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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Tony Webster on Flickr) |
우리나라의 개인정보 보호법은 상당히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T 업계에서는 이를 과도한 규제로 규정하고 오랫동안 완화를 주장해 왔다. 그 결과 최근에 비식별화된 개인정보를 연구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 3법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개인정보의 사용과 관련하여 사회적 경각심이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높은 감염력을 가진 바이러스를 상대하다 보니 확진자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없이 개인정보를 공유하고 반강제적인 제재를 가하는 일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휴대전화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이 이 모든 일에 핵심 역할을 감당했고, 그 결과 정보소통기술(ICT, 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이 그만 정보감시기술(IST, Information Surveillance Technology)이 되었다.
흔히 기술은 잘 쓰면 좋고 잘못 쓰면 안 좋으니 중립적인 것이라 한다. 그러나 방금 살펴본 것처럼 휴대전화가 바이러스 확진자 감시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악용도 선용도 아닌 본래 의도를 벗어난 확장된 사용이다. 그 확장도 기술의 발전이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본다고 해서 악용과 선용의 잣대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휴대전화를 간접적인 감시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판단은 양가적이다.
이런 불확실성과 모호성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위기가 기존 기술의 확장적 혹은 변형적 사용을 용인하는 주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역학조사에 스마트폰의 위치정보를 사용하는 일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우세하게 된 것은 아주 좋은 사례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첨단기술들이 개발되고 그때마다 윤리적 법적 사회적 함의들(ELSI: Ethical Legal Social Implications)을 살펴 ‘악용’을 막으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19와 같은 비상 상황이 되면 그 우려를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들이 나타날 것이다. 첨단기술들이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가능성을 제시하며 반복적으로 이런 도전을 가해 올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4. 연결의 피해자가 단절의 피해자도 된다
전염병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 보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술이 발전해도, 발전된 기술체계가 망가져도, 약자는 약자로 남는다. 이전에 세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남들을 구박하던 자들이 전 세계를 연결해서 정신없이 돈과 물자와 인간이 돌아다니게 된 세상에서 다시 호강을 누렸다. 이제 연결이 지나쳐 문제가 생기고 단절의 시절이 오니 연결로 유익을 얻었던 자들이 목청껏 불편을 호소하지만, 결국 그 모든 손해의 맨 아랫자리는 노약자, 소규모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빈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 기존 질서에서 소외된 자들이 차지한다. 이미 기존 질서의 취약성과 지나친 연결 때문에 손해를 보았는데, 그 질서에 금이 가서 생긴 피해도 밑으로만 내려간다.
차마 위안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긍정적인 측면은 사회의 약자들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나마 안정되어 평형을 이룬 사회에서는 약자들도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자신들이 겪는 부조리와 피해를 받아들이고 적응하기 마련이다. 이런 평형 상태에서는 정의와 공평이 무너졌음을 호소하거나 문제 상황을 발견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흔드는 위기가 발생하면 기존의 부조리와 억울함이 더욱 커지면서 가시적이 된다.
눈에 보여도 외면하면 그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코로나19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환자들, 이단의 유혹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이들, 과도하게 연결된 인력과 물자의 시장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상황을 드러냈다. 모두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들의 고통에 눈 감고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서 과거의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교회는 이 문제에 주목하고 천착해야 한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 주어진 큰 숙제다. 코로나19의 위협은 동시에 이전의 세상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철저한 무능과 죄악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5.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첨단기술과 전염병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여러 차원으로 드러냈다. 우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급박한 결정을 시시각각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토론과 의견 교환의 시간이 필요한 민주주의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 시민의 자유와 안전이 모순을 일으키고 첨단기술이 민주적 원리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이 용인되면 정부와 기술을 주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집단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방역에 상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정부의 ‘영이 서는’ 권위주의 시절의 일사불란함과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란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자유를 내려놓은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이지만, 남의 자유를 침범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문이 열릴 수 있다. 특히 차후에라도 비상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확장적 사용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술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되도록 견인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전문가주의와 포퓰리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비상 상황에는 전문가 말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중이 선출한 정치 권력에 대한 위험한 멸시가 깔린 경우도 없지 않다. 첨단기술과 전문가주의가 결합하면 민주주의의 입지는 좁아지게 마련이다. 비록 시민들이 전문가에 비해 지식이 적고 이해도가 낮다 하더라도, 전문가들이 시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비전문가는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결국 권위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전문가주의도 문제지만 대중의 순간적인 선호에 정책을 맞추는 포퓰리즘이나 정치 선동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추기는 요소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해결이 쉽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단기적 문제에 봉착하여 어려움을 겪는 대중은 큰 틀과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때 대중을 설득해서 좀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나가는 리더십이 필요한데, 최근 미국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정치가가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고 대중의 즉각적인 선호를 등에 업으려는 선동에 나서면 큰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SNS를 비롯해 엄청나게 발달된 미디어 환경 역시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쉬워졌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고르기 위해서는 검색엔진 같은 외부적인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보의 편중과 편향, 왜곡이 일어나거나 선동에 동원되기 쉽다. 최근 몇 년간 많은 사람들이 가짜뉴스와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에 시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정보가 가용해진 상황에서 쉽게 주어지는 정보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는 상황에 비례하여 현대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할 필요는 더욱 절실해진다. 현대기술의 발전이 권력과 부의 편중을 심화하고 사람의 생각마저 일정한 방향으로 조종하며,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침해할 여지들을 많이 안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유전공학 등 소위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들의 개발과 발전을 적절하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 동력을 찾기가 쉽지 않고, 코로나19는 그 반대 방향의 동력을 만들고야 말았다.
6. 어떤 만남은 부질없고 어떤 만남은 소중하다
대학에서는 온라인 원격 수업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육의 일부를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육부나 대학의 리더십 차원에서만 강하게 대두되었을 뿐, 대학 현장에서는 정작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물론 방송통신대학과 사이버 대학들이 있지만, 이들은 평생교육의 장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화상회의에 대한 로망의 역사도 길다. 정부청사에 화상회의실을 설치한 것이 한 2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특별자치시로 중앙정부기관들이 옮겨간 이후에도 공무원들은 화상회의보다는 KTX를 타고 서울을 오가는 데 더 익숙했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대형 교회들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중계하면서 유학을 가서도 모교회의 인터넷 예배를 드린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코로나19는 이 모든 상황을 일거에 바꾸었다. 3월 초의 대혼란 이후 사실상 전국 모든 대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온라인 교육을 제공해야 했고, 공식적인 회의와 모임도 모두 미루거나 화상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 오류나 서버 부하 같은 기술적 문제들의 해결에 모두 총력을 다해야 했다. 이제 초·중·고등학교의 온라인 개학까지 실행하면서 출석 인정 방식에서부터 수업시간 책정, 수업 내용의 질과 양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 교회로서는 신학적·교리적 문제도 있었다. 신학자들은 온라인으로도 예배하는 것이 부족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해야 했다.
과거에는 온라인 수업과 화상회의를 추구하면서도, 그 시도가 면대면 수업과 만남의 모든 측면을 모사할 때까지 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대안이 없는 비상 상황에서 약간의 잡음이나 접속지연, 불명확한 화면 등은 얼마든지 참을 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조별 모임이나 분임 토론조차도 이런저런 방식들로 해결할 방안들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온라인 소통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은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 오히려 그런 소통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거나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미국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인터넷의 철학》(필로소픽 펴냄)에서 배움의 단계를 초보자(novice), 상급초보자(advanced beginner), 숙련성(competence), 능숙함(proficiency), 전문성(expertise), 대가(mastery) 등 여섯 가지로 나누면서 이 중 숙련성이나 능숙함까지는 온라인 교육으로도 습득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온라인 교육으로 전달할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높은 수준의 배움도 몸이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성에 이른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각적으로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고, 대가의 수준에 이른 사람은 전혀 주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비언어적으로 배우는 과정 없이는 이런 수준에 오를 수 없다.
온라인 교육과 소통에 대한 드레이퍼스의 다소 부정적인 평가와,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 방법에 적응해 가는 우리의 현재 중 어느 쪽을 받아들여야 할까. 가장 원론적이며 편리한 대답은 결론이 중간 어디쯤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수많은 만남과 연결 중 어떤 것들은 굳이 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업이 되었든 회의가 되었든 제한된 수준의 정보를 주고받는 데는 온라인 소통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몸이 부딪히는 기회가 중요한 소통이 분명히 있다. 교실에 와보지 못한 대학 신입생들은 동급생들과 몇 마디 주고받으며 얻는 유형무형의 배움과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대학의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한다. 예배가 설교를 듣는 일만이라면 온라인으로도 무방하겠으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성도가 몸으로 모여 교제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온라인 소통에 노출되면서 그동안의 만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교실에서의 수업이나 회의실에서의 논의, 그리고 예배당에서의 예배가 가진 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우리가 가져왔던 그 만남들이 과연 얼마나 그 가치와 필요에 충실했는지 묻게 된다. 수업, 회의, 예배의 어떤 부분은 굳이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가도 온라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지 모른다. 또 다른 어떤 부분은 반드시 회복하고 가꾸어서 몸이 만나는 효과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각 만남의 여러 측면과 부분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어떤 만남이 부질없고 어떤 만남이 소중한지를 나누는 작업들이 일어나야 한다.
7. 새로운 평형을 위해 본질을 물어야 한다
국가적 규모, 아니 세계적 규모의 재난을 겪으면서 2017년 11월 15일 이곳 포항에서 일어났던 리히터 규모 5.4의 지진을 떠올리곤 한다. 잠시 동안의 흔들림으로 우리가 몰랐던 건물의 약한 부분들이 모두 무너지고 망가졌다. 엉망이 된 삶의 현장을 복구하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를 되찾는 일이 아니라 일종의 구조조정이었다. 없던 구조물과 규칙이 생기고, 있던 물건들은 버려지거나 재배치되었다.
코로나19 사태도 굳이 꺼내어 논하지 않았던 여러 문제들을 억지로 다시 돌아보게 한다. 기술, 민주주의, 예배, 교육, 사회정의와 약자의 문제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 사태로 요소요소에 숨어 있던 약한 부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개선과 성찰을 요구한다.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기왕 주어진 상황이라면, 다시 정리하고 고쳐서 새로운 평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벌어진 틈을 페인트로 대충 감추고 먼지 묻은 책을 부서진 책장에 그대로 꽂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이번을 기회 삼아 전혀 다른 미래를 기획할 만도 하다. 미래를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닌 오늘의 기획으로 본다면 애써 예측할 필요도 없다.
새로운 기획의 핵심은, 진부하게도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여 만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학이나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기술 발전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민주주의 원칙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미 교과서 안에 있었으나, 엄청난 위기에 당면하여 그 문제들이 현실과 닿게 되었다. 좀 더 실감나게 맞닥뜨린 이 물음들을 앞으로 한동안 깊게 묻는다면, 안타까운 재난의 시간을 보낸 모두에게 약간의 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손화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