씬. 병원 앞 벤치.(밤)
단아, 현규 앉아있는.
단아 : 어디까지 봐야 하는 거니?
현규 : (눈을 뜨는)
단아 : 네가 얼마나 더 망가지는 거 봐야 하는 거냐구?
현규 : 많이 본 거 같아요?
단아 : .....
현규 : 아직 시작도 안한 건데.
단아 : 그게 싫어서 넌 안 되는 거야.
현규 : 그 자식은 되구요?
단아 : .....
현규 : 어디 갔었어요? 그 자식이랑?
단아 : 현규야?
현규 : 그 자식은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랑, 죽은 그 사람이랑 안 닮아서?
단아 : 그런 거 아니야. 그 사람이랑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현규 :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그 자식 차 타고 사라지는데,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구요.
단아 : 네가 안 되는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안돼.
현규 : .....
단아 : 그 사람 자리, 누구한테도 내주지 않아. 나.
현규 : 그럼 됐어요. 가 봐요.
단아 : .....
현규 : 난 여기 좀 있다가 갈테니까, 가요.
단아 : 다른 데로 눈을 돌려. 널 너로 봐줄 사람한테로.
현규 : 가라니까요.
단아 : 너 계속 이러면....오늘처럼 또 상처만 받게 돼.
현규 : 그게 어때서요?
단아 : .....
현규 : 달려오잖아요. 그럼 됐어요, 난. 오늘 같은 우연 자주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지나다니는 골목마다 찾아다니면서 깡패 새끼들하고 시비 붙으면 되는 건가.
단아 : 우연 같니?
현규 : (보고)
단아 : 널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봤어?
현규 : 무슨 말이에요?
단아 : 다른 데로 눈을 돌려봐, 그럼 보일 거야. (일어서는데)
현규 : (팔을 잡는) 그런 일 없어요. 아무리 나한테 모질게 해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눈을 돌려요. 그 사람 있는 하늘만 보지 말고. 땅에 발붙이고 당신 뒤에 서있는 날 보라구요.
단아 : .....
현규 : (손을 놔주는)
단아 : 그 사람 있는 하늘을 보지 않으면, 나 못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거...... (걸어가는)
현규 : (벤치에 두 팔을 걸치고 느긋하게 몸을 기대면서, 혼잣말로) 그래서 기다린다잖아요.
#.40 씬. 강석의 집 2층 거실.(밤)
강석, 방에서 나오면서.
강석 : 왜 이렇게 늦게 다녀?
2층으로 올라오던 혜주, 놀라고. 입가가 터져있다.
강석 : (놀라서 다가서며, 혜주의 어깨를 잡는) 너, 얼굴 왜 이래?
혜주 : 넘, 넘어졌어.
강석 : 자식아, 네가 어린 애야? 넘어지긴 뭘 넘어져? 왜 이랬어? 누가 이런 거냐구?
혜주 : 정말이야, 넘어졌어. 늦어서 뛰어오다가....
강석 : (믿기지 않지만) 조심 좀 해, 이 자식아.
혜주 : (방으로 들어가는)
강석 : 약 발라야지. (하면서 따라 들어가는)
#.41 씬. 혜주의 방.(밤)
혜주, 침대 아래 주저앉아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강석, 들어오면서 굳어지고.
강석 : (혜주 앞으로 가서 앉는) 왜 그래? 왜 그러냐구? 왜 다친 거야? 말해? 이 자식아? 말하라구?
혜주 : 아, 아파서....그래. 너무 아파서....그런 거야.
강석 : (안쓰럽게 보는)
혜주 : 왜 난 바보 같이 넘어졌을까, 속상해서 그래, 오빠, 정말이야.
강석 : (혜주의 어깨를 잡고) 앞으론 넘어지지 마. 걸려 넘어질 게 있는 거 같은 길은 가지마.
절대로 그런 길론 가지마. 알았지?
혜주 : (끄덕이는)
강석 : (애잔하기만 하고)
#.42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잠들어 있으면,
동동, 만기의 안경 쓰고, 자기 주먹으로 자기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피하는 연습하고 있다.
만기 : (눈을 뜨는) 안자고 뭐하냐?
동동 : (놀라서)
만기 : 불 좀 켜 보거라.
동동 : 네. (안경 쓴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불을 켜는)
만기 : (눈을 부비며 보면)
동동 : (비틀거리며 와서 앉는)
만기 :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동동 : 네?
만기 : 왜 잠도 안자고 할애비 안경은 쓰고 그러냐구?
동동 : 아, 그래서 어지러웠구나. (얼른 안경을 벗는) 연습 좀 했어요.
만기 : 무슨 연습?
동동 : 안경 쓰고 현지 주먹 피하는 연습이요.
만기 : 너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사는구나.
동동 : 할아버지?
만기 : 왜?
동동 : 안경은 꼭 하나 써야 할 거 같아요.
만기 : 눈도 좋은데 안경은 왜 쓰겠다고 그러누?
동동 : 이 방법 밖에는 없다니까요.
만기 : 안경 쓰고 잘못 맞으면 정말 큰일 난다. 안경 깨지면 멍드는 걸로 끝나진 않아.
동동 : 그런 거예요?
만기 : 그런 거다.
동동 : 그럼, 전 어떡해요?
만기 : 차라리 내일부터 태권도 학원에 다니거라.
동동 : 태권도 학원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게 낫겠죠? 아무리 귀한 여자라도 너무 맞아주는 건 안 되겠죠?
만기 : 학원 선생님한테 우선은 주먹 날아오면 피하는 법부터 좀 가르쳐 달라고 하거라.
동동 : 비겁하잖아요?
만기 : 맞는 것보단 났지. 불 끄거라. 자자. (자리에 누우면)
동동 : 할아버지? 할아버지?
만기 : 아, 왜? 잠 좀 자자니까.
동동 : 때리는 법부터 좀 배우면 안 될까요?
만기 : 안된다.
동동 : 왜요?
만기 : 때리려다가 맞으면 더 비참하잖냐? (옆으로 돌아누워 버리는)
#.43 씬. 마루.(밤)
태영,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하품하면서 나오는데. 만기의 방에서 들려오는.
만기E : 제발 좀 자자.
동동E : 할아버진 손자가 맞고 다니는데 잠이 오세요?
만기E : 진짜 졸립다, 할애비.
태영 : 아니, 몇 신데. 할아버지? (하면서 방문을 열면)
#.44 씬. 만기의 방.(밤)
만기, 동동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으면, 동동 잽싸게 피하고 있고.
태영 : 뭐하세요? 할아버지?
만기 : 넌 눈 없냐?
태영 : 너 할아버지하고 뭐하냐?
동동 : 무술 연습하잖아?
태영 : 그게 무슨 무술 연습이냐?
동동 : 할아버지? 다시요. 세 번 타타닥 해보세요.
만기 : (시키는 대로 하품하면서 세 번 타다닥 주먹 날리는)
동동 : 아싸, 피했죠? 피했죠?
만기 : 그래, 이젠 좀 자자.
동동 : 이번 네 번 타다닥 해보세요.
만기 : 제발 좀 자자.
동동 : 네 번요, 네 번.
만기 : 제발 좀....(그러면서도 네 번 타다닥 날리는)
태영 :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독한 아들놈을 낳아놨나 봐요.
만기 : 알면 됐다.
#.45 씬. 하옹의 방.(아침)
조전 의례 중. 만기, 술잔을 들고 앉아있고, 석호 술을 따르고.
뒤에 서있는 수영, 태영, 동동, 주정, 단아, 그 뒤에 삼월, 조만 서있는.
동동은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석호 : (순간 잠이 들어있는 만기를 보고, 작은 소리로) 아버지?
만기 : (놀라 눈 뜨고 일어나 잔을 올리는)
태영 : 죄송해요, 할아버지.
동동, 졸다가 옆으로 푹 하고 넘어지는.
주정 : 오빠랑 동동이 밤에 어디 막일 하러 다녀요?
#.46 씬. 천갑의 집 거실.(아침)
아줌마, 천갑의 방에서 나오면서. 다가오는 강석.
아줌마 : 어서 들어가세요.
강석 : (방으로 움직이는)
#.47 씬. 천갑의 방.(아침)
천갑, 영자 앉아서 밥 먹고 있는. 각자 상 앞에 놓고. 강석의 상도 차려져 있다.
강석 : 아버지? 전 좀 빼주시라니까요.
천갑 : 야, 야, 앉아, 앉아.
강석 : 전 정말 웃겨서 밥 못 먹는다니까요.
천갑 : 하다보면 할만해 야.
영자 : (일어났다 앉는)
천갑 : (일어났다 앉으면서, 강석 어깨 누르며) 앉으라니까.
강석 : (천갑에게 잡혀 억지로 앉는) 이게요, 아버지. 하회장 댁만 이런 걸 수도 있어요.
다른 종가에선 이런 풍습 없을지도 모른다구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집안이 오히려 이상한 것 일수도 있다니까요.
천갑 : 그러니까 더 베껴먹어야지. 남들처럼 하면 그게 폼이 나냐, 폼이. (일어났다 앉는)
영자 : 당신 너무 많이 일어난다. 난 어제 저녁부터 다섯 번 밖에 안 일어나잖아.
천갑 : 난 당신보다 다리가 길잖아.
영자 : 맞다. 당신이 은근히 롱다리야. 어머, 어쩌니? 강석이 넌.
천갑 : 얜 뭐 한 열 댓 번 일어나야지 뭐.
강석 : 밥 먹다가 열 댓 번 씩 일어나면 밥은 언제 먹어요?
천갑 : 틈틈이 먹어, 틈틈이.
#.48 씬. 길.(아침)
태영, 교통정리하고 있는 말순 옆에 가서 차를 멈추는.
태영 : 좋은 아침입니다.
말순 : ....
장기 : 오늘은 기분 좋으신 일 있으신가봅니다.
태영 : 네. 전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죠. 특이나 오늘은 더 기분이 화창하네요.
장기 : 아이고, 그러십니까? 그러셔서 그런지 며칠 신호 위반도 안하시고.
태영 : (말순에게) 나 말순 경찰님?
말순 : 네?
태영 : 그 아저씨 견적 좀 나오셨죠? 어제 허리 많이 나가신 거 같든데?
말순 : (이 인간이 정말)
태영 : 어쩌나. 제가 웬만하면 벌금이라도 좀 보태드려야 할 텐데.
요즘은 왠지 준법정신이 투철해져서 말이죠.
장기 : 저기, 어제 그분하곤 사과 하는 걸로 합의 봤는데요.
태영 : 세상에, 그랬어요? 그 아저씨 성격 정말 좋으시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오늘도 무사히 보내시길 빕니다. 나말순 경찰님? (휘파람 불면서 가는)
말순 : 내가 언젠가는 저 인간....
장기 : 저 인간 뭐요? 언제 한번 패대기 치시려구요?
말순 :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 중이다. 완전히 골로 보내는 방법을. (이를 아드득 깨무는 느낌으로)
장기 : 진짜 궁금하다. 이 악연의 끝은 과연 어딜까가.
#.49 씬. 교정.(낮)
강석, 차에서 내리면서 전화 중.
강석 : 입안 찢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일찍 학교 가버리면 어떡해?
어디야? 오빠 학교에 와 있으니까 주차장으로 와. 왜긴, 임마, 병원 가봐야지.
#.50 씬. 교정 일각.(낮)
잔디에 앉아있는 현규, 친구1,2. 멀리서 지켜보며 전화하고 있는 혜주.
친구1 : 아무리 미친 사랑이라도 그렇지, 애 꼴이 이게 뭔가.
친구2 : 친구.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들어간 모양인데, 이건 아닐세. 무슨 독립 운동하다 고문 받는 것도 아니고,
여자한테 괄시 좀 받는다고 이렇게 자학을 하면 쓰겠나. (얼굴을 만지려고 하면)
현규 : 아. 귀찮아. (그러다 걸어가는 단아와 남교수를 보고 벌떡 일어나 뛰어가는)
친구1 : 참 속도 없는 친굴세.
친구2 : 설마 하단아 교수에게 맞기야 했겠나.
현규, 단아와 남교수 앞에 가서 서면.
남교수 : (질겁을 하고) 너, 너, 얼굴 왜 이러니?
현규 : 한 며칠 앓아누워볼까도 했는데요. 제가 얼마나 깡이 좋은 놈인가 보여 드려야겠다 싶어서
삭신이 쑤시는데도 끌고 나왔습니다, 하단아 교수님.
단아 : (측은하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하는 현규가 어이없기도 한 표정으로)
남교수 : 얼굴이 왜 이 모양이냐구?
현규 : 믿음직스럽지 않으세요?
단아 : 가세요, 교수님.
남교수 : 왜 그러냐니까? 쟤 얼굴 좀.....(하면서 단아에게 끌려가는)
현규 : (그 뒤를 향해) 질리기도 하죠? 그러니까 그냥 백기 들어주십쇼.
#.51 씬. 교정.(낮)
현규 : (걸어오는데 앞에 서있는 강석)
강석 :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고, 손에 붕대 감고 있는 현규를 보는)
현규 : (지나쳐 가려고 하면)
강석 :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현규 : 무슨 헛소리예요?
강석 :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야?
현규 : 일이 있긴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강석 : 너 왜 이 꼴이야? 그럼?
현규 : 그걸 내가 왜 댁한테 설명해야 하는데?
강석 : 내 동생한테 아무 짓도 안했단 말이지?
현규 : 내가 댁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해?
강석 : (숨어서 보고 있는 혜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현규 : 이젠 별 생트집을 다 잡으시는군. (걸어가 버리는)
강석 : (벤치에 앉는)
천천히 걸어와 옆에 앉는 혜주.
혜주 : 괜찮다구. 그냥 가라니까.
강석 : (앞만 보면서) 저 자식 저 모양 된 거랑 상관있지?
혜주 : 아냐, 그런 거. 그냥 넘어졌다니까.
강석 : (보고)
혜주 : 정말이야. 오빠. 나 혼자 넘어졌어.
강석 : 믿어줄게. 그렇지만 다음 거짓말부턴 안 믿을 거야.
#.52 씬. 커피숍.(낮)
혜주, 돈을 계산하면서, 슬며시 한 켠에 핸드폰을 올려놓는.
혜주, 나가고, 현규, 친구,1,2 들어오는.
친구1 : 친구 칠칠치 못하게 왜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다니고 그러나?
친구2 : 우선은 대여폰을 써보게나.
현규 : (자신의 핸드폰 계산대 위에서 발견하고) 어, 이게 왜 여기 있지?
친구1 : 거기다 두고 잃어버렸다고 한 건가? 자네도 치매끼가 있는 거 같네.
현규 : (퍼뜩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혜주가 나간 쪽 돌아보는)
#.53 씬. 교정.(낮)
혜주, 걸어오면, 단아 걸어오는.
혜주 : (인사하고 가려고 하면)
단아 : 이혜주?
혜주 : (보면)
단아 : 나랑 커피 한잔 마실래?
시간 경과,
혜주, 단아 자판기 커피 잔 들고 앉아있는.
단아 : 난 어제 너한테 큰 일이 생긴 줄 알았어.
혜주 : .....
단아 : 거기 있었던 거지? 현규 다치는 거 보고 있었던 거 아냐?
혜주 : .....
단아 : 우연인 거니?
혜주 : .....
단아 : 우연히 지나가다가 현규 다치는 거 보고,
내 전화 번호 몰라서 현규 휴대폰으로 대신 전화 해준 거니?
혜주 : .....
단아 : 근데, 현규는 누가 전화 해줬는지 모르는 거 같던데?
혜주 : .....
단아 : 혜주야?
혜주 : 네.
단아 : 근데, 내가 갔을 때, 너 왜 거기 없었던 거니?
혜주 : .....
단아 : 혜주야. 어떤 사람은 말이야. 말 해주기 전엔 모르는 사람이 있어.
다른 데만 보고 있어서 뒤에 누가 서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불러줘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혜주?
혜주 : .....
단아 : (일어나서 혜주의 어깨 한번 잡았다 놔주고 걸어가는)
혜주 : .....
#.54 씬. 병원 복도. (낮)
의자에 푹 주저앉는 병도. 걸어가다가 뒤 돌아보는 주정.
주정 : 안 오냐?
병도 : (얼굴 가리고 있는)
주정 : (다가와서) 뭐하는 건데?
병도 : 속상해 미치겠다, 정말.
주정 : 왜? 뭐하냐구? (옆에 앉으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어보면)
병도 : (눈물이 흘러내린다)
주정 : 너? 왜 그래? 너도 뭐 안 좋대? 너 정기 검진 결과 괜찮다며?
병도 : 간경변 될 수도 있다잖아.
주정 : 너도 그러니? 내가 너 너무 달고 다녔나보다. 야, 야, 그거 별 거 아냐. 술 좀 살살 마시면 돼.
병도 : (벌떡 일어나며) 나 말고 선배 말이야.
주정 : 나? 그래서 재검 받으러 왔잖아?
병도 : 내가 그러니까 작작 좀 마시자구 했어? 안했어? 간경변 되면, 간암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주정 : 너 나 죽을까봐 겁나서 그러냐? 자식, 겁은 많아서. 괜찮아, 괜찮아.
매년 검사 때마다 결과 똑같았는데 아직도 멀쩡한 거 봐라.
국장, 끙하면서 걸어오는.
주정 : 아, 그 치질 수술 해버리시라니까. 요즘은 그렇게 아프지도 않대요.
국장 : (놀라서 주위 돌아보며) 아예, 광고를 해라, 광고를.
(그러다 울먹해 있는 병도를 보며) 넌 왜 그러냐? 어디가 얼마나 안 좋다는데?
주정 : 아, 얘 멀쩡해요.
국장 : 근데, 왜 질질 짜고 있냐?
병도 : 제가 언제 질질 짰다고 그러세요. (하면서 뛰어가다가 넘어질 뻔 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국장 : 쟤 왜 저러냐?
주정 : 저 죽을까봐 저러나 봐요. 저 혼자 술 먹고 다니기 심심할까봐 그러는 거죠 뭐.
국장 : (갸웃하면서) 쟤, 너 사랑하는 거 아니냐?
주정 : 국장님, 치질 걸리면 머리도 이상해지는 거예요?
#.55 씬. 종가집 마당.(낮)
만기, 난을 닦고 있으면, 삼월 찻잔 놔주는.
삼월 : 연잎찹니다.
만기 : (차를 마시는데)
병도, 주정을 끌고 들어오는.
병도 : 안된다니까 글쎄.
주정 : 오늘 같은 날은 한잔 재껴 줘야 한다니까.
애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 있잖냐? 간도 그런 거야. 아직 덜 단련이 되서....
병도 : (만기 보고, 다가와 인사하는) 안녕하셨습니까?
만기 : 어서 오게나.
삼월 : 무슨 애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거야?
병도 : 술 더 먹어서 간 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예요.
삼월 : 그게 무슨?
병도 : 회사 정기 검진에서 선배 간에 문제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거든요.
삼월 : 뭐? 정말이야?
주정 : 할멈, 별 거 아냐. 나도 나이가 있으니까 여기 저기 안 좋다는 결과 나오는 거야.
병도 : 또 술 먹자는 걸 억지로 끌고 오는 길이예요.
혼자 가겠다고 하는 걸 억지로 잡아서 끌고 왔어요. 어디로 새서 술 풀까 봐요.
만기 : 고맙구만.
병도 : 별 말씀을요. 후배가 되서 그 정도는 해줘야죠.
만기 : 이리 와서 차나 한잔 하시게나.
삼월 : 들어가서 찻잔 가지고 나올 테니까 앉아요.
주정 : 하여간, 김병도 넌 정말 내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인간이다. (삼월 쫓아서 집으로 들어가고)
만기 : 많이 안 좋다고 나온 건가?
병도 : 간경변으로 발전 할 수 있다고 당분간 절대로 술은 먹어선 안 된다구요.
만기 : (착잡하고)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구.
병도 : 제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아니, 술먹다가 가는 게 꿈이라는 말이 됩니까? 말이?
여자가 꿀 꿈이 없어서 술먹다가 가겠다니.
만기 : 이보시게?
병도 : 네, 회장님.
만기 : 앞으로 저 물건 좀 챙겨 주실 수 있겠나?
병도 : 여부가 있습니까? 후배 된 입장으로 술로 죽어가는 선배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퇴근하는 대로 바로 바로 끌어다 집에다 쳐 넣겠습니다.
만기 : (보면)
병도 : 모셔오겠습니다.
만기 : 어른 앞에선 아랫사람을 모셔온다고 하는 게 아닐세.
병도 : 제가 워낙 우리 할머니하고 친구처럼 지내는지라 말주변머리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를 좀 해주십쇼.
만기 : 어쨌든 고맙구만.
#.56 씬. 수영의 사무실.(낮)
수영, 태영에게 서류 주면서.
수영 : 경영 관리 실장한테 가서 결재 받아라.
태영 : 뭐?
수영 : 경영 관리 실장 결재 칸 새로 생긴 거 못 봤니?
태영 : 그건 그냥 요식 행위 아냐?
수영 : 아냐.
태영 : 그럼, 매번 그 자식한테 가서 결재를 받아야 한단 말이야?
수영 : 나보다 공식적으론 윗 라인이다.
태영 : 매일 출근도 안할 거라면서?
수영 : 앞으론 되도록이면 매일 나오긴 하겠다고 하는 거 같더라.
태영 : 뭐야? 이 자식, 아예 회사에 자리 꿰차고 들어앉겠다는 거 아냐?
처음엔 그냥 사무실이나 하나 내주십쇼 하더니?
수영 : 특히 자재에 관한 건 꼭 자기가 직접 챙기겠다고 하니까 실수 없도록 해라.
태영 : 이거야. 원. 시집살이가 따로 없는 거잖아.
#.57 씬. 강석의 사무실 2.(낮)
강석, 서류 검토하고 있는. 태영 옆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있는.
태영 : 다른 사업도 하시면서 매번 서류 결재 하시는 게 가능하시겠습니까?
강석 : 가능하도록 해야죠.
태영 : 저는 다른 사업에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되서요.
강석 :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태영 : 네?
강석 : 자재 납품 회사들 선정에 문제가 좀 있는 거 같던데.
태영 : 문제라뇨?
강석 : 왜, 토목과 인력 하청은 경쟁 입찰을 통한 선정 과정이 없는 거죠?
태영 : 그건 오랫동안 저희 회사와 인연을 맺어온 회사라 우선권을 주기 위해....
강석 : (O.L) 그런 우선권이 업계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태영 : 저흰 하청 업체도 한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강석 : (O.L) 너무 감정적인 경영 방식이라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태영 : 지금까지 그렇게 하면서도....
강석 : (O.L) 그렇게 해서 부도 위기에 몰리셨죠?
태영 : 그건.
강석 : 앞으론 지금까지처럼의 경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서류 주면서) 나가보시죠.
#.58 씬. 회사 복도.(낮)
태영, 화가 나서 걸어오면, 수영, 걸어오는.
태영 : 내가 뭐랬어? 저 자식 벌써부터 지 맘대로 하려고 설치는데.
수영 : 하청 업체 선정 껀 말이냐?
태영 : 형하곤 벌써 말이 오간 거야?
수영 :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개선해보겠다고 했다.
태영 : 형.
수영 : 틀린 말은 아니잖아? 긴축 관리 상태로 들어간 마당에
그것도 개선책일 수 있다는 거 너도 모르지 않잖아?
태영 : 우리가 해 온 방식이 있는데.
수영 : 그게 안 먹혀서 여기까지 왔잖니.
태영 : 형 벌써부터 저 자식한테 휘둘리는 거야?
수영 :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구.
태영 : 형, 저 자식하고 짰어? (걸어가 버리는)
진아, 바닥에 끌칼 들고 꿇어앉아 얼룩을 긁어내고 있다.
수영 : (지나가려고 하는데)
걸어오는 직원과 민준.
민준 : 이번 화재 보험은 꼭 저희 회사에서 맡을 수 있도록 좀 해주십쇼.
직원 : 윗분들께 서류는 올려보겠습니다.
민준 : 제가 이번 일만 잘 되면 따로 인사 챙기겠습니다.
직원 : 그런 얘긴 나중에 하고 난 또 일이 있어서.
민준 : 네, 들어가세요. (인사하고)
직원,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민준 : (돌아서다가 바닥 긁고 있는 진아를 보는. 야릇한 미소 짓고 다가와 서는)
진아 : (고개를 들고)
민준 : 여기서 일 해?
진아 : (자존심이 상하지만, 억지로 참으며) 응. 여기서 일 해.
민준 : 좀 그렇다.
진아 : 꺼져.
민준 : 너 이렇게 될까봐 그때 위자료라도 챙겨주려고 했던 건데. 그러게 왜 드러운 성질을 부려서.
진아 : 나 칼 들고 있거든.
민준 : 성질 여전하다, 너. 그 성질만 좀 죽이면 사는 게 훨씬 편할 텐데.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나 일 있어서 이 회사 가끔 올 거 같거든. (걸어가는)
진아 : (입술을 깨물고 고개 돌리다가 서있는 수영을 보는.
일어서서, 청소 도구 챙겨서 계단 옆문으로 나가는)
수영 : .....
#.59 씬. 회사 옥상 정도의 장소.(낮)
진아,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 수영, 자판기 커피 들고 와서 서는.
수영 : (커피 앞으로 내밀고)
진아 : (보는)
수영 : 밥 먹었냐고 하면 웃을래요?
진아 : (보다가 쓸쓸하게 미소 짓고, 커피 받는)
수영 : (옆에 앉는)
진아 : 인생 드럽죠? 웬수는 꼭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이잖아요?
수영 : 그 친구 앞으론 못 볼 거예요.
진아 : (보면)
수영 : 화재 보험 옮겨달라고 온 거 같은데, 우리 회산 다른 보험사로 옮길 생각 전혀 없거든요.
진아 : 저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수영 : 과대망상 있나 봐요.
진아 : (웃고)
수영 : 밥 얘기 안 해도 웃네요.
진아 : 저 때문 아니라도 고마워요. 아저씨, 아니 실장님이 높은 분이라서 고맙구. 커피 가져다 주셔서 고맙구.
수영 : (보다가) 더 얘기해도 되는데.
진아 : (웃는) 자뻑 있으시죠?
수영 : (큰 소리로 웃는)
#.60 씬. 석호의 사무실.(밤)
석호, 일하고 있으면, 울리는 핸드폰.
석호 : (전화 받고) 네?
영인E : 잘못 걸렸다고 하면 나 선배 죽여버릴지도 몰라.
석호 : 무슨 일이십니까?
영인E : 만나요, 만나서 할 얘기 있으니까.
석호 : 죄송합니다. 전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전화 끊고, 다시 울리는 전화. 밧데리를 빼버리는)
#.61 씬. 회사 복도.(밤)
수영, 걸어오면, 뒤에서 걸어오는 태영.
태영 : 들어갈 거야?
수영 : 응.
태영 : 나 형 차타고 들어갈게.
수영 : 웬일이냐? 아버지랑 같은 차타는 거 싫다면서?
태영 : 들어가는 길에 아버지 모시고 술 한 잔 하자.
수영 : (보면)
태영 : 이강석, 그 자식한테 당해서 그런지 기분도 꿀꿀하고 아버지도 요즘 좀 그러실 테니 한 잔 하자구.
#.62 씬. 석호의 사무실.(밤)
석호, 일하고 있는데. 문 쾅 열고 거칠게 들어오는 영인.
석호 : (보고) 무슨 일입니까?
영인 : (노려보는)
석호 : .....
영인 : (책상 앞에 와서 두 손으로 책상 짚으며) 그래, 졌어. 내가 졌다구. 이젠 속이 시원해?
석호 : 왜 이러십니까?
영인 : 그만 좀 해, 그만 좀 하라구. 숨 막혀 죽겠단 말이야.
석호 : .....
영인 : (주저앉으며) 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니?
하석호가 뭐라구? 천하의 이영인을 왜 이 꼴로 만드냔 말이야.
석호 : (당황해서 다가가는) 왜 이래? (잡아 일으키며) 내가 왜 그런지는 알면서.
그래. 천하의 이영인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것도 못나디 못난 하석호 앞에서.
영인 : 결혼하자. 우리. 결혼하자구.
석호 : 영인아.
영인 : 나 애 못 지웠어? 됐니? 됐어? 그러니까 결혼하자구, 이 나쁜 놈아.
석호 : (놀라다가 와락 영인을 끌어안는데)
수영, 태영 문 열고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는.
석호와 영인은 수영, 태영이 문을 연 거 모르는 상태로.
수영, 태영, 놀라 서있고.
석호, 감격한 상태로 우는 영인을 안고 서있는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