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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하늘 아래론 노고단을 비롯한 장엄한 지리산 연봉들이 천황을 호위하는 무장들처럼 시립해 있고, 발 아래론 구례 읍내를
휘 돌아 치는 섬진강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오산 사성암의 조망은 감히 다툴 이가 없는 지존의 압권이라고들 한다.
강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느림보님들은 중국으로 특별 산행을 떠나는 주례 정기산행인지라 행여 빈 좌석이 즐비한 빈 느림보 리무진을,
강 대장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우려를 했었던 가 본데 아무래도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이미 주중에 좌석은 풀로 예약이 넘치다 못해 웨이팅 마져 손꾸락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 들자 일단은 문제의 반은 무난히 해결이
되었지만 또 다른 과제가 당연 기다리고 있다.
강 대장님을 비롯한 일진들은 죄 빠져 나가고 나처럼 예팬네가 무서워서 감히 장거리 여행을 엄두도 못 내는 구렇고 구런 모지방들만
오굴 거려, 시세말로 우리 명품 느림보 산악회의 물을 하악 흐려 놓는거이 아닌가 하는,차마 그림 조차 그려 보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과제가 참으로 염려되던 부분이었었는데 글쎄요.
한마디로 말해서 느림보 리무진 내에는 맹물은 죄 빠져 나가고 허연 땟깔이 기가 막힌 숭어 은어만 버글 거리지 멉니껴?
산행 들머리인 죽연마을에 하차를 하니 미리 내리신 허 교장님께서 나를 잠시 불러 세우시더니 오늘은 후배 선생님 한분을 새로이
모셔 오셨으니 돌삐께서 살뜰히 보살펴 주시란다.
사성암까지는 셔틀버스가 운행되므로 나처럼 걸음이 느리신 분들은 차량으로 이동한다는 B팀으로 가느냐 마느냐로 이곳까지 오는 도중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이젠 A팀이고 B팀이고는 나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늘 새로 오신 풋내기 선생님과 단둘이서만 C팀을 구성하여 섬진강이 쪄르르 허니 내려다 보이는 어느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훈제
양고기 노릇 노릇하게 구워선 쌉싸름한 포도주 한잔을 함께 기울이면서 우리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쪙 허니 건배를 할 즈음에
이미 두 불륜이 부딪히는 눈빛엔 퍼버벅 하는 전기 스파크가 튀는 그 순간, 앞서 걸음을 걷던 내 친구 본즈가 길바닥에서 정신을 놓고
무얼 하고 있냐며 걸음을 재촉한다.
일장춘몽이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따뜻한 날씨가 봄은 봄인 가 보다.
그나 저나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다음에 호옥 남자가 아닌 낭창 낭창한 여자 후배 선생님을 새로이 모시고 나올 일이 있으면 꼬옥
저에게 맨 먼저 소개를 시켜 주시면 등반을 위한 기초 체력훈련 뿐만이 아니라 산행 후에는 2차로 몸보신 꺼정 완조니 채김 지겠습니더.
흐 흐.
동창 모임에서 한달에 한번 정도 동창회를 겸한 산행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청계산 원터골에서 하차를 하여 길 양쪽으로 푸성귀를 비롯한
여러 귀한 먹거리를 파는 분들이 빼곡하게 들어 선 굴레방 다리를 마악 지나니 커다란 가마솥에 벌건 선지국을 펄 펄 끓이고 있는 식당
앞에 얼굴이 불콰한 어떤 사내가 두 손을 번쩍 들며 반가이 나를 맞는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학이란 이 친구는 학창 시절엔 결핵을 앓는 통에 얼굴이 뼈가죽만 남은 지라 별명이 황금 박쥐였었는데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나 보니 보기 좋게 약간 밀고 올라 간 대머리 얼굴엔 개기름이 조리 조리 흐른다.
학창 시절엔 대화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봉학이 넘은 나를 만나기 바쁘게 다른 동창들은 다 제쳐 두곤 오직 내 곁을 맴 돌며 이런
저런 신세 타령을 하는 통에 결국엔 옥녀봉에서 원점으로 하산을 하고야 마는데 뒷풀이가 예정된 식당엘 미리 들어 가서도 자신이 이제껏
살아 온 인생 행보를 파노라마 처럼 펼친다.
74년도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 행사장에서 문 세광이가 쏜 흉탄에 국모이신 육 영수 여사님이 쓸어 지시던 그 날, 봉학이의 부친은
장충동을 관할하는 경찰 경비 책임자로 근무를 했었던 지라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옷을 벗게 되면서 봉학이의 고난은 시작된다.
제대를 하곤 수원에 있는 모 농업 연구소에 취업을 하니 미리 입사를 한 선배 한 분이 퇴근 후 술자리를 주선하시면서 뜬금 없이 집안에
돈은 넉넉하냐고 물으시길래 똥구녕이 찢어 질 정도라고 하니 연구소란 곳은 일 하기엔 별 어려움이 없는 아주 편하고 괜찮은 직장인데
문제는 박봉이여서 생활이 그리 넉넉치 못하다는 것이다.
생활이 어려울 때 우리가 흔히들 쓰는 똥구멍이 찢어 질 정도라는 표현은 예전 궁핍하던 시절엔 가난한 사람들은 만부득히 거친 음식을
먹게 되므로 자연 변비가 생기게 되어 결국엔 용변시 실제로 똥구멍이...
그리고 몹시 힘이 들 경우에 사용하는 쌔가 빠지게 라는 말은 쌔가 아니라 혀를 말하는데 사람이 숨이 넘어 갈 정도가 되면 혀를 길게 빼
문다고...
또 한가지 오랜 세월을 말할 때 사용하는 새털 같은 나날은 사실 날아 다니는 새를 말하는게 아니라 움무우 하는 소(쇠)를 말한다.
소를 가까이에서 보면 굵지는 않은 털이지만 그 숫자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어려운 가정 환경 덕분에 등록금 마져 융자금으로 해결하여 많은 채무를 지닌 봉학이는 그날로 사직서를 던지곤 약 일주일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준비를 한 교원 임용고시에 합격을 하여 이천에 있는 모 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낭패스럽게도 임시 교사였던 것이다.
약 일년을 근무하고 나니 실업자가 되는 지라 울화도 치밀고 하여 이천 근교에 있는 야산엘 오르노라니 산 입구에 있는 벤취에 지팽이를
든 노신사 한 분이 젊은이가 일을 열심히 해야 할 평일에 이런 산엘 무슨 일로 왔냐고 하길래 노신사 옆에 퍼질르고 앉아서 임시 교사로
선생질 하던 놈인데 어제 부로 임시 교사 마져 짤려서 이 신세가 되었다고 하니 경북에 있는 모 학교로 내려가 보라고 하신다.
얼마 전까지 노신사 분께서는 그 학교의 재단 이사장으로 근무를 하셨는데 지금은 아드님이 재단 이사장 이라신다.
반신 반의하고 경상도 어느 마을로 내려 가니 학교 교문 위에 봉학 선생님을 환영한다는 프랭카드 꺼정 걸려 있더란 것이다.
처녀 시절 부터 의류 사업을 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선 정말 꿈 처럼 알콩 달콩한 신혼을 보냈다고 한다.
아내가 운영하던 의류 가게가 워낙 협소하여 자체 창고가 없는지라 학교에서 퇴근을 한 봉학이는 하루도 빼 먹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월세가 싼 창고에서 한 가득 옷가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아내가 기다리는 가게로 가선 함께 살뜰하게 한 장사가 여태까지인데
이제는 운이 트이는지 봉학이 넘은 교감으로 승진을 하였고 아내는 I.M.F 로 인해 인접한 가게들이 무너지면서 억지 춘향으로 가게를
확장하게 되었는데 무려 칠십평의 대형 가게가 되면서, 그리고 인근에 대형 백화점이 입접을 하게 되면서 재래 시장을 함께 끼고 있는
봉학이 아내 가게는 일 매상이 전국 일 이위를 타툴 정도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개뼊따귀 같은 인간이 숨 넘어 가는 넘 고개를 지그시 밟아 대는 최종 마무리 염장도 잊질 않는다.
구래도 학창 시절엔 우리 동창들 중에서 나중에 가장 출세를 많이 할 인물로는 당연히 돌삐 네놈이였었는데 쯧 쯧.
난 한마디도 안하고 그져 눈 앞에 보이는 쐐주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양껏 마셔 댔다.
원래 동창회란 곳에서 몇 놈이 숫개 저엇 자랑 하듯이 마누라에서 부터 자식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본인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건 돈 밖에
없다며 미나리깡에 용 났다고 메롱 메롱 하기 시작하면 그 동창 모임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 다는 말을 실감을 하면서도 다른 친구들
그리운 얼굴 볼 욕심으로 다음달 동창 모임엘 또 나가니 다행히 봉학이 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쪈이 낙낙치 못한 난 한마리 유기견 처럼 한쪽 구퉁이에서 죄 없는 술만 들이 키고 있는데 총무를 비롯한 몇 몇 운영진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난 화들짝 놀라게 된다.
얼마 전에 봉학이 아내가 쓸어 졌는데 이미 식물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둥주리봉에서 하산길을 택해 초봄의 그윽한 향내를 원 없이 마시며 용서마을로 내려 오니 한적한 도로변에서 뒷풀이 잔치가 한마당
펼쳐 지는데 놀랍게도 고사리를 푸짐하게 넣은 닭계장이 오늘의 메인 메뉴이지 멉니껴?
주위분들에게 역부로 물어 보니 최 기사님 솜씨라고 한다.
울 엄니가 해 주시던 그 맛이 오롯히 스며든 닭계장을 넘들이 죄 자리를 털고 일어 설 때 까지 퍼 마시다 결국엔 조 대장님 손에 숟깔을
뺏기고서야 겨우 국그릇을 놓았다.
봉학이를 만난 날로 부터 약 이태가 지난 어느 날 난 꿈에서 내가 다니는 절에 주석하셨던 큰스님을 현몽케 되는데 석양빛을 등진 큰스님
께서 나를 보면서 구제를 해 주시겠다는 건지 누구를 구제해 주라는 말씀인지 정확치는 않지만 그런 의미가 담긴 말씀이신건 틀림없는
지라 혹시 하는 마음으로 롯또를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핸펀이 울린다.
매일 꼭두 새벽에 아내가 있는 병실로 문병을 갔다 와선 아들 녀석 아침상을 차려 주곤 학교로 출근을 했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 와선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을 돌보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데 요즈음은 아내가 분당 인근에 있는 보바스기념병원에 있어 매일 새볔에 분당
을 오는데 나랑 자기 동네에서 술 한잔을 꼬옥 함께 마시고 싶다며 내일은 휴일이니 아침 여덟시에 미금역으로 나오면 아내 병문안을
마치고 자기가 그곳으로 와서 나를 픽업한다는 것이다.
휴일이어 펑 뚫린 내부순환로를 타고 얼마 가질 않아 도착한 봉학이네 아파트에 차를 파킹하곤 큰길을 건너니 봉학이 아내 가게가
보이는데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내부는 불이 꺼진 채 컴컴한데 봉학이가 가게 안을 함 구경하겠느냐고
묻는데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아 그냥 지나 쳐서 재래시장으로 가는 가게 뒷편 골목길을 한참 걷노라니 자그만 공터가 보인 곳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춘 봉학이가 사실은 아내가 쓸어 지기 전날 밤 꿈에 외동아들을 도랑 구석에 이미 쳐 박은 어떤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네가
엎어져 누운 아내의 목덜미를 발로 밟은 채 봉학이를 향해 창날 같은 손꾸락을 던지며 오늘 네 넘의 꼬락서니가 참으로 볼 만 하다는
것이다.
순간 내 대가리에 붙어 있는 모든 머리카락이 싸움닭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재래시장 내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술국 한그릇 달랑 놓고는 봉학이는 서울 막걸리를 난 진로 쏘주를 취하기만 하면 지 애비도 몰라 본다는
해장술을 난생 처음으로 쉼 없이 뱃속으로 드리 부었다.
총각 선생님 시절 봉학이는 함께 근무하는 여선생님과 약간의 연분이 있긴 있었는데 이 선생님이 너무도 순수하고 티 없는 분인지라
하이얀 창호지에 먹물을 뿌리는 기분이어서 사실 손 한번 못 잡아 본 채로 유야무야가 되었는데 노총각으로 있다가 늦게서야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한 이후에 사귀던 그 여선생님이 무신 사유인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스스로 목슴을 끊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꿈 속에
나왔던 그 소복 입은 여인이 그때 사귀었던 그 여선생님 비슷하기도 하고, 아내가 쓸어 지고 나서 주위에 있던 아내 친구들 권유로
경기도에 있는 유명한 만신을 찾으니 그 만신은 가게를 확장할 때 땅속에 있는 어느 시신의 뼈를 잘못 건드려서 그러한 일이 발생
하였는데 푸닥거리를 원하면 해 주기는 해 줄 수가 있는데 워낙이 심하게 철썩 들러 붙은 원귀라서 본인도 장담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전에는 탁발을 오셨던 어느 스님은 갑자기 견디기 힘든 심한 두통을 느끼면서 이 가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하면서 황급히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 버리더란 것이다.
충격을 받은 중학생 아들 녀석은 이미 학업은 포기를 하곤 피씨방을 차려 주면 평생 그 일로 먹고 살겠다며 땡깡을 부리고 있으며 처가
쪽에선 그 가게 울 언니가 벌은 돈이라며 드리 대는 와중에 봉학이 친가 쪽에선 행여 간병 등의 일을 부탁할까 해서 이미 발길을 끊은지
오래되었으며 주위에서 가게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게를 그져 줏어 먹을려고 혈안이 되어 약 일년 동안을 휴직을 하면서 겨우
겨우 가게를 꾸리고 있는데 몹시도 힘이 든다며 내게 어찌해야 좋을지 물어 본다.
봉학이 말에 의하면 아내는 평소에 가게일로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을 주위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천사같은 분이였는데 봉학이는 그저 아내 따라서 아무런 생각없이 주일이면 가는 교회지만 아내는 참으로 신심 깊은 교인이었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었던 단 한마디 말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가 없는 일이라면 아내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께 모든 걸 의지하라는
그 말 뿐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발설치 못하고 내 심중에만 남겨 두었던 한마디 말은 원래 부터 배가 고파서 먹자고 덤비는 넘과 그시기가 굶주려서 멀
하자고 자꾸 드리 대는 넘은 말릴 방법이 엄따는 것이다. 주던지 달래던지 둘 중에 하나란 것이다.
돌아 오는 길에 우리 느림보는 잊지 않고 산수유 마을에 잠시 차를 세웠다.
장터 중앙에는 각설이 타령을 하는 품바 아저씨들이 신명을 돋우고 있어 한참을 잼나게 지켜 보노라니 학창시절 잘 부르던 각설이 타령이
생각난다.
울릉봉 터진봉, 개미허리 잘룩봉, 하왕십리 무학봉,영화배우 도금봉,남자배우 윤일봉,북한산에 인수봉... 에라두리 깡촌에 개천봉
아 어떤 넘은 팔자가 좋아 고대나 광실 높은 집에서 기생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아 어떤 넘은 팔자가 궂어 문전 문전에 걸식이냐?
아줌마 밥 좀 주어 이잉.
없어 이 넘아.
아들을 낳거든 고자나 놓고 딸을 보거든 과부나 되라. 얼씨구 돌아 간다 절씨구 돌아 간다.
며칠 전 올만에 동창회 모임엘 나가니 조금은 늦은 시간에 봉학이 넘의 얼굴이 보인다.
반가이 손을 잡고 안부를 물으니 이미 오래 전에 본인은 교장으로 승진을 하여 경기도에 있는 모 여중에 근무를 하고 있으며 힘들게 운영
하는 아내 가게는 좋은 조건으로 잘 넘겼다고 한다.
아내가 쓸어 지고 벌써 햇수로 12년 째가 된다고 한다.
단 하루도 빼 먹지 않고 아내를 찾아 가는 봉학이의 지극한 정성과 평소에 행했던 봉학이 아내의 선행에 어찌 하늘인들 무심하리요 하는
생각에 참으로 가슴이 아푸다.
하루 빨리 봉학이의 천사같은 아내가 훌훌 털고 일어 나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길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본다.
탄천변에서 느림보의 구염동이 돌삐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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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 돌삐남 무자 게 재미있었나 봅니다산 안산하시와요 오라버니
그것 하나로 에쉴리는 대리만족입니다요
무지 긴듯하지만 읽다보면 금새 지나버리는 산행일기에 그저 낄낄 거리고 나름 공부도 많이 하지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언제나 느림보와 함께
재미나게 읽어나가다 친구분의 사연에 가슴아파 옵니다.
빨리 완쾌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글 내용이 다 좋고 감히 흠잡을데가 없는데 마지막 한소절이
떨떠름하네요.뭐?? "느림보의 구염둥이??" 소나 키우소 마!! ㅋㅋ
감사합니다.다음주 산행기 기대됩니다. ㅎㅎ
'맹물은 죄 빠져 나가고 허연 땟깔이 기가 막힌 숭어 은어만 버글 버글..'
강대장이 빠진 산행이 더 잘 되더란 얘기지요?ㅎㅎ
사실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느림보 고정인원 13명이 빠진 화요산행..
차안이 썰렁하면 가시는 분들도 기운 빠지는데..하고.
그러나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걱정이었지요.
만차도 모자라 예비석까지 있었으니....
과연 느림보님들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산나리가 걱정하는 마음 알고..자리를 꽉꽉 채워주셨습니다.
선장없어도 키를 잡고 배를 저어 갈 대장님들이 떡 버티고 계신 느림보호가
산나리는 아주 믿음직스럽답니다.
이번 기회에 그걸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울님들이 느림보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산나리는 마음 약해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울님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돌삐님의 산행기를 통해 화요일 산행이 어찌 이어졌는지 보입니다.
돌삐님께도 고맙고 각 대장님들께도 고맙고..
산나리가 울님들께 넙죽 큰절 올립니다.
ㅎㅎ.. 덕분에, 맹물들 잘 다녀 왔습니다요..
친구분 이야기는 정말 안됐습니다..
가슴 찡한 사연! 언능 툭툭 털고 일어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구런데요~ㅋㅋ..구염동이도 틀린 말씀은 아니구요~ 제,생각엔 느림보의 보물이십니다요!!
언제나, 재미난글~!
때론 인간적인 감동도 주시고,,
해박하신 지식으로 공부도 하게 해 주시고,,,
잘 쓰신 멋~지신 글 오늘도, 감사히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