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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15-25.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 2026. 3. 15.
지난주일 우리는 오늘의 본문으로 사순절의 진장한 의미를 3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본문에서 주님이 두 번에 걸쳐서 물으셨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조건이 없는 아카페의 사랑으로 아카파오, 사랑할 수 있느냐? 어떤 경우에도 네가 가야하고 가고 있는 이 길을 진심으로 기쁘고 즐거운 것이냐?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진리이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냐? 그 진리위에서 흔들림이 없느냐?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 것에 함께 할 수 있느냐? 길과 진리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조건 없이 아카파오 할 수 있느냐? 이 것을 깨닫고 묵상하며 이 바탕위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순절의 첫 번째 의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의 똑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와 수준에도 베드로의 모습과 한계와 수준에 맞추어 주신 주님을 깨닫고 닮아가는 것이 사순절의 두 번째 의미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숙식을 하고 여러 기적과 가르침과 치유와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전히 어떤 틀과 조건적인 생각에 메여 있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친히 내려오신 그런 인카네이션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사순절을 되새기며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편없음과 한심함과 한계에도 베드로를 아카파오 하신 이것 때문에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보는 거울이 되었던 것을 깨닫는 것이 두 번째의 의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베드로와 함께 하신 예수님 때문에 베드로는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의 이후의 삶의 내용을 알고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소망하며 부르신 calling에, 그 calling이 오늘과 내일과 장차 미래에 되어 질 놀라운 변화에 따라가며 순종하는 것이 사순절의 세 번째의 의미이었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벧전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님 안에서 서로 아카페의 사랑으로 아카파오하는, 그래서 허다한 허물과 죄악을 덮어주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엡4:15. 오직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예수님께 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라갔습니다. 한계와 수준을 뛰어 넘었습니다. 형편없음과 한심함이 아닌, 예수님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각양의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을 시켜 주는 치유의 역사가 드러났습니다. 선포하는 대로 허다한 무리가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환상을 보고 환상이 지시하는 대로 이끌림을 받아 이방인을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순교를 하게 되는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와 올리심과 높이시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면서 다시 소망과 목표를 확인하는 것이 세 번째의 의미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아카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수준에 못 미치고 알지 못하는 베드로의 수준까지 맞추어 주고, 내려간 그 사랑 때문에 진정한 아카페의 사랑을 아카파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허물과 잘못의 문턱에 서지 않고 스스로 허물가운데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40;26, 주께서는 그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잘하든지 잘못하든지 실수가 있든지 없든지 다 빠짐없이 이름을 다 부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결부해서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대에 대한 인격과 성품과 생각과 철학과 사랑의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냉정히 등을 돌리고 되돌아간 베드로를 즐겨 부르는 히브리 민족의 애칭, 바요나 시몬,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세 번씩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아카페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고 자신에게 옹이가 된 허물과 잘못의 정죄로부터 온전하게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일어설 용기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고, 이 용기와 능력이 임한 이후에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에 대하여 내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그 양은 arnion, probation, probaton이었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고 이끌어 가는 것과 안내와 보살핌과 도움뿐만 아니라, 어느 때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어느 때는 생명싸개로 감싸고 보호하는 목자의 수고와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요?
1.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진심으로 주님을 만나면 진리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모든 면에서 다르게 됩니다. 생각과 가치 기준이 바뀌고 보는 것과 만나는 사람들이 확장됩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대로 실천하려고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길을 걷게 되면 전개되는 세계가 다르게 보이고 동서남북의 형통의 복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욕망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굴종의 세계에서 자유의 세계로,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의 세계로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숙도는 바로 이 새로워진 세계에서 수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제자들은 담대해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갈팡질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의 주님의 사랑과 소명을 기억했기 때문이고, 온전한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고 성령께서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출발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오늘 갈릴리 바다로 먼저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집니다. 삶과 사역의 절정과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나를 따르라는 오늘 본문으로부터 재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헬라와 히브리 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헬라의 사고방식은 명사와 머리 중심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사고방식은 동사 중심이고 마음과 몸의 움직임입니다. 헬라의 사고방식은 개념과 논리와 인간중심과 개체중심이기 때문에 명사 이름을 규정해 놓고 그 이름에 대한 편견을 가집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과 관계중심이기 때문에 동사의 중요성과 의미중심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히브리동사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없고 완료형과 미 완료형 두 가지만 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진 완료의 은혜와 아직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항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의 미 완료형의 예비 된 은혜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은 헬라어로 되었습니까? 히브리어로 쓰여 졌나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방식은 히브리식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미국의 키사르(Kysar)라는 주석학자가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표현을 조사했는데 그 믿음이라는 표현이 98회 사용되었는데 모두가 다 피스튜오,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동사의 시제가 모두 미완료와 완료입니다.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믿음이란 표현이 피스티스라는 명사인데 요한복음에서의 믿음은 피스튜오, 동사입니다. 그러면 헬라어로 기록된 요한복음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왜 피스튜오라는 동사로 사용했을까? 이유는 영적인 것과 은혜는 동사이기 때문이고 헬라 말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리스에게 정복당하여 디아스포라로 사는 동안에 후세대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헬라어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하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인데 그 행함이 없는 믿음이 바로 헬라 식 명사형 믿음입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기 전과 대화를 나누기 전과 냉정히 뒤돌아서야만 했던 베드로의 믿음이 명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히브리식 동사형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교류가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과 마음과 몸이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식 동사의 믿음입니다. 시간과 마음과 몸이 제자리 있고 머리로 믿는 믿음은 헬라 식 믿음입니다. 그러면 히브리 식의 믿음과 내용이 무엇이며 특징이 무엇입니까?
1-1.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마음이 상하여 모세와 하나님에게 원망했습니다. 이유는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인 왕의 대로인줄 기대했는데 에돔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험한 광야와 산악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을 쏟았습니다. 그 때에 불 뱀이 나와서 백성들을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 앞에서 회개를 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으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길을 열어달라고~.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을 장대에 매달아서 장대에 달린 뱀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기 위하여 고개를 들고 몸을 움직이는 동사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모세와 원수가 되었는데 보는 것이 가능합니까?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모세를 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계가 소원하고 맺힌 것이 풀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볼 수 있나요? 관계가 회복되어야 볼 수 있는데, 모세가 든 뱀을 보라고 한 것은 백성들이 모세와 관계회복을 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믿음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단지 보는 표현에 해당하는 라아와 나바트란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믿으라고 하지 않고 보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풀어진 사람만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관계회복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관계회복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고 자신의 고정적인 멍에와 사고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세운 장대에 달린 뱀을 보고 살아난 사람은 다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도 회개가 안 되면 풀리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을 때 아담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보는 자마다 다 살았습니다. 어떻게 가능한가요?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살아난 것이고, 죽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불 뱀에 물려 죽은 사람은 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요3;15절,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영생을 얻는가요? 여기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헬라 식 표현이 되는데 믿는 자는 동사입니다. 이 말이 무슨 표현과 같습니까? 바라본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회복된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3;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동사가 무엇인가요? 들다 입니다. 들다와 들리다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하나는 능동태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태입니다. 뱀이 주어가 될 때에 뱀이 들린 것이고, 인자가 주어로 될 때에 인자가 들린 것입니다. 장대와 십자가는 같은 나무입니다. 모세가 왜 뱀을 매달았습니까? 살고 싶은 사람은 여기를 보라고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까? 보라고 매달렸습니다. 십자가 달린 것을 보고 죄사함 받은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왜 바라보지 못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날 사람이 누구인가요? 죄와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나면 문제는 해결이 되는 데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내 자신이 중심이고 헬라 식입니다. 여러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느니라. 믿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몸을 돌려서 바라보고 몸을 맡긴다는 표현입니다. 요2:24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이 피스튜오입니다. 피스튜오이지만 히브리 식 표현입니다. 여러분, 믿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할 때 무엇이라고 말하죠? 아멘 히브리어로 아멘입니다. 행동으로 옮길 것을 확신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만 보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바타크입니다. 마음과 몸이 헌신되고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헌신이 되고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있지만 믿음의 동사 역할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몸이 움직이고 관계가 회복이 되여 예수님과 교류가 있는 삶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완료형이 아니고 계속진행형입니다. 계속되는 믿음입니다.
1-2. 오늘 베드로입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냉정히 뒤돌아섰던 배신자인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되풀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전까지는 명사적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갈릴리를 다시 찾은 예수님을 통해서 대전환을 이루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길을 가는데 이런 출발이 주님의 물음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내 arnion을 먹이라. 내 probation을 치라. 내 probaton을 먹이라. 세 번에 걸친 명령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갓 태어난 새끼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간기와 큰 양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모든 양을 구별 없이 먹이고 치는 동사로서의 삶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돌봄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양들을 치고 먹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양을 먹인다는 헬라어 동사 bosko. 친다는 헬라어 동사 poimaino는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어설픈 신앙인이 아니라 전문 목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주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전문 신앙인입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전문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싸우며 경쟁하는 모습이 없고, 오직 맡기신 영혼에 대한 사랑만 있습니다. 3000명, 5000명, 허다한 무리를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베드로가 됩니다. 믿음에 대하여 개념으로 살지 않고 동사로 행동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집과 생각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1-3. 양에 대한 생각입니다. 시23;1절∼2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 한 물 가로 인도 하시는 도다. 여러분, 무슨 꼴이든지 눈앞에 있는 꼴을 먹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떼에게 최상의 꼴을 먹일 수 있는 초장과 최적의 안식처가 될 물가를 알고 그곳으로 인도해야합니다. 가장 좋은 환경과 최선의 세계를 제공하고, 그 세계를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주고 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양떼들의 앞에 최상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그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전문가의 인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푸른 초장이요 쉴 만한 물가라 할지라도 주의를 게을리 하면 아니 됩니다. 사자의 입에서 양을 끄집어내고, 곰의 발톱으로부터 양을 지키고, 양이 알지 못하는 다가오는 적을 물 매 돌로 정확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지키는 것과 살피는 것이 동사입니다. 양들을 치고 먹이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생명과 진리와 빛의 세계로 한 사람이라도 인도하고 지키고, 그 세계를 향하여 삶의 방향과 길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될 동사로서의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해야 될 중요사항입니다. 이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방향과 길과 가치를 바꾸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430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찾아 나온 역사적 기록이 구약성경 두 번째인 출애굽기입니다. 이 출애굽기는 exodus입니다. 의미는 대 이동과 대 탈출입니다. 거대한 민족이 출애굽 했다는 관점에서 대 이동이고 출애굽 할 때 도망치듯 황급히 나왔다는 의미에서 대 탈출입니다. 그러나 영어 exodus의 어원인 헬라어 exodos의 본뜻은 대 이동과 대 탈출이 아닙니다.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exodos는 전치사 ex와 명사 hodos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ex는 ∼로부터, ∼밖으로란 뜻이고, hodos는 길입니다. 그래서 ex-hodos의 본래 의미는 그 길 밖으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생각과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죄악과 죽음과 어둠과 욕망과 노예였던 애굽의 길을 바꾸었습니다. 가나안과 가나안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ex-hodos의 참된 의미는 세계와 생각과 행동의 전환입니다. ex-hodos로써 애굽에서의 어둠과 죽음과 욕망의 노예가 된 세계에서 가나안이란 빛과 생명과 자유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이 ex-hodos의 대역사를 이끈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는 이미 40년 전에 ex-hodos를 실천했습니다, 살아온 40년의 애굽의 어둠의 세계를 벗어 던졌습니다. 살아온 40년의 미디안 광야의 삶을 던졌습니다. 이제 심령 속에는 이미 새로운 빛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졌습니다. 그 세계를 품고 애굽을 향하여 나아갔고, 그 세계 속에 430년 동안 어둠의 노예 생활하던 그 백성들을 품었을 때 가나안을 향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가 바뀌어 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무엇인가요?
2-1. 변화 산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어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희어졌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오더니 주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를 눅9;30-31,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별세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별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를 헬라어 원문은 ex-hodos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의 똑같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ex-hodos, 또 하나의 출애굽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멸망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세계로 이르게 해 주는 길이 ex- hodos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ex-hodos 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새 세계로 품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ex-hodos와 주님의 소명에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2-2. ex-hodos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ex-hodos는 자기희생과 자기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부활의 ex-hodos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전개되었습니다. 자기를 태우는 희생이 빛의 세계를 던져 주고, 소금이 스스로 소멸되는 헌신을 주저하지 않을 때에 생명의 세계를 제공합니다. 빛은 반드시 어둠 속에 빛의 세계를 던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태워져야 합니다. 스스로 태워짐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빛의 세계가 되기 위한 자기 승화입니다. 짠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라면 길가에 버려져 사람의 발아래 짓밟히는 무용지물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내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녹아져야 합니다. 소금이 기꺼이 녹아지는 것은 생명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자기 존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기 위하여 주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못에 박히고, 불태움을 당하고, 녹아지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고 고통입니다만 자기를 불태우지 않거나, 못 박지 않고, 자기를 녹이지 않고는 먼저 자신을 빛과 생명으로 승화시킬 수 없습니다. 타인을 빛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니고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이 아픔으로 시작하나 태어난 생명으로 인하여 기쁨이 되듯이, 새로운 ex-hodos의 시발점이고,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이 무엇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세상과 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빛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 낸 또 다른 출애굽, ex-hodos를 이루어 낸 영적인 사람들의 말씀과 간증입니다. 베드로는 진리의 빛을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므로 내양을 치고 먹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완수합니다. 히11;37-38,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사로써 믿음의 삶을 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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