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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수염귀뚜라미의 기억 - 고형렬
옥수수수염귀뚜라미
80층 승강기 아래로 내려갈 땐 잠잠하다
울음을 뚝 멈추고 승강기가 기계음을 듣는다
첨단이 아닌 이런 것들이 기척할 때가 있다
수염귀뚜라미는 철봉대 근처에 있다
기계음은 그의 풀잎 가슴속으로 들어가
해마에서처럼 사라진다
해마에 기억의 흔적은 물방울 먼지처럼 남는다
소리는 사라지고 벌써 있지 않다
80층 체인이 출렁이는 소리가 벽 속에서 들린다
기술은 그 소리를 감추려고 혼신을 바친다
내 문신 같은 얼굴이 센서에 비치면
문은 비서처럼 얼른 옆으로 열린다 그리고
곁에 서서 내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나가지 않으면 문은 계속 심리처럼 서 있는다
그때 햇빛이 내 파란 핏줄 손등에 닿는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 늦여름 매미처럼
나는 갑자기 미열의 아득함으로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잡는다 가을 구름 하나
아파트 뒷산 위에 떠서 불타고 있다
마지막 불 칸나가 화려하게 단장했어라,
수염귀뚜라미 하나 내 허파 꽈리에 초기 암처럼
마지막 광선 속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옥수수수염귀뚜라미
비정치적 남양주시 - 고형렬
나는 가끔 남양주시 이 메인도로를 통과했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런 문장은 맞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이 안 되는 문장을 계속 만들려고 한다
나는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
결코 모른다는 생각, 나는 이 이상한 생각에 막힌다
어느 시민도 이 모름을 눈치 채지 못한다
나는 오늘 정오의 햇살의 남양주시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남양주시의 정오의 햇살을 밀치고 장님의
남양주시가 되려 한다 마른 햇살의 남양주시 정오!
생각만 해도 개체의 죽음과 삶을 훌쩍 뛰어넘는 듯
시청 앞에 국화, 눈구름 냉기 알알한 늦가을
슬픔과 기다림의 감정이 삭은 남양주시의 가을 정오
하지만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
자신이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르고 통과하고 있다
나와 말은 절망 속에 햇살을 잡고 의문을 시작한다
남양주시를 방문한 나를 모르는 장님의 남양주시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에 있음을 나는 아슬아슬하게 믿어
그 소란한 가을빛과 언어의 남양주 시를 빠져나간다
이 통과는 너무나 눈부셔, 차를 노변에 세우지만
남양주시는 가을 하늘 밑에 혼자 불타고 있다
할 말도 아주 없는, 가을도 모르는 나의 가을 남양주시
나도 남양주시가 되어가는 가을의 남쪽 남양주시
그대여 아는가 알 길 없는 내 마음의 이 가을의 언어가
오늘도 남양주시가 모르는 남양주시를 통과하고 있다
서서 별을 사진 찍다 - 고형렬
-카메라와 나무의 12월 31일
이 지상의 마지막 저녁 해가 지고, 이 시를 발표할 땐
과거형으로 고쳐야할까? 서쪽 하늘을 쳐다보는 이곳은
지구의 북반구 극동 반대편보다 이미 일몰을 맞는
서울 동쪽 작은 구릉,
정치와 시는 언제나 맞은편에서 미래의 이곳을 본다
나는 순간, 이 나라를 입에 담고 싶지는 않아졌다
고, 말하고 사진기를 어루만진다
매일 별을 보는 비정치적 천체물리학자가 아니지만
매일 말을 쓰러뜨리는 비천문학적 정치인도 아니지만
쉿, 조용 카메라를 별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
아비는 어둠에서, 걸레가 된 시간을 주워담는다
카메라가 별빛을 상대하면 가난한 일몰에 불과함을
비켜선 지상의 단 하나 소형카메라
배나무 쪽에 가까운 작은 나의 구석방 서쪽 벽
하늘은 허공의 피사체, 젊고 아름다운 모델
궤도를 지나가는 위성의 창 같아, 저녁 하늘은 순하다
서로 허공의 포즈를 취해준다
한 해의 마지막 눈을 씻는 초저녁 新星이다, 봐 초점을
초점은 초점에게 뭐라 속삭이잖아! 공기는 얼지 않아
저녁의 저 첫 별을 어둠 속 공기 책자에 새겨두어라
마당에 서서 반짝이는 궁륭의 별을 사진 찍을 테니!
카메라 눈동자는 찰칵, 영하 3도?
그 별과 달의 빛이 셔터의 걸림에 놀람과 동시에
상자 속 너의 알몸 부서지지 않아 광속으로 뛰어든다
서로 피해 검게 찍힌 흑백의 공기와 시간의 흔적
삼만 년, 만에 돌아온 저쪽 여름의 우리은하처럼
현실의 렌즈를 굴절하는 아픔이 아닐지라도
찰칵, 찰칵......지문은 대기를 끊는다, 기침하는 빛이
잘려들어온 별이 카메라 속에 오도독 떨고 있다
한낱 인화지에 남겨지며 정치에 관심이 사라지더라도
혼자 아슬한 그 옛날 같은 초저녁 뜰
뿔이 자라나오는 태초의 기척을 고막의 뿔은 듣는다
어떤 미래보다 깊고 먼, 신성한 남색 하늘의 메타포,
어느 해 12월 31일을 넘지지 못하게 되더라도
훗날, 이 카메라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저녁을 지구의 한 그루 나무 보고 있었던 일
수박 - 고형렬
이상하다, 이번에는 수박이다. 줄기가 기어간다. 줄기가 어둠바닥까지 기어나갔다. 그 끝은, 가끔 개의 앞발이 돌무덤을 파던 곳. 굼벵이와 나비들이 몰래 노는 곳
어둠과 볕이 가까운, 눈멀기 쉬운 경계의 도로표지판이 서 있는 앞쪽,
그곳이 이 수박밭의 끝이다.
문득 수박줄기는 포복을 멈췄다,
더 갈까? 순이 뒤돌아본다. 참 오래 한 일이지만 무작정 간다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을 안다. 잎에 가린 뿌리 쪽이 보이지 않는다. 둥지를 틀고 머리를 감아올린다. 저쪽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 들린다. 두더지가 줄기라도 물어뜯는 날엔 끝장이다. 식물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수박의 눈은 멀리 뻗어나온 귀여운 줄기 끝,
줄기 밑으론 마디가 있어, 실뿌리 마디는 땅내를 맡고. 오직 수원은 저 대한민국 양평 이 수박밭이다. 거기서만 물을 대준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태양이 하늘에 있는 법. 낮의 태양에 대해서 말해 뭘 할까, 그러나 수박은 태양 하나만 믿지 않는다.
그것이 제일 좋은 자율성
그러니까 이번에는 수박으로 태어났다,
뿌리는 깊지 않으나 표토의 모든 양분을 비로 쓸듯 가져간다, 퇴비, 죽은 벌레, 쇠똥, 계분. 수박이 좋아하는 이름들은 만나면 뒤섞인다.
이렇게 수박도 수박을 기르다 정이 들어, 수박밭은 골라지고 말문이 열린다.
이 평화 속에서 수박은 햇살을 수분에 섞어 당분을 만든다. 절묘한 기술
수박밭을 기웃대는 옥수수는 내년엔 수박이고 싶은 얼굴. 식물도 윤회하지만, 글쎄 아무나 수박이 되는 건 아닐 테지. 수박도 모르는 일이 있어, 내년엔 어디로 건너갈까?
그러나 이 밭은 내년에도 수박밭일 확률이 높다.
어림잡아 이 둑 너머는 옥수수밭. 내년에도 이 근처 어디서 우리는, 지금처럼 수박이든 옥수수든 황금땀방울
비가 올 것 같다. 주인이 삽을 들고 나온다. 수로를 낼 모양이다. 수박은 다 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수박은 늑대새끼들처럼 돌아다니며 아무데서나 사냥하고 새끼 치지 않았으니까.
눈 내리는 겨울, 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끔 궁금해 출출할 때 있지만,
수박은 평범한 다년생이 아니다. 녹색의 천둥 번개를 찍으며 한여름만 살다 가는 일년초다.
저 깊은 곳, 비밀 백화점에서 - 고형렬
그 여자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숨쉬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나의 숨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숨소리에 모든 남자는 폭력을 사용하고 그 폭력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극히 단순한 결과를 선택했는지
복잡한 과정은 여성소비자들에겐 금물
캄캄한 터널 속을 달려가는 무호흡 쇠의 발한증
기수가 검고 탐스런 경마의 두툼한 엉덩이를 채찍으로 내리쳤다
철썩, 달라붙는 채찍 자국에 피가 모였다 광속처럼 흩어진다
어둠속에서 피 흘리며 질주하는 천마의 숨소리가 절규한다
숨구멍 속에 돋아난 검은 털들이 안으로 휘어져 빨려들어간다
그후, 여자가 나의 숨소리를 듣는다면 나를 불러 추잡한 사랑을
강매할 것이다 여자를 욕망하게 하는 것은 저 백화점의 불빛들
그 여자는 결코 자신이 어디서 숨쉬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폐습으로 발전하는 터널 속의 발한증처럼
한번 불러본 송장의 노래 - 고형렬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사는 나, 송장에 빌붙어 잠자는 자
송장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바치는 나
송장을 업고 다니는 자들, 대대로 송장을 따라다니는 가문
쥐가 되었다, 새가 되었다 변신하는 자들
송장의 송장들, 송장뼈의 송장뼈들
대퇴골이며 다리뼈며 복사뼈며 두개골이며 손뼈며
척추며 이백 여개 괴상한 돌출의 뼈들, 뼈들
혼란스런 존재들, 불가사의한 구조, 천변만화天變萬化의 아름다움
지금은 인간인 존재들, 잠시만 인간인 존재들, 의 책 같은
고단한 죽음이 꿈을 꾸는 자들, 저 문명 바깥의
페이지가 다 붙어버린 절어 붙어 커버 같은
돼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지, 벌레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 걸
돌이나 쇠붙이처럼, 인간들은
그런 인간들은 하지만, 화려한 변신을 돌리는 회전부채의 존재들
마술의 거짓말도, 도시 냄새를 풍기는
돌아도 돌아도 더 새로워져, 무난히 낡지 않는
무한궤도 같은, 죽어 새로 태어나는 존재들, 몸을 바꾸는 이상한
존재들, 원래부터 그랬던 이름들 나, 그들
인간, 그것의 사이에 있는 인간들
형상의 껍데기를 찾아 자신의 몸을 끼우고 송장을 허파 속에 거는
거지 생명들, 거지 행적들, 거짓 진실들, 거짓 실재들의 현실, 거리
어둠의 횡단보도를 절뚝이는 외투外套 속의 남자
이것만이 의심할 수 없는 나, 통괘한 나, 나
저 자연의 여여함이 얼마나 싫증나고 아름다운가
죽음은 이런 꿈을 망각으로 처리하기 위한 게임임을 인정했다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돌아와, 평생 같이 잠잘 꿈 꾸는,
곤한 자들
우리집 전신거울 여자 - 고형렬
우리 집에 낯익은 한 여자가 계속 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 여자의 근원을 모른다
그 여자의 커다란 거울 한 채가 집에 서 있다 여자가 우리 집에 올 때 사온 전신거울이다
여자는 그 거울 앞에 가서 거울을 본다 전신거울 속엔 여자의 전신을 다 비춘다
이 거울은 자신의 얼굴을 맞춰보는 영혼의 집, 가족은 모두 저 평면거울에서 태어났다
해 뜰 때 거울의 눈부심은 헤드라이트 같아 여자는 거울 앞에서 자기 비밀을 확인한다
여자는 거울 앞에서 항상 뭘 꿰매는 것 같았다 매일 손의 솔기가 터졌던 모양이다
여자가 본질을 아는 것은 재미없다 여자가 길을 찾는다는 것도 합당한 표현이 못된다
우리집 전신 거울은 한 여자의 육체, 이 낯선 여자는 결코 길을 찾은 적이 없었다
과연 전신 거울 뒤엔 무엇이 숨어 있는가, 어느 날부턴 거울에 반점이 돋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그 여자로 지칭이 변경되었지만 결국 그 점과 점 사이도 점이 되고 말았다
그 여자는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우리 집안의 전신거울 속의 거실처럼
거실을 지나다니는 가족들의 한낮의 발처럼 우리집엔 전신거울 한 채가 서 있다
( '애지' 2009년 봄호 )
들에서 마지막 떠나는 것들
- 정미가 끝난 날
고형렬
염하시어 떠나시려 하는가, 시간의 탈곡이 끝난 동천
저 둥근 포장 속엔 나의 꿈도 한 올 잠 들었으리
우리를 번쩍 말아 올려 저 높은 지구 위에 올려놓았네
차라리 누구라 삶이 부럽기만 할 것인가
몇 겹을 꽁꽁 묶은 눈부신 유백색 비닐 속에,
늦가을 가랑비는 내리는 가운데 길은 젖고 산도 젖고
쉰 목소리 바스락, 굴뚝 연기만 젖지 않는다
이제사 망각의 강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도 된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니므로, 문득 돌아올 길이 있기에
우리를 기다리는 건 한없이 부드러운 어금니의 반추
사람으로만 말로만 또 만나는 생이 아니기에
영원히 떠나는 것 같지만, 우리는 달리 만날 것이네
가븐하게 떠나시는군, 차를 타고 붕 둥근 흰 구름처럼
실은 나도 저들처럼 떠나길 꿈꾸며 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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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시골 송현리는 오늘 담천이다. 가는 늦가을 비가 조금, 내리다 멎다, 내린다.
이걸 세우라고도 한다. 재미있고 즐겁기도 하다. 텅 빈 들판에 짚을 싼 백색의 둥근 포장.
허허롭게 뒹굴고 있다. 들어가 안아보니 한아름이 넘는다. 삶은 어리석고 힘든 일이다.
그 시간을 만나 오늘은 같이 한잔 하면서 하루를 허비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꿈을 잊지
않고 타박타박 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우산 밑에 2호집이 멀리 보인다.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오후, 고형렬
달개비들의 여름 청각
고형렬
낮달 아래 손 잘려 도회로 팔려 나간
둑 아래 청미나리 자랐던 무논 둑에 무리지었다
여름을 건너가던 달개비들이 물소리를 듣고 있다, 덩굴져
먼 저수지에서 해갈 방류를 하면
달개비들이 눈을 뜨고 꽃도 피우지 않고 물을 기다린다
차르르 차르르 한 번씩 꿀꺽, 물을 끊는 소리
온통 달개비들이 넌출거리는 물 마시는 물소리 듣는다
푸르르 푸르르 진저리치고 온 머리를 흔들어대며
헉, 헉 저 물달개비들이 얼굴을 묻는 여름 개울둑 아래
자신들의 날갯죽지 속으로 숨어든다 부끄러운 듯
물을 튀기며 물속 흰 자갈들 밟고 튀는 햇살들
떨어질 듯 고개 깊이 숙이고, 해갈 속에 일제히 주먹을 쥐듯
그만 보라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큰 화개 위의
연하늘색 꽃총상들 눈 감고 꽃잎을 묶는다
조용히 있어야 집중되고 물이 올라온다는 걸 안 풀줄기들
물소리, 아 물달개비들 날갯소리, 여름의 물 아우성
고무판 노란 오리발갈퀴가 뒤로 회똑 뒤집히면서 앗
몸이 출렁여, 온 태양의 들판엔 물질이 한창이다
햇살 속에 입맛을 돋우는 푸른 혓바닥 달개비 발바닥
청각에 풀을 들이고 마디 푸릇한 달개비 생을 추억할 적에
달개비들 청각은 녹색 시각에서 피어난다
물마디 굵도록 기갈 속에서만 네 동그란 입술은 통통해져
달개비들 넋 놓고 물을 먹는다, 독한 초록의 뿌리들
양가죽 빛의 목덜미를 하얗게 내놓고
- <시에> 2009. 봄호
여 름 - 고 형 렬
뺨싸귀가 예쁜, 여름을 나는 낯익은 제비
폭양이 잘린 처마 안쪽 빨랫줄에 앉는다
하얀 배와 검은 등은 순결하기만 하다
폭양이 제비를 범하지 못하는 한여름 낮
먼 산이 더위를 먹는 짙푸른 녹음 속에서
어린 그녀는 나의 눈길을 한껏 즐긴다
가뭄 홍수 하늘에 가득해도 두렵지 않아
네가 취하는 휴식은 한이 없이 서늘하다
러닝셔츠 바람으로 방바닥에 누워 쳐다본다
끊임없이 깨무는 꽈리 소리가 희디희다
바늘구멍 속의 낙타
고형렬
나는 지금 바늘구멍 속을 지나가고 있다
지겨운 머리통은 겨우 빠져나왔는데
어깨가 통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쌍봉낙타는 바늘구멍 속에 걸려 있다
지독한 비극은 해학이 되고 말았다
이 바늘은 이번에 운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내 운명처럼 내 몸을 통과시키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바늘을 질질 끌고 간다
바늘이 목과 허리를 마구 찔러댄다
밖을 내다본다 구름이 한가롭다 지구가
이처럼 맑은 가을을 만들 때가 있다
한글이 만들어지던 조선 초기나 당대나 마찬가지
바늘구멍을 빠져가난 바람들이
신들의 양식이던 화강암 흰돌을 우물우물 먹고 있다
또 한쪽 어깨가 빠지지 않는다
눈알도 귀도 입도 손도 다 빠져나왔는데
내 뒤에 있는 이 어깨가 나오지 않는다
울불퉁한 쌍봉낙타가 더럽게 바늘에 걸려 있다
처음 나의 목표는 전방 일 킬로미터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바늘에 걸려 살 것이다
다 살고 나면 바늘만 그 자리에 남을 것
이 바늘구멍이 내 몸이 걸렸던 곳
이 사실을 누구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죽음도 생각하며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나는 목걸이처럼 바늘을 목에 걸고 저 길을 걸었다
보게 나의 이 기막힌 바늘 목걸이를
엉거주춤 바늘구멍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를
나는 지금 바늘구멍에 걸려 있다
- 계간 <시인세계> 2007.겨울호
현관을 들여다보다 - 고형렬
인간은 벽을 만드는 존재
벽을 만들지 않고 침대를 놓을 수 없는 존재
벽 안 바닥에 식탁을 준비해야 하는 존재
어떻게 저 벽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직각의 벽을 타고 오르면 거기
지붕이 있는 저 미로를 인간은 어떻게 발견하고
설계했을까 내가 이 벽을 타고 그대에게
갈 수 없다는 걸 언제 알았을까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존재이유는
오직 방 만드는 일뿐이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한 상상이 벽의 한계를
새롭게 열어준다, 몽골의 아침 첫추위 속에서
나는 인간의 벽을 보고 서 있다
벽 앞에서 나는 앞뒤로 열리는 두 짝의
투명한 출입문을 들여다보자
낯선 인간이 그 유리문을 밀치고 빠져나온다
아주 오래된, 피곤한 짜증스런 얼굴
저 안에 대체 어떤 통로와 방이 있는 걸까
벽 안쪽 벽에는 인간의 무엇들이 걸려 있을까
나는 지금 이 의문에 사로잡혀
영원히 그 문 앞에 서 있는 다른 한 존재
아직 돌아오지 않는 존재
음악을 죽인 거리 - 고형렬
오래된 순간 이었다.
음악상자가 길바닥에 떨어진 것은
치아교정이 부서지고 옷이 찢어졌다 하체가 해체됐다
보청기 모양의 아기, 고무타이어에 으깨지고
모든 기능은 멈추었다
그녀의 귓구멍만한 레시버, 생의 거짓이 도로에 누웠다
바리케이트 너머 사이렌을 울어도
환한 열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보두 폈다 마디에 그녀의
힘이 빠져나가는 도심
흩어진 머릿결 속에서 빨간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고
한 마리, 피의 줄기 같은 우스꽝스런
음악이 죽은 거리는 갑자기 어느 생의 아침이 딱 멈춘 텅빈, 비현실도로
나는 매일 그녀가 죽은 그 자리를 피해 건넌다
마치 펭귄이 남극에서 달로 건너듯
왼쪽 빰과 오른쪽 귀에 음악이 파닥이는 오전 8시
한 여자가 아스팔트에 작은 코를 박고
쓰러져 울고 있다.
지하 천호역 화장실 - 고형렬
추웠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섰다 찡한 두통이 왔다 변기에서
아 이 지겨운 슬픔의 성욕과 살기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여기엔 남아 있었다
지린내가 콧속을 찔러 분기 탱천했다, 일부 슬픔이 얼었다
첫겨울 화장실에서 얼마 만에 맡는 서울 내
이놈 저놈 놓고 뛰어가 버린 아침
괴춤에 대강 넣고 촘촘히 사라져간 노폐물이다
오늘은 왠지 겨울 자라가 된 적막하고 썰렁한,
요가 약 냄새가 남고 숙취 붙는 이상야릇한 화장실의
그 악취가 달았다
배출하는 요 양만큼 체온만큼 몸이 열리는 지렁이만한 살 구멍
천호동 현대백화점 6번 출구로 가다가 얼른 들춘 추위
때 낀 귀에지 같은 변기 요도의 머나먼 길을 찾아온
2005년식 화장실, 암모니아 내
신장과 핏줄과 오줌길로 이어지는 저 난로를 놓은 화장실에서
나는 무변을 맛본다 짜릿한 살이 떨리는 변기 앞
혀를 자르고 밸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귓바람이라도 막겠다고 코트 깃을 세우고 사라지는 사람들
요도 끝이 아팠다, 아내여
고니 발을 보다 - 고형렬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눈둑을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마른
풀 하나 건들지 않는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작은 발가락들이 일제히 오므
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반짝이는
그 사이로 눈발이 영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게는 그들의 집은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
끝없이 눈들이 붐비는 하늘 속
고니들은 눈송이도 건들지 않는다
시 속의 고니로부터 나는 두루미의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
도 무방할 것이다.
이 시의 성감대는 "과연 나는/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 속에 있다고 나는 읽는다. 이런 어이없는,
물음 같지 않은 물음, 그러나 이런 물음 위에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인
다워지는 물음에 직면하면서, 길고 가는 다리와 기품 있는 상부로 이루
어진 이 새에 대한 우리의 무감동해진 앎들과 인지의 형식은 충격을 받
는다. 그들의 다리가 오르내려짐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섬세한 애무처
럼 황홀하며,"그들의 집은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고 여기는
마음은 읽는 이를 서늘하게 한다. /김사인
그대 원적(圓寂)을 아시나?
우리 마음에는 따로
원적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너는 너무 먼 곳에 갔다 왔다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몰랐다 가슴 쓰린 새벽빛도 겪고 핏빛도 보고 부모 형제, 아내 자식도 만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갔다 무사히 돌아왔다 갔다 그곳에 너무 충실해 그곳 밖에 다른 곳이 없는 줄 알기 시작할 무렵 지구만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을 믿는다 하지만 원적이 있다 이것을 말하긴 쉽지 않다 너도 이 궁륭을 망각할 위험이 다분하다 일생 한번 몸을 찢고 알을 낳고 죽는 연어처럼 알고 보면 당연하겠지 네가 입고 다니는 옷 같은 원적, 한때 이 비밀을 아는 자들만 친구였다 그 친구들의 몸도 다 그곳에선 소지품처럼 불타거나 땅에 묻히지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원적 멀리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아무래도 돌아와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라도 돌아와야 하는 까닭과 흔적이 여기 있다는 것
어쩔 건가, 사실은 그것 그것뿐인걸
* 시작 노트
사람마다 일생의 화두가 있기 마련이다. 이 화두가 없는 사람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지상은 절대공간이 아니기에. 이 불확실성이 이런 시를 쓰게 한다. 화두인은 그러므로 늘 이 지상을 떠날 준비를 한다. 국가와 사회, 마을, 가족이 부정하고 경계해도 오히려 탈출을 꿈꾼다. 정을 붙이고 사물에 충실하고 아이를 낳고 한 여자와 살지만. 이것은 지구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의 행태다. 이들은 인간중심적 사유를 거부한다. 본의 아니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말을 들을 때 구토증을 느낀다. 지구를 변방으로 그것도 내세의 한 구석으로 여기는 자들 중의 하나가 ‘나’라는 것은 그럴듯하다. 갈등 속에서 묘하게 성실을 요구하는 나를 느낄 때 배꼽을 잡고 파안대소하겠지만 이렇게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나는 나를 인정할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월간중앙, 7월호
책
지난 봄도 그러더만 또 이러셨네 문 열어놓고 어딜 가셨나?
아무도 없는 방안에 혼자 펄럭펄럭 혼자 책장만 넘어가는 책 한 권
말없이 혼자 남겨두고 그대 오리나무 겨울눈에 핏물 들면
부스럭 거리는 뒤뜨락도 먼 들도 그대 보이지 않아
책 펼쳐놓고 어디로 가셨나? 옷걸이 못 하나만 벽에 박혀
책장만 푸르륵 몇장 넘어간다 친구여 난 저 바람 넘어가는 책장
그대도 가버린 책장 하나였어, 파란 봄바람 갈 곳 없는
* 시집 <성에꽃 눈부처> 1998, 창비
고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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