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동마을의 유래 양동마을은 조선 시대 양반 문화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에요.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손소입니다. 1467년 세조 때, 이시애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임금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그래서 하루는 신하들을 소집하여 의논을 하였지요. 사태가 긴박한지라, 영의정 대감도 병조 판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때, 병조 좌랑 손소가 소임을 맡겨 주면 난을 평정하겠다면서 씩씩하게 나섰지요. 세조의 윤허로 그는 용감히 싸워 마침내 난을 평정하였어요. 그 일로 손소는 지금의 양동마을이 있는 안강평야의 넓은 땅을 상으로 받았답니다. 임금이 보낸 지관이 안강평야에 도착하여보니 평야보다는 산비탈 자리가 좋다고 판단하였어요. 산비탈에서 보니 전망이 좋고 양동마을의 물자형 혈맥이 맺힌 곳이라서 명당자리라고 하니 손소는 기분이 좋아서 산등성이 네 곳에 집을 짓게 되었어요. 그 이후 훗날의 후선들을 위해 정자와 기와집, 하인과 하녀들을 위한 가람집(초가집)을 지어 주었지요. 손소 대감 슬하에는 다섯 아들과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모두 훌륭하게 잘 자라 주었어요. 딸은 이웃 동네까지 소문이 자자하여 옆 마을의 여강 이씨 집안에서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두었지요. 그리하여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는 사돈을 맺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 회재 이언적이랍니다. 이언적 선생은 ‘동방 5현’이라고 불렸어요. 동방 5현이란 학문이 높고 덕망 있는 동양의 다섯 어른을 말해요. 이언적은 24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성리학을 신봉하였지요. 손씨 집안과 이씨 집안이 한 마을에 살면서 종종 갈등을 일으키니 이언적 선생은 여러 날을 고민하던 끝에 친가와 외가를 비롯해 모든 마을 사람들과 머슴들을 위한 놀이와 잔치를 생각해냈어요. 줄다리기와 호미씻이를 하는데 손씨와 이씨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 윗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마을이 편해진다는 규칙을 만들어 하합을 도모하도록 하였지요. 7월 보름을 머슴의 날로 정하여 쉬게 해 주기도 했지요. 2.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가옥 1) 무첨당 (보물 411호) :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의 종가집인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대원군의 죽필 글씨인 좌해금서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경상도의 고귀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ㄱ’자형의 평면으로 돌출된 2칸 누마루, 양 끝에 온돌방, 3칸 대청이 있는 간단한 구성이다. 2) 향단 (보물 412호) : 이언적 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임금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 준 집이다. 당시는 99칸이었으나 허물어져 수리하여 지금은 56칸이다. 외부구조, 내부구조 모두 화려하고 세밀하게 고려해서 지은 빼어난 주택이어서 건축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회재 선생의 아우 이언괄공이 향단을 물려 받았는데 그의 손자의 호가 향단이다. 3) 관가정 : 손중돈 선생이 아버지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경관이 일품이다. 모든 부재의 가공은 소박한 자연미와 유고적 금욕성을 나타내며 자기과시적 표정은 찾아볼 수 없어 청백리로 이름 높은 우재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4) 서백당 (중요민속자료 23-2호) : 손소가 25세 때 지은 것으로, 사랑채 이름을 따서 서백당 또는 송첨이라고 부른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며 행랑양동마을은 유가(儒家)의 법도와 선비 기풍으로 500 여년을 다져 오면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보기 드문 반촌(班村)이므로 전통문화와 한국적 정취가 가장 완벽하게 살아 있다. 이 마을의 문화재 수는 국보1점, 보물4점, 중요민속자료12점, 유형문화재2점, 기념물1점, 민속자료1점, 문화재자료1점, 향토문화재2점으로 도합24점이나 되고, 마을 전체가 1984년 12월 20일 중요민속자료 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옛 명문 대가의 영광스러운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 있는 200년 이상 된 고가54호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외거하인들이 살던 가립집이라 부르던 초가집이 3∼5채씩 반드시 딸려 있어 주거공간에도 신분계층의 질서가 있었으나 주변의 초가는 많이 없어졌으며, 현재 초가집에 살고있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역사속의 사실이 되었다. 사랑채는 대개 정자(亭子)형태로 지었으며 위패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는 종가와 파주손집이 다섯집이고 별도로 지어진 영당1동이 있다. 조선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의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곳이다. 말 그대로 양동민속마을 자체가 살아있는 유교문화의 유산 자체인것이다. 무첨당(無添堂)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집인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添堂)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글씨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청백리로서 조선 성종(1469∼1494)∼중종(1506∼1544)때 명신 우재 손중돈(憂齋 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곳이다. 격식을 갗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은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양반집이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 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聾齋) 이언괄(李彦括)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며, 큰 고목들이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 채, 사랑채, 사당의 3영역으로 이루어지며 전체적으로 소박한 인상의 조선 상류주택이다. 사랑채인 서백당은 ‘삼현선생지지’라고 하여 세 명의 현인이 태어날 땅이라는 풍수설이 있는 곳인데, 손소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과 외손인 이언적이 태어났고, 앞으로 한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5) 독락당 : 홀로 학문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곳. 이언적 선생이 귀향한 뒤 은둔했던 곳이다. 이 곳에서 밤낮으로 학문에 힘써 선생은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다. 은둔자의 마음이 반영되어 전체적으로 낮고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담의 일부를 잘라 내고 살창을 설치한 것이 독특하다. 방안에 앉아서도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출처 : “이야기가 숨어 있는 어린이 문화유산 답사기 2” 이형권 지음/여기 그림. 청년사 출판사. “천년의 창으로 본 신라이야기” 경주문화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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