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ear's Concert 1979
Wiener Philharmoniker, Willi Boskovsky
79' New Year's Day Concert 중에서 맨 마지막 연주
클래식에선 유일하게 박수치며 박자 맞추며 들을수 있는 곡
요한스트라우스 '라데츠키 행진곡' Radetzky-Marsch Op. 228 / Johan Strauss Wienner Philharmoniker / Con.Wili Boskovsky
Wili Boskovsky의 지휘로 제일 좋아하는 라데츠키 행진곡
1979년 디지털 로 녹음 LP로 처음 옮긴 음반(뒤에 CD로...)
,지금은 저세상 간 Wili Boskovsky,
이 음반은 좀 귀한것...^^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 (1909 - 1991)
오스트리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09년 6월 16일,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럽 톱 클래스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그리고 오랜 동안 명문 빈 필하모니의 콘서트마스터로 있는 한편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빈 본토박이였다.
그리고 그가 빈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뉴 이어 콘서트(신년 음악회)>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보스코프스키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빈 국립음악원에서 모라베츠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했다.
당시 음악원장이었던 프란츠 슈미트의 작품 연주에서 그의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크라이슬러 상을 받기도 하였다.
1932년 빈 국립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에 입단하였으며 다음해 빈 필하모니로 옮겼다.
그와 동시에 독주자로서 당시 빈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푸르트뱅글러,브루노 발터 등과 협연했다.
1935년에 모교의 바이올린과(科)의 교직을 맡았다.
1939년 브루노 발터의 추천으로 빈 필하모니의 콘서트 마스터로 취임하여,1970년까지 그 자리에서 활동했다.
1947년에는 빈 8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영역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필하모니의 동료들과 보스코프스키 4중주단을 조직하였는데,1948년 이를 확대하여 빈 8중주단을 결성한 것이다.
그밖에 빈 필하모니의 멤버에 의한 3중주단,현악 4중주단을 통솔한 업적은 매우 크다.
빈 필하모니 4중주단은 바릴리 현악 4중주단의 후신인데,바릴리가 병고로 활동을 못하게 되자 보스코프스키가 제 1바이올린을 맡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1961년 제1바이올린 자리를 안톤 피츠에게 이임하였다.
1955년부터는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후임으로서 빈 필하모니의 명물인 <뉴 이어 콘서트>의 지휘자가 되었고,1979년까지 지휘대에서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지휘한 요한 슈트라우스 식의 지휘를 하여 인기를 차지했다.
1969년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2세의 뒤를 이어,빈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의 레코드는 빈 모짜르트 합주단과 협연한 베토벤의 <로망스 제1번>,<제2번> 외,칼 뮌힝거 지휘와 빈 필하모니와 협연한 모짜르트의 <세레나데 제7번 - 하프너>피아니스트 릴리 크라우스와 협연한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상,하권, 피아니스트 크라우스와 첼리스트 휘브너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곡> 전집 등이 있다.
실내악 주자로서는 빈 필하모니 4중주단이 연주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빈 8중주단이 연주한 <8중주곡>(모두 런던) 등이 있다.
지휘자로서는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비엔나 왈츠 베스트 10>,<비엔나 왈츠 대전집>,<J 슈트라우스 콘서트 제1-4집>,그리고 빈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을 지휘한 <비엔나 왈츠집> 등 주로 슈트라우스 일가의 작품을 지휘한 것이 많고 또한 명연반들이다.
비엔나 왈츠는 보스코프스키에 의해 연주될 때 참다운 빈의 향기를 빚어낸다.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를 정확히 25회 지휘했다.
1979년을 마지막으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신년 음악회의 감독직을 사임했던 것이다.
빈과 빈 필하모닉,그리고 왈츠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3각관계를 형성하면서 지금까지 그 독특한 영역을 유지해 왔다.
빈 왈츠가 빈 필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생명력과 토착적인 리듬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빈 출신의 지휘자 빌리 보스코프스키(1909~1991)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왈츠는 원래 도나우 강변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형성되고 전래되어 온 렌틀러(Landler)라는 3박자 춤곡을 개량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렌틀러 춤곡은 빈 사람들의 애환과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기 때문에 빈 사람,빈 토박이가 아니고서는 그 가락의 참맛을 표현해 내기가 어렵다.
마치 재즈 음악을 빈 사람들이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것 처럼,빈 왈츠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호흡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절실하게 설명해 준 음악가가 곧 빌리 보스코프스키다.
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죽은 완벽한 빈 기질의 전형을 보여준 음악가다.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또한 지휘자로서,그가 체질적으로 익혀온 옛 렌틀러 가락을 자연스럽게 빈 필을 통해 발산시켜 왔다.
렌틀러를 왈츠로 개작하여 민속음악 차원이 아닌 연주용 또는 감상용 음악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물론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다.
다만 그들이 19세기를 거치면서 왈츠의 형태를 완벽한 모습으로 정착시켰다면,이것을 20세기로 연결시켜 가장 친근한 세계인의 음악으로 확장시킨 공로자로 보스코프스키를 꼽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보스코프스키의 음악적 생명이 있다.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91년 4월 20일 스위스에서 죽었다.
그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전형적인 빈의 기질로 빈 왈츠를 지휘한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였다.
바이올린을 켜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빈 왈츠를 연주하는 보스코프스키의 모습은 ‘우아함’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 빈 신년 음악회가 이처럼 사랑받는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은 것도 보스코프스키의 절대적인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1991년 그가 별세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최대의 예우로 ‘왈츠의 거장’을 추모하는 장례를 치렀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빈 필하모닉은 그가 생전에 자주 지휘했던 빈 왈츠들을 묶어 영전에 바쳤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비롯한 17곡의 왈츠 곡들이 이 레코드에 실려 있는데,그 모두가 보스코프스키의 생애를 추모하는 최고의 레퍼터리들이다.
빈 필하모닉의 부드럽고 따뜻한 연주와 함께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음악적 성과를 가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참고>
*.빈 필하모니 / 신년음악회
예로부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유럽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양대 산맥이었다. 하이든,모차르트,슈베르트 같은 거장들이 배출되었고,20세기에 들어서는 음악의 혁명인 무조와 12음기법을 창시한 '신 빈 악파' 3인방(쇤베르크,베르크,베베른)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세계 최정상급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라는 유명한 여름 음악제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만큼 특별한 음악가도 없다. 그들은 19세기를 왈츠와 폴카 등의 춤곡으로 꽃단장해놓았고, 이를 덴마크,러시아,프랑스,영국,미국 등에까지 널리 퍼뜨린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특히 빈은 완전히 왈츠 부대에게 점령당해,이 당시 댄스홀은 24시간 개장이었고 주지육림의 낙원으로 수많은 사생아를 배출(?)하는 불명예까지 지니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오스트리아에서 소중한 작곡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꽤 많은데,빈의 국제 공항 이름이 '요한 슈트라우스 공항' 이며 매년 12월 31일 밤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이 오페레타 <박쥐>를 늘 공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1월 1일 0시에 슈테판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가 방송하는 곡도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이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특히 빈은 슈트라우스로 시작해 슈트라우스로 끝내는 한해를 보내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유행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음악가들은 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을 예술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죽기 불과 12일 전에야 빈 궁정 오페라 무대에서 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을 지휘할수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이 벨 에포크(좋았던 시대)는 1차대전이 터지면서 끝나고, 왈츠의 인기는 점차 하락했다. 이미 슈트라우스 형제중 막내 에두아르트는 1901년 음악 활동을 중단했고,에두아르트의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1905년 빚 문제로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직을 사임했다. 최후의 왈츠 작곡가였던 칼 미하엘 치러도 1922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슈트라우스 가문의 왈츠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1년 빈 시립 공원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는데,이 자리에 이례적으로 빈 필이 출연해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빈 필이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기념 콘서트를 가져 화제가 되었다. 본격적인 빈 신년음악회의 시작은 1939년 12월 31일로,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가 빈 필과 '제 1회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제' 를 개최한 것을 신년음악회의 시초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것이 매년 계속되고 1941년부터는 1월 1일에도 연주회가 열려 오늘날의 송년/신년음악회의 관례가 확립되었다. 사실 신년음악회의 개최 동기는 조금 불순해,나치스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침체된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의도 외에 히틀러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제 왈츠>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황제 왈츠' 를 히틀러 자신의 이미지에 대입시켜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세뇌시키려 했다는 의도라고). 그러나 1945년에 신년음악회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전황의 악화 탓도 있었지만 나치스가 슈트라우스 가문이 유태인 혈통을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려 부랴부랴 음악회를 취소시킨 것이었다(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가 유태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1946년에 요제프 크립스(Josef Krips)의 지휘로 신년음악회는 속개되고,1947년부터는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다시 음악회를 이끌게 되었다. 1954년을 마지막으로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신년음악회 지휘는 끝났다. 그해 크라우스는 빈 필과 미주 투어중에 멕시코에서 급사했고,빈 필은 신년음악회를 이끌 새 지휘자로 악장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를 추대했다. 보스코프스키는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만큼,슈트라우스 일가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휘하는 모습을 재현해 신년음악회의 인기를 되살렸다. 1955년부터 1979년까지 25년이나 신년음악회를 이끈 보스코프스키는 현재 빈 신년음악회 최다 지휘자로 기록되고 있다. 빈 신년음악회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보급으로 더욱 대중적인 이벤트가 되었고,영국의 데카가 이를 이용해 빈 필/보스코프스키 콤비의 수많은 왈츠 음반들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 녹음들은 라이브가 아닌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신년음악회' 라는 딱지가 붙어 세계 각지에서 팔려나갔다. 1974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남성합창단이 특별 출연하기도 했고,1975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150주년 신년음악회는 데카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어 최초의 공식적인 신년음악회 실황녹음이 발매되기도 했다. 1979년 보스코프스키 최후의 신년음악회도 실황녹음으로 발매되었는데,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디지털 기술로 녹음된 음반이기도 했다. 보스코프스키 은퇴후 신년음악회의 지휘는 미국 출신의 지휘자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맡게 되었다. 마젤도 바이올린에 능해 보스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켜며 지휘하기도 했다. 1980년 마젤 최초의 신년음악회에서는 자크 오펜바흐 사후 100주년 기념으로 <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오)> 서곡이 연주되었다. 이후 1983년까지 실황녹음이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되었고,1980,1983년 실황은 CD로도 재발매되었다. 마젤이 1986년 신년음악회를 끝으로 사임하자 빈 필은 신년음악회 음악감독직을 폐지하였고,매년 다른 지휘자를 초빙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1987년,신년음악회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했고,이후 클라우디오 아바도(1988,1991),카를로스 클라이버(1989,1992),주빈 메타(1990,1995,1998),리카르도 무티(1993,1997,2000),로린 마젤(1994,1996,1999)이 신년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다. 2001년에는 고음악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자로 뽑혀 화제가 되었는데,역시 그답게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을 원전판으로 지휘하는등 철저한 역사 고증과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었다.
빈 신년음악회는 텔레비전 중계로 전세계에 방송되는데,90년대 들어 중국에까지 방송되어 거의 100만명 가까이 신년음악회를 시청한다고 한다(국내에서는 KBS 위성과 NHK 위성 두 채널로 시청 가능). 오스트리아 방송협회(ORF)가 중계하는 신년음악회 실황에는 가끔씩 빈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발레 장면도 삽입되고,인터미션때는 오스트리아 홍보 영상을 방송하기도 해 국가 홍보 기능도 갖추고 있다. 또한 이 실황녹음은 음반으로 매년 발매되고 있어,연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새해의 분위기를 띄워주고 있다.
Johan Strauss (1825 ~ 1899)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지휘자. '왈츠의 왕'으로 불리며 '왈츠의 아버지'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처음 그를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시켜 은행업을 배우게 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이 강한 그는 아버지 몰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1843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생활을 하자 이를 기회로 생애를 음악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 교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바이올린 외에 작곡이론을 배웠다. 처음에는 교회음악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세 때 시 당국의 허가를 얻어 15인조악단을 조직, 무도회에 데뷔하여 그 자신의 작품 1∼4번의 무도곡을 연주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46년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악단에는 가담하지 않고 자기 악단을 인솔하여 독립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49년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악단도 지휘하게 되어, 동생이 악단에 가담하기까 지 수년간 그는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62년에는 통칭 예티(Jetty)라고 불린 가수 헨리에테 트레프츠와의 결혼으로 커다란 전기를 맞았다. 78년 아내가 죽자 30세 연하인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했으나 어울리지 않는 이 결혼은 얼마 후 파탄되고 87년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 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받는 만년을 보냈다.
라데츠키행진곡(Radetzky Marsch)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스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행진곡으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장군인 라데츠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라데츠키 장군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장군. 1848년 3월 부패한 메테르니히 전제 정치에 대한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보수파로 정부측에 가담한 요한스트라우스는 정부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영웅 이름을 빌린 이 곡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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