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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사랑을 그리다'에서 대비 심씨의 어머니 안씨(安氏)는?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1395∼1446)의 아버지는 심온(沈溫, 1375~1418)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2파 8세로, 안자미(安子美) - 안영린(安永麟) - 안정준(安貞俊) - 안성철(安成哲) - 안문개(安文凱, 1273~1338) - 안천선(安千善) - 안천보(安天保, 1339∼1425))의 따님이다.
소현왕후는 어려서 외조부였던 안천보(安天保)의 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죽계안씨(竹溪安氏)라는 기록 : 1445년 조선왕조실록
1418년에는 심온(沈溫)은 세종이 즉위한 뒤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 동생 심정(沈泟)이 병조판서 박습(朴習, 1367~1418)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태종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온의 처이자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어머니였던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안씨(安氏) 부인이 1445년(세종 27) 사망하자 세종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손자 이계전(李季甸, 1404~1459)에게 대부인(大夫人)의 묘지(墓誌)를 짓게 했다.
그런데 이 묘지를 지을 때 대부인(大夫人)을 ‘죽계안씨(竹溪安氏)’라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관련근거 1.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2월 22일 병인 5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 직집현전 이계전에게 삼한 국대부인 안씨의 묘지(墓誌)를 짓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2022_005
○命直集賢殿李季甸, 製三韓國大夫人 安氏墓誌。 季甸啓: "婦人之爵, 從夫之職。 安氏雖中宮之母, 然沈溫旣得罪奪爵, 夫已無職, 而妻號大夫人, 非特義所不合, 實駭後人見聞, 願削大夫人之號, 只書竹溪 安氏。" 上謂承政院曰: "此與漢 上官皇后母事相同, 其與季甸議之。" 承旨朴以昌等曰: "大抵墓誌, 記其平生之實事, 生則稱大夫人, 死則止稱安氏不可。 況《傳》曰: ‘母以子貴。’ 安氏, 中宮之母也, 何論夫職之有無而去其號乎? 臣等前請禮葬而不允, 又削大夫人之號, 則義實未安。 請從平日之號書之。" 上從以昌等議。
직집현전(直集賢殿) 이계전(李季甸)에게 명하여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안씨(安氏)의 묘지(墓誌)를 짓게 하였는데, 계전이 아뢰기를, "부인의 작위(爵位)는 지아비의 벼슬을 따르는 것이온데, 안씨가 비록 중궁(中宮)의 모친이기는 하나 심온(沈溫)이 이미 죄를 받아서 벼슬이 삭탈되었으니, 지아비가 이미 벼슬이 없는데 그 아내의 칭호를 대부인이라 하면 의리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오라, 실로 뒷사람들의 보고 듣기에 놀랍게 될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부인의 칭호를 삭제하고 그저 죽계 안씨(竹溪安氏)라고만 쓰사이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것이 한(漢)나라 상관황후(上官皇后)의 모친의 일과 같으니, 그것을 계전과 더불어 의논하라." 하였다. 승지 박이창(朴以昌) 등이 아뢰기를, "대저 묘지라는 것은 그 평생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온데, 살았을 때는 대부인이라 일컫고, 죽은 뒤에는 안씨라고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옛글에 이르기를, ‘어미는 자식으로써 귀히 된다.’ 하였는데, 안씨는 중궁의 모친인지라 어찌 가장의 벼슬 있고 없음을 논하여 그 칭호를 버릴 것입니까. 신들이 요전에 예장(禮葬)하시기를 청하였사오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또 대부인 칭호마저 삭제하여 버리면 의리에 실로 미안하오니, 청하옵건대, 평일의 칭호에 따라서 쓰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창 등의 의논을 따랐다.
관련근거 2. 심단(沈檀, 1645~1730)이 지은 심온신도비(沈溫神道碑)[1737년 건립] : 配三韓國大夫人順興安氏領敦寧府事昭懿公天保女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186
配三韓國大夫人順興安氏領敦寧府事昭懿公天保女
배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소의공(昭懿公) 안천보(安天保)의 따님이다.
관련근거 3. 심온묘갈(沈溫墓碣)[1737년 건립]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이 글씨를 썻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187
관련근거 4.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2월 16일 丙辰 5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안천보의 졸기
http://sillok.history.go.kr/id/WDA_10702016_005
○領敦寧府事致仕安天保卒。 天保, 順興郡人, 順城君 千善之子。 至正癸卯, 始仕爲別將, 歷典客副令、軍器尹、判司僕寺事、懿德府左司尹、判宗簿事, 陞工曹典書, 未幾免, 以琴書自娛, 閑廢者十六年。 永樂戊子, 太宗召拜檢校漢城尹, 蓋嘉其眞純也。 我中宮, 天保之外孫, 養于天保家。 上之在潛邸也, 太宗選爲媲。 己丑, 進拜天保檢校參贊, 俄陞檢校贊成。 上卽位, 特拜左議政, 致仕, 遷領敦寧府事, 以老仍令致仕, 至是以病卒, 享年八十七。 秉心忠直, 及爲懿親, 尤謹愼無驕色。 病亟, 子壽山進藥, 天保曰: "人生八十, 世不多有, 我何必飮藥?" 翛然而逝。 訃聞, 輟朝三日。 諡昭懿, 容儀恭美昭, 溫柔賢善懿。 子壽山。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한 안천보(安天保)가 졸하였다. 천보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비로소 벼슬하여 별장(別將)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군기 윤(軍器尹)·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의덕부 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해면되자 거문고와 서적으로 혼자 소일하였다. 벼슬길이 막힌 지 16년 만인 영락(永樂) 무자년에 태종(太宗)이 불러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에 임명하니, 대개 그의 순진(純眞)함을 가상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지금의〉 우리 중궁(中宮)은 천보의 외손녀(外孫女)로 천보의 집에서 자랐는데, 임금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이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다. 기축년에 천보를 검교 참찬(檢校參贊)에 승진 임명하고 바로 검교 찬성(檢校贊成)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임금이 즉위하매,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치사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가 연로함으로 말미암아 치사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 87세였다. 마음 가짐이 본래 충직(忠直)하였고, 왕실의 지친(至親)이 됨에 미쳐서는 더욱 근신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다. 병이 위급하매, 아들 안수산(安壽山)이 약을 올리니, 천보가 말하기를,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느냐."하고, 소연(翛然)히 죽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를 소의(昭懿)라 하니,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이르렀다. 아들은 수산이었다.
관련근거 5.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6월 6일 壬寅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 예조 판서 정인지가 영릉 지문[소헌왕후의 묘지]을 지어 바치다
http://sillok.history.go.kr/id/WDA_12806006_002
○禮曹判書鄭麟趾製《英陵誌》以進。 其文曰: 謹按王后姓沈氏, 靑松世家。 皇曾祖諱龍, 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 皇祖諱德符, 相高麗 恭愍王, 再爲門下侍中, 至我恭靖王朝, 以議政府左政丞, 封靑城伯。 皇考諱溫。 皇妣安氏, 封三韓國大夫人,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諡昭懿公 天保之女。 以洪武乙亥九月己未, 生王后于楊州之私第。 王后生而淑婉, 維德之行。 我殿下之出閤也, 太宗大王妙選令族以求配。 永樂戊子之歲, 王后將筓, 以德以容, 乃得來嬪, 封敬淑翁主。 敬事兩宮, 篤承眷愛, 宜家之日, 正位于內, 曰慈曰儉, 致肅雍之美。 后之進退, 殿下必起立, 其見敬禮如此。 丁酉秋九月, 改封三韓國大夫人。 戊戌夏, 文武百官上書言: "儲宮不德, 請擇賢以建世子。" 太宗大王從之, 具奏于太宗文皇帝, 冊殿下爲王世子, 封王后爲敬嬪。 是年秋九月, 殿下受太宗內禪卽位, 十二月, 封后爲恭妃。 歲辛丑秋九月, 太宗文皇帝遣使特賜段絹。 自是洪熙、宣德之間, 錦段紗羅之賜累至。 歲壬子正月, 有司言: "中宮有美稱, 非古也。" 五月, 改封王妃。 后慈良聖善, 出於天性, 正位中宮之後, 益自謙謹, 禮接嬪媵, 下及宮人, 無不撫愛加恩, 後宮有進見者, 必加慰納, 若所寵引者, 特贈隆遇, 至情無間, 所生諸子, 皆令養之。 後宮亦盡心奉育, 過於己出。 又委之以事, 任之不疑, 後宮亦披誠奉順, 無敢懈怠。 由是嬪媵以下, 愛敬如待父母, 視庶出之子, 皆如所生。 御膳進則必躬自省視, 務盡誠敬, 母儀二十九年之間, 有儆戒之助, 無宴安之私。 一不爲親戚求恩, 又絶不與外事。 雖宮中日用纖細事, 必上聞, 無敢擅爲。 壼儀克正, 化流于外。 敎誨多男, 必以義方, 乃有麟趾螽斯之慶。 蓋天生聖人, 必作賢匹, 以成至治。 周之太姒, 播詠風雅, 焜耀千古, 今我殿下, 旣以至德至治, 追踵文王, 而王后又有如是之德之行, 允爲天作之合, 而文王后妃, 不獨專美於前矣。 正統丙寅三月初十日, 王后感疾, 殿下日夜臨視, 東宮以下侍側, 親奉湯藥, 凡醫療禱祀, 無所不用其極。 是月二十四日辛卯, 薨于別宮, 春秋五十二。 內而宮妾, 外而大小臣僚, 以至僕隷, 莫不痛哭。 天胡厚是懿德, 獨不壽考而至於斯歟! 嗚呼痛哉! 殿下悲其早失良佐, 不勝哀悼, 以白衣素膳, 終三十日, 降冊諡曰昭憲王后。 治英陵于獻陵之西崗, 同宮異室, 安庴于東室, 禮也。 王后誕八男二女。 元子曰 【文宗御諱】 冊封王世子, 次曰 【世祖御諱】 封首陽大君, 次曰瑢, 封安平大君, 次曰璆, 封臨瀛大君, 次曰璵, 封廣平大君, 先二年卒。 次曰瑜, 封錦城大君, 次曰琳, 封平原大君、先一年卒。 次曰琰, 封永興大君。 女長貞昭公主, 早卒。 次貞懿公主, 下嫁光德大夫安孟聃。 王世子嬪權氏, 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 生元孫及平昌郡主而早卒。 司則 楊氏生一女, 宮人張氏生一男, 鄭氏生一男, 皆幼。 首陽娶中樞院使尹璠之女, 生一男二女。 男曰崇、封桃原君〔桃源君〕 , 女皆幼。 安平娶贈議政府左議政鄭淵之女, 生二男一女。 長曰友直, 封宜春君, 餘皆幼。 臨瀛娶贈議政府右議政崔承寧之女, 生三男一女。 長曰澍, 封烏山君。 餘皆幼。 廣平娶中軍護軍申自守之女, 生一男, 幼。 錦城娶贈議政府左議政崔士康之女。 平原娶贈議政府左議政洪利用之女, 無子。 永興娶司宰副正宋復元之女。 貞懿公主生四男二女, 皆幼。
初, 麟趾具草以進。 上覽之, 謂承政院曰: "誌文, 乃後世所共見。 今王妃絶干謁之私, 有逮下之恩, 無所疑忌, 其以此意諭麟趾, 使幷載之。"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영릉(英陵) 지문(誌文)을 지어 바쳤다. 그 글에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왕후(王后)의 성은 심씨(沈氏)이니, 청송(靑松) 세가(世家)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용(龍)이니 고려(高麗)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청화 부원군(靑華府院君)이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덕부(德符)인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두 번 시중(侍中)이 되었고, 우리 공정왕(恭靖王) 때에 이르러 의정부(議政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을 봉(封)하였고, 황고(皇考)의 휘(諱)는 온(溫)이고,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諡號) 소의공(昭懿公) 천보(天保)의 딸이다. 홍무(洪武) 을해 9월 기미(己未)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왕비를 낳았다. 왕후가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婉娩)하여 오직 덕(德)을 행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출합(出閤)061) 하실 때에,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훌륭한 문족(門族)에서 뽑아 배필을 구하는데, 영락(永樂) 무자년에 왕후(王后)가 장차 계(筓)062) 하게 되자, 덕행(德行)으로 용의(容儀)로 와서 빈(嬪)이 되어, 경숙 옹주(敬淑翁主)를 봉하였고, 공경하여 양궁(兩宮)을 섬기어 두텁게 사랑을 받았다. 가실(家室)의 마땅한 날 내전(內殿)에 정위(正位)하였다. 인자하고 검소하여 엄숙하고 옹화(雍和)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 가을 9월에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고쳐 봉하였다. 무술년 여름에 문무 백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궁(儲宮)이 덕스럽지 못하니, 청컨대 어진이를 가리어 세자를 세우소서.’ 하였다. 태종 대왕께서 그대로 좇으시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 갖추 아뢰어서 전하를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고, 왕후를 봉하여 경빈(敬嬪)을 삼았다. 이해 가을 9월에 전하가 태종(太宗)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고, 12월에 왕후를 봉하여 공비(恭妃)를 삼았다. 신축년 가을 9월에 태종 문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특별히 단견(段絹)을 내리고, 이로부터 홍희(洪熙) 선덕(宣德) 사이에 금단(錦段)·사라(紗羅)의 하사(下賜)가 여러 번 이르렀다. 임자년 정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중궁(中宮)에서 아름다운 칭호가 있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라.’ 하여, 5월에 왕비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을 예(禮)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宮人)이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後宮)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庶出)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063) 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곤의(壼儀)가 심히 발라서 덕화(德化)가 밖에 흘렀으며, 여러 아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여 인지(麟趾)·종사(螽斯)의 경사가 있었다. 대개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매, 반드시 어진 배필을 지어서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이루나니, 주(周)나라의 태사(太姒)는 풍아(風雅)에 파영(播詠)되어 천고(千古)에 빛났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이미 지극한 덕과 지극한 다스림으로 문왕(文王)의 뒤를 따랐는데, 왕후께서 또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 되어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예전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정통(正統) 병인 3월 초10일에 왕후께서 병환이 드시매, 전하(殿下)께서 낮과 밤으로 임(臨)하여 보시고, 동궁(東宮) 이하가 옆에서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의료(醫療)와 기도(祈禱)에 극진한 정성을 드리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이달 24일 신묘에 별궁(別宮)에서 승하하시니, 춘추(春秋)가 52세이다. 안으로는 궁첩(宮妾)과 밖으로는 대소 신료(臣僚)에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하늘이 어찌하여 아름다운 덕은 후하게 주시고, 오직 수고(壽考)는 주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아, 슬프다. 전하께서 어진 보좌를 일찍 잃으심을 슬퍼하시어 애도(哀悼)를 이기지 못하여, 백의(白衣)와 소선(素膳)으로 30일을 마치시고, 책(冊)과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소헌 왕후(昭憲王后)라 하고,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궁(宮)은 같이 하고 실(室)은 달리 하여 동쪽 실(室)에 편안히 모시었으니, 이것은 예(禮)이다. 왕후께서 8남(男) 2녀(女)를 낳으셨는데, 맏아들은 아무 【문종(文宗)의 어휘(御諱). 】 이니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고, 다음은 아무 【세조(世祖)의 어휘(御諱). 】 이니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용(李瑢)이니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구(李璆)이니 임영 대군(臨瀛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여(李璵)이니 광평 대군(廣平大君)을 봉하였는데 2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이유(李瑜)이니 금성 대군(錦城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임(李琳)이니 평원 대군(平原大君)을 봉하였는데 1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염(琰)이니 영흥 대군(永興大君)을 봉하였고, 맏딸은 정소 공주(貞昭公主)인데 일찍 졸(卒)하였고, 다음은 정의 공주(貞懿公主)인데, 광덕 대부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왕세자빈 권씨(權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딸인데, 원손(元孫)과 평창 군주(平昌郡主)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宮人) 장씨(張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鄭氏)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수양(首陽)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崇)이니 도원군(桃源君)을 봉하고, 딸은 모두 어리다. 안평(安平)은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을 낳았는데, 맏은 우직(友直)이니 의춘군(宜春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영(臨瀛)은 증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左議政)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은 주(澍)이니 오산군(烏山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평(廣平)은 중군 호군(中軍護軍)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금성(錦城)은 증 의정부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 들었고, 평원(平原)은 증 의정부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영흥(永興)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하였다. 처음에 인지(麟趾)가 초(草)를 갖추어 올리니, 임금이 보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지문(誌文)은 후세에 함께 보는 것인데, 지금 왕비가 간청하고 알현하는 사사(私事)가 없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어,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 뜻으로 인지(麟趾)에게 일러 아울러 싣게 하라."
관련근거 6.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삼탄집(三灘集)》(1515년) 권14 / 墓誌 / 세종대왕 묘지[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a011_51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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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太宗恭定大王第三子也。 元敬王后閔氏。以 大明洪武三十年丁丑四月初十日壬辰。 誕于漢陽邸。自幼聰明絶倫。兩宮奇愛之。長封忠寧大君。性好學。雖在疾病。猶不釋卷。世子禔多失德。永樂十六年戊戌夏。群臣請廢立。 太宗以王有潛德。具奏于 太宗文皇帝。冊爲世子。秋八月。 太宗倦勤。禪位于王。遣使請命。明年己亥春正月。 帝遣使錫命爲王。繼遣使賜宴。又賜太宗宴。敕曰。王能簡賢命德。俾宗祀有托。不唯王一家之慶。且爲王一國之人慶也。歲庚子。 元敬王后不豫。避忌于外第。 王步行扶輦。至有露宿之時。及薨。哀毀踰禮。是年。設集賢殿。博選儒雅。置二十員以備顧問。壬寅夏五月。 太宗薨。致喪三年。宣德元年丙午。 宣宗皇帝賜綵幣書籍。自是寵賚頻繁。史不絶書。丁未秋。始置宗學。悉令宗室子弟受學。其諸子未就外傅者。亦敎以義方。嫡庶之間。禮嚴恩篤。人無間言。戊申冬。制朝會樂。始於大會。不用女樂。我國歲貢金銀。然非土宜。常患不給。乃遣親弟表請。朝議難之。 帝曰。朝鮮王必不欺。豈可強人所無哉。許免貢。婆猪江野人數犯邊。癸丑四月。命將討之。斥地置慶興等鎭。自麗季。咸吉道沿邊之地。爲野人所據。至是盡復舊疆。甲子。對馬一歧島倭入寇上國。又侵軼我濟州之境。 王使人諭島主。主承命。執送賊倭六十二人。於是械獻京師。 帝賜綵幣嘉獎。夫以倭奴之頑悍。屈於折札。野人之桀驁。熸於偏師。非恩信素孚而威靈遠讋。則何以得此哉。初世子禔避謗在外二十年。召還京。群臣切諫皆不納。事二兄友諸弟。極其敬愛。以至九族之親。亦皆敦睦。 王英睿冠古。輔以聖學。自卽位以來。宵旰求治。禮樂刑政。制度文爲凡先世所未遑者。皆擧而力行。酌古今文質之中。修五禮儀注。述 祖宗功德之盛。作定大業等樂。創制訓民正音。以二十八字。盡通天下言語。文字紐切之妙。人所叵測。損益累朝憲章。以成經濟六典。規模宏遠。條貫詳密。可爲萬世法程。尤洞曉天文律曆。修七政算內外篇。作諸儀象。所以授人時也。取資治通鑑諸家註釋。讎校纂輯。名曰訓義。又撰三綱行實,治平要覽等諸書。所以隆文敎厚人倫也。哀矜庶獄。則有恤刑之敎。慮民淫僻。則作戒酒之書。虛懷受諫。尊賢禮士。終 王之世。大臣無有遭刑戮者。尤重親民之職。朝臣未經守令者。不敢陞授顯秩。三十年間。吏稱其職。民安其業。朝庭淸明。四方晏如。號爲東方堯舜云。 妃昭憲王后沈氏。靑松世家。皇曾祖諱龍。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祖諱德符。相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我 恭靖王朝。爲議政府左政丞。封靑城伯。皇考諱溫。某官。皇妣安氏。領敦寧府事諡昭懿公天保之女。封三韓國大夫人。以洪武乙亥九月己未。生 王后于楊州私第。少有聰慧貞淑之德。永樂戊子歲。 后將笄。以選嬪于 王。封敬淑翁主。敬事兩宮。篤承眷愛。 后之進退。 王必起立。其見敬禮如此。丁酉秋九月。改封三韓國大夫人。 王之封世子也。進封敬嬪。及卽位。封恭妃。壬子正月。有司言 中宮有美稱非古也。改封 王妃。后正位 中宮之後。益自謙謹。禮接嬪媵。甚得歡心。後宮有進 御者。必加慰納。所生諸子。養之宮中。盡心撫育。同於己出。 御膳進則必躬自省視。宮中之事。無敢專制。大小皆稟於 上。亦未嘗爲親戚子弟求官與婚。儉以律身。慈以逮下。雞鳴進戒。述宣陰敎。配德並明。母儀一國。於戲。 世宗有文王之聖。王后石有大姒之賢。故以能致關睢之化。螽斯之慶。本支百世。祚流無極。正統十一年丙寅春三月二十四日辛卯。以疾薨于外第。春秋五十二。 王悼失良佐。以白衣素膳終三十日。夏六月。降冊諡昭憲王后。越五年庚午春二月十七日壬辰。 王亦以疾薨于別宮。春秋五十四。在位三十三年。 文宗率群臣上諡曰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廟號 世宗。又表請易名。帝遣使致祭。賜諡莊憲。初。合葬于 獻陵之西岡。以今 上殿下卽位之元年己丑春三月初六日庚寅。移葬于呂興府治之北城山南向之原。實成化五年也。 后誕八男二女。長 文宗恭順大王。景泰三年壬申五月十四日薨。次 世祖惠莊大王。成化四年九月初八日薨。次瑢。歲癸酉。謀不軌 賜死。次璆。臨瀛大君。先遷陵二月卒。次璵。廣平大君。次瑜。亦謀不軌 賜死。次琳。平原大君。與璵皆先卒。次琰。永膺大君。先遷陵二年卒。女長未䈂而卒。贈貞昭公主。次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耼。愼嬪金氏生六男。長璔。桂陽君。次玒。義昌君。次琛。密城君。次璭。翼峴君。次璋。寧海君。次璖。潭陽君。遷陵之年。唯密城在。餘皆先卒。惠嬪楊氏生三男。長𤥽。次玹。壽春君。早卒。次瑔。與𤥽以瑢黨貶死于外。淑婉李氏生一女。貞安翁主。適儀賓沈安義。尙寢宋氏生一女。貞顯翁主。適鈴川尉尹師路。宮人姜氏生一男瓔。亦以瑢黨貶死于外。 文宗顯德王后權氏。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誕一男一女。男卽魯山君。女敬惠公主。下嫁鄭悰。司則楊氏生一女。敬淑翁主。適儀賓姜子順。 世祖慈聖王妣尹氏。贈議政府左議政璠之女。誕二男一女。男長懿敬世子。早卒。次卽今 上殿下。女懿淑公主。下嫁儀賓鄭顯祖。某官朴氏生二男。長曙。德原君。次晟。昌原君。瑢娶贈左議政鄭淵之女。生二男。長友直。次友諒。皆連坐死。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生五男二女。男長澍。烏山君。次浚。龜城君。次淳。定陽君。次淨。八溪君。次澄。懽城君。女長中牟縣主。適兵曺參判居昌君愼承善。次淸河縣主。適司䆃正安友騫。側室生四男六女。男長涵。英陽副正。次潾。丹溪副正。次濯。輪山副正。次沃。玉川副正。女皆幼。廣平娶某官申自守之女。生一男。漙。永順君。瑜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生一男。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無子。永膺娶某官宋福元之女。生一女。側室生一男一女。皆幼。瓔娶密山君朴仲孫之女。無子。側室生一男。桂陽娶左議政韓確之女。生七男三女。男長澧。寧原君。次瀜。江陽君。次湜。富林都正。餘幼。女長適某官安繼宋。餘幼。側室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鄭從善。義昌娶某官金脩之女。生一男二女。男灝。蛇山君。女長適參奉辛禹鼎。次幼。𤥽娶戶曹正郞權格之女。無子。密城娶軍器副正閔承寧之女。生四男二女。男長誡。雲山君。次譡。春城君。次𧭢。遂安都正。次䛿。石陽都正。女長適某官某。次幼。壽春娶全州府尹鄭自濟之女。生一女。適某官沈順老。翼峴娶某官趙鐵山之女。生一男一女。男漬。槐山君。女幼。瑔娶朴彭年之女。寧海娶某官申允童之女。生一男一女。皆幼。貞懿公主生四男二女。男長安如獺。僉知事。次溫泉。副正。次桑雞。典籤。次貧世。參判。貞顯翁主生二男。長尹磻。僉知事。次磷。護軍。貞安翁主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崔孟思。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께서는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가 대명(大明) 홍무(洪武) 30년 정축(1397, 태조6) 4월 10일 임진일에 한양(漢陽)에 있는 집에서 낳으셨다. 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므로 양궁(兩宮)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장성해서는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병을 앓고 있는 중이라도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로 있던 제(禔)가 덕을 잃는 일이 많았다. 영락(永樂) 16년 무술(1418, 태종18) 여름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폐하기를 청하자, 태종께서 왕이 숨은덕이 있다는 이유로 사유를 갖추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에게 주문을 올려 세자로 책봉하였다. 추8월에 태종께서 정무에 싫증이 나 왕께 선위(禪位)하고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청하였다. 다음 해인 기해년(1419) 춘정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명을 내려 왕으로 삼고 이어 사신을 보내 연회를 베풀고 또 태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이 능히 어진 사람을 뽑고 덕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사(宗社)가 의탁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왕의 한 집안만의 경사가 아니라, 왕의 온 나라 사람들의 경사이다.” 하였다. 경자년(1420, 세종2)에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편찮아 외제(外第)로 비접(避接)하였는데, 왕께서는 연(輦)을 붙잡고 걸어서 따라갔으며, 노숙(露宿)하는 때도 있었다. 훙함에 미쳐서는 애통해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하였다. 이해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널리 유학자를 선발하여 20원(員)을 두고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임인년(1422, 세종4) 하5월에 태종께서 훙하였다. 3년 동안 상제(喪制)를 지켰다. 선덕(宣德) 원년 병오(1426)에 선종황제(宣宗皇帝)께서 채폐(綵幣)와 서적을 하사하였으며, 이로부터 총애하여 물품을 보내는 일이 빈번해져 역사서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정미년(1427) 가을에 비로소 종학(宗學)을 설치하고는 종실(宗室)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수학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 가운데 바깥의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지 않는 자들 역시 의방(義方)으로 가르쳤다. 적서(嫡庶) 사이에 예는 엄하면서도 은혜는 도탑게 하여 비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무신년(1428) 겨울에 조회(朝會)할 때의 음악을 제정하여 비로소 대회(大會)에서 연주하면서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중국에 금과 은을 공물로 바쳤는데, 토산(土産)이 아니어서 항상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걱정이 있었다. 이에 친동생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고쳐 줄 것을 청하니, 중국 조정의 의논이 허락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황제께서 말하기를 “조선의 왕은 반드시 속이지 않을 것이다. 어찌 없는 것을 올리라고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금과 은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들이 자주 우리의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는데, 계축년(1433, 세종15) 4월에 장수에게 명해 토벌하게 하여 땅을 넓히고서 경흥진(慶興鎭) 등의 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말부터 함길도(咸吉道) 연변(沿邊) 지역을 야인들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갑자년(1444)에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의 왜인들이 상국(上國)에 들어가서 노략질을 하였으며, 또 우리나라 제주(濟州)의 지경을 침범하였는데, 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도주(島主)에게 유시하자, 도주가 명을 받들어 노략질을 한 왜놈 62명을 잡아 보내었다. 이에 이들을 묶어서 경사(京師)에 바치니, 황제께서 채폐를 하사하면서 가상히 여겼다. 무릇 완악하고 드센 왜노(倭奴)들조차도 짤막한 서찰에 몸을 굽혔으며, 사납고 거친 야인들조차도 작은 군대에 기가 꺾였으니, 은혜와 신의가 평소에 미덥고 위엄과 위령이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전에 세자 제(禔)가 비방을 피하여 외방으로 나가 있은 지 20년이나 되어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간절하게 간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동생들에게 우애롭게 대하여 공경하고 사랑함을 극도로 하였으며, 구족(九族)의 친족들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도탑고 화목하게 대해 주었다. 왕께서는 영특하고 지혜롭기가 고금에 으뜸인 데다가 성학(聖學)으로 보충하였다. 즉위한 뒤로부터 소간(宵旰)하면서 다스림을 구해 예악(禮樂)과 형정(刑政), 제도(制度)와 문위(文爲) 등 선대에 미처 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모두 힘써 거행하였다. 고금(古今)의 문질(文質)의 적당한 것을 참작하여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찬수하고,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의 성대함을 찬술하여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만들었다. 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28자로써 천하의 언어를 모두 통하였는데, 문자의 유절(紐切)의 묘함은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바였다. 또 여러 대에 걸친 헌장(憲章)의 좋고 나쁜 점을 따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완성하였는데, 규모가 굉대하고 심원하며 조관(條貫)이 상세하고 치밀하여 만대의 법이 될 만하였다. 특히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대해서 환히 깨달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찬수하였으며, 여러 의상(儀象)을 만들어서 농사지을 때를 알려 주었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한 여러 사가(史家)의 주석(註釋)을 가져다가 수교(讐校)하여 찬집하고는 이름을 《훈의(訓義)》라고 하였다. 또 《삼강행실(三綱行實)》과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서책을 찬하였는데, 문교(文敎)를 융숭히 하고 인륜(人倫)을 도탑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옥(庶獄)을 애처롭게 보고 불쌍히 여겨 휼형(恤刑)하는 전교를 내렸으며, 백성들의 음탕하고 편벽됨을 염려하여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왕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였으며, 어진 이를 존숭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다. 이에 왕의 치세가 다하도록 대신 가운데에는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없었다. 특히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관직을 중하게 여겨 조정 신하 가운데에서 수령의 직을 거치지 않은 자는 감히 높은 직질에 오를 수가 없었다. 30년 동안 관리들은 그 직에 걸맞았고, 백성들은 자신의 생업에 편안하였으며, 조정은 청명하고 사방은 평온해 동방(東方)의 요순(堯舜)이라고 불렸다.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세가(世家)이다. 황증조고(皇曾祖考)의 휘는 룡(龍)으로,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조고(皇祖考)의 휘는 덕부(德符)로,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내 두 차례나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우리 공정왕(恭靖王)의 조정에서는 의정부 좌의정을 지내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황고(皇考)의 휘는 온(溫)으로 아무 관직을 지냈다.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소의공(昭懿公)의 시호를 받은 안천보(安天保)의 따님으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홍무(洪武) 을해년(1395, 태조4) 9월 기미일에 양주(楊州)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왕비를 낳았다. 왕비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곧고 맑은 덕이 있었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8)에 후(后)가 계례(笄禮)를 올리고서 선발에 뽑혀 왕의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는데, 양궁(兩宮)을 공경히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후가 들어오고 나아갈 때에는 왕께서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났는바, 공경스럽게 예우함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1417) 추9월에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호(封號)가 고쳐졌다. 왕께서 세자로 책봉되자 경빈(敬嬪)으로 봉호가 올라갔으며, 즉위하자 공비(恭妃)에 봉해졌다. 임자년(1432, 세종14) 1월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중궁(中宮)에 미칭(美稱)이 있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왕비로 봉호가 고쳐졌다. 왕후께서는 중궁에서 위(位)를 바로 한 뒤에는 더욱더 스스로 겸손하고 삼가면서 빈첩(嬪妾)들을 예로 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크게 얻었다. 후궁 가운에 진어(進御)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위로하면서 받아들였으며, 후궁이 낳은 여러 아들을 궁중 안에서 기르면서 모두 어루만져 주기를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같이 하였다. 어선(御膳)을 올릴 경우에는 반드시 몸소 살펴보았으며, 궁중의 일을 감히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위에 여쭈어 결정하였다. 또한 일찍이 친척의 자제들을 위하여 관직을 구해 주거나 혼처를 구해 주지 않았다. 검소함으로써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였으며, 인자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거느렸다. 첫닭이 울 적에 나아가 경계하여 음교(陰敎)를 펴서 부인의 덕이 아울러 밝아 온 나라 어머니들의 모범이 되었다. 아, 아름답다. 세종께서는 문왕(文王)의 거룩함이 있었고, 왕후께서는 태사(太姒)의 어짊이 있었으므로, 능히 〈관저(關雎)〉의 교화와 〈종사(螽斯)〉의 경사를 이루어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대토록 전해지고 국조(國祚)가 끝없이 이어지게 할 수 있었다. 정통(正統) 11년 병인(1446, 세종28) 춘3월 24일 신묘일에 외제(外第)에서 병으로 훙하니, 춘추는 52세였다. 왕께서는 어진 배필을 잃은 데 대해 애도하여 흰옷을 입고 소선(素膳)을 하면서 30일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하6월에 책명(冊命)하여 소헌왕후(昭憲王后)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경오년(1450) 춘2월 17일 임진일에 왕께서도 별궁(別宮)에서 병으로 훙하시니, 춘추는 54세였으며, 재위는 33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시호를 올려 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고 하였으며,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또 중국에 표문을 올려 시호를 청하자,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장헌(莊憲)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헌릉(獻陵)의 서쪽 등성이에 합장하였다가 금상 전하(今上殿下)께서 즉위한 원년 기축(1469, 예종1) 춘3월 6일 경인일에 여흥부(驪興府) 치소의 북성산(北城山)에 있는 남향의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니, 실로 성화(成化) 5년의 일이었다. 왕후께서는 8남 2녀를 낳으셨다. 장남은 문종 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으로 경태(景泰) 3년 임신(1452, 문종2) 5월 14일에 훙하였다. 차남은 세조 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으로 성화(成化) 4년(1468, 세조14) 9월 8일에 훙하였다. 삼남은 용(瑢)으로 계유년(1453, 단종1)에 불궤(不軌)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사남은 구(璆)로 임영대군(臨瀛大君)인데, 천릉(遷陵)하기 전인 2월에 졸하였다. 오남은 여(璵)로 광평대군(廣平大君)이다. 육남은 유(瑜)로 역시 불궤를 도모하다가 사사되었다. 칠남은 림(琳)으로 평원대군(平原大君)인데, 여(璵)와 더불어 모두 먼저 졸하였다. 팔남은 염(琰)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인데, 천릉하기 2년 전에 졸하였다. 장녀는 계례(笄禮)를 올리기 전에 졸하여 정소공주(貞昭公主)에 추증되었다. 차녀는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耼)에게 시집갔다. 신빈(愼嬪) 김씨(金氏)는 6남을 낳았다. 장남은 증(璔)으로 계양군(桂陽君)이다. 차남은 공(玒)으로 의창군(義昌君)이다. 삼남은 침(琛)으로 밀성군(密城君)이다. 사남은 곤(璭)으로 익현군(翼峴君)이다. 오남은 장(璋)으로 영해군(寧海君)이다. 육남은 거(璖)로 담양군(潭陽君)이다. 천릉하던 해에는 오직 밀성군만 살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먼저 졸하였다. 혜빈(惠嬪) 양씨(楊氏)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어(𤥽)이다. 차남은 현(玹)으로 수춘군(壽春君)인데, 일찍 졸하였다. 삼남은 천(瑔)으로 어(𤥽)와 함께 용(瑢)의 당파로 유배를 갔다가 외방에서 죽었다. 숙원(淑媛) 이씨(李氏)는 1녀를 두었는데, 정안옹주(貞安翁主)로, 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에게 시집갔다. 상침(尙寢) 송씨(宋氏)는 1녀를 두었는데, 정현옹주(貞顯翁主)로,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시집갔다. 궁인(宮人) 강씨(姜氏)는 1남을 두었는데, 영(瓔)으로, 역시 용(瑢)의 당파로 유배를 갔다가 외방에서 죽었다. 문종의 비(妃)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인데,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권전(權專)의 따님이며, 1남 1녀를 낳으셨다. 아들은 바로 노산군(魯山君)이다.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다.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1녀를 낳았는데, 경숙옹주(敬淑翁主)로, 의빈 강자순(姜子順)에게 시집갔다. 세조의 비는 자성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인데,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윤번(尹璠)의 따님이며, 2남 1녀를 낳으셨다.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는 일찍 졸하였다. 차남은 바로 금상 전하(今上殿下)이다. 딸 의숙공주(懿淑公主)는 의빈 정현조(鄭顯祖)에게 시집갔다. 모관(某官) 박씨(朴氏)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서(曙)는 덕원군(德原君)이다. 차남 성(晟)은 창원군(昌原君)이다. 용(瑢)은 좌의정에 추증된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우직(友直)이고, 차남은 우량(友諒)인데, 모두 죄에 연좌되어 죽었다. 임영대군은 우의정 최승녕(崔承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주(澍)는 오산군(烏山君)이다. 차남 준(浚)은 구성군(龜城君)이다. 삼남 순(淳)은 정양군(定陽君)이다. 사남 정(淨)은 팔계군(八溪君)이다. 오남 징(澄)은 환성군(懽城君)이다. 장녀는 중모현주(中牟縣主)로, 병조 참판 거창군(居昌君) 신승선(愼承善)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청하현주(淸河縣主)로, 사도시 정(司䆃寺正) 안우건(安友騫)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4남 6녀를 두었다. 장남 함(涵)은 영양부정(英陽副正)이다. 차남 린(潾)은 단계부정(丹溪副正)이다. 삼남 탁(濯)은 윤산부정(輪山副正)이다. 사남 옥(沃)은 옥천부정(玉川副正)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광평대군은 모관(某官) 신자수(申自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아들 보(溥)는 영순군(永順君)이다. 유(瑜)는 좌의정에 추증된 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평원대군은 좌의정에 추증된 홍이용(洪利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대군은 모관(某官) 송복원(宋福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으며, 또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영(瓔)은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으며, 측실에게서 1남을 두었다. 계양군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풍(澧)은 영원군(寧原君)이다. 차남 융(瀜)은 강양군(江陽君)이다. 삼남 식(湜)은 부림도정(富林都正)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장녀는 모관(某官) 안계송(安繼宋)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또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어리며, 딸은 모관 정종선(鄭從善)에게 시집갔다. 의창군은 모관 김수(金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호(灝)는 사산군(蛇山君)이며, 장녀는 참봉 신우정(辛禹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직 어리다. 어(𤥽)는 호조 정랑 권격(權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다. 밀성군은 군기시 부정 민승녕(閔承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계(誡)는 운산군(雲山君)이다. 차남 당(譡)은 춘성군(春城君)이다. 삼남 상(𧭢)은 수안도정(遂安都正)이다. 사남 격(䛿)은 석양도정(石陽都正)이다. 장녀는 모관 아무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수춘군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정자제(鄭自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모관 심순로(沈順老)에게 시집갔다. 익현군은 모관 조철산(趙鐵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지(漬)는 괴산군(槐山君)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천(瑔)은 박팽년(朴彭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영해군은 모관 신윤동(申允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정의공주(貞懿公主)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안여달(安如獺)은 첨지사(僉知事)이고, 차남 안온천(安溫泉)은 부정(副正)이고, 삼남 안상계(安桑雞)는 전첨(典籤)이고, 사남 안빈세(安貧世)는 참판(參判)이다. 정현옹주(貞顯翁主)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반(尹磻)은 첨지사(僉知事)이고, 차남 윤린(尹磷)은 호군(護軍)이다. 정안옹주(貞安翁主)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딸은 모관 최맹사(崔孟思)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