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가와 수행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스님은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조선시대 숙종 때 수많은 대중들을 교화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성씨는 정(鄭)씨로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725년 전라도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에서 열린 화엄대법회에 대중 1,400여 명이 모이는 등 대단한 성황을 이루자 이를 시기한 유생들의 모함으로 1729년에 제주도에 유배되어 7일 만에 입적하였다. 환성 스님은 15세에 경기도 양평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여 쌍봉정원(雙峰淨源)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월담(月潭) 스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의발(衣鉢)을 환성에게 전하였다. 헌헌장부로 성장한 환성 스님은 용모부터 특이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27세 되던 해에 스님은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 대사가 금산(金山,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모운 진언 스님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제자로 당시 화엄학의 대종장(大宗匠)으로 이름을 떨치던 분이었다. 모운 스님은 환성 스님이 찾아와 법담을 나누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비록 자신보다 20여 년 아래였지만 그를 공경해 마지않으며 강석(講席)을 물려주고 자신은 홀연히 직지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환성 지안 스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날 모운 스님의 강석을 이어받은 환성 스님의 법문을 들은 수백 명의 대중들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거침없는 그의 설법에 크게 감화되어 막혔던 의문이 시원하게 뚫리고, 이 때문에 그 뒤로 환성 스님의 회상(會上)으로 많은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 제주에서 입적하다 환성 스님은 앞서 말한 대로 금산사에서 있었던 화엄법회 영향으로 제주도로 귀양 와서 입적하였다. 1729년 화엄대법회의 일로 인하여 모함이 들어가서 지리산에 주석하던 중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 후 풀려났으나 다시 제주도로 유배가 7일만인 1729년(영조 5) 7월 7일에 어시오름 아래에서 부좌입적(趺坐入寂)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66세, 법랍 51세였다. 일설에는 입적할 때 한라산이 울고 바다가 끓어오르기를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 환성 지안 스님을 기리는 순교비가 서있다. 스님의 부도는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있다.
지안 스님의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網要)』 1권이 있으며, 문집이 3권 있다. 『선문오종강요』는 임제종을 비롯하여 조동종·운문종·위앙종·법안종 등의 선문오종의 핵심을 요약하고 나름대로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환성 스님이 여러 종파를 두루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환성 지안 스님에 관한 기록으로는 홍계희(洪啓禧)가 지은 「환성대사비명(喚惺大師碑銘)」 『금산사지(金山寺誌)』과 문인(門人) 해원(海源)이 지은 「환성화상행장(喚惺和尙行狀)」 『환성시집(喚惺詩集)』, 범해각안(梵海覺岸)이 지은 『환성종사전(喚醒宗師傳)』, 『동사열전(東師列傳)』 등이 있다.
환성은 조선 후기 억불의 암울한 시대에 정법의 등불을 밝혔던 고승으로서 한국 불교사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의 삶을 통해 개인의 인격은 물론 그 당시 교단 내외의 사정과 아울러 시대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 『환성시집(喚惺詩集)』말미에 함월 해원(涵月 海源 1691~1770)이 쓴
연상 선배였던 모운은 그의 학덕을 보고 감동되어 탄복하며 수 백 명의 확인들에게 그로부터 잘 배우기를 당부하고 그
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 대중들의 간청에 따라 설법을 하게 되었는데, 강물같이 거침없는
그의 언변은 청중의 심금을 울렸으며 당시 사방으로부터 1,000여명이 넘는 수행자들이 운집하였다.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등, 강원도와 경상도 및 충청도의 여러 사찰과 아울러 전라도 일대의 크고 작은 여러 명찰들에 다니면서 참선수행과
교학강설 및 중생교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영조 원년(1725), 환갑이 지난 다음해 봄에 그가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법회를 베풀었는데 1,400여명의 대중이 모였을 정도로
그의 신망과 명성이 높았다. 그 법회의 성황은 당시에 드문 일로서 세상의 화제가 되었었고 경향각지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영향이 컷던 까닭으로 결국은 영조 5년(1729)에 그를 시기하고 두렵게 생각하던 이에 의해 무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지리산에서 체포된 후, 전라도 감옥에 갇혔지만 곧 무죄로 밝혀져 풀려나게 되었으나 그 지역 고위 관리가
석방불가를 주장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주도에 도착한지 7일만에 그 곳에서 별안간 입적하였다.
그 때의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쇠약한 노구에 형리들의 부실한 대접과 처우로 심신이 극도로 피로하였겠고,
그러한 처지에 그는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제자로는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과 함월 해원이
고족으로 법을 이었고 그 밖에도 출중한 인물이 많았다. 그의 저술로는『환성시집』과 『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가 전한다. 환성은 선사였지만 교학적 자질과 소양도 깊었으며, 설법에도 재능이 뛰어났었던 반면, 신비스러운 전설적 일화를 남겨 주고 있다. 그의 호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보여 준다. 지안이라고 불리게 됨은, 그가 강원도 청평사에 있으며 노후한 도량을 쇄신할 때에, 고려 초 창건 당시에 인도승이 파 놓았다는 산문 앞의 연못을 수리하는 도중에 작은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비석에 "儒哀冠婦千里來"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을 환성이 "선비의 마음(志=儒哀)과 편안함(安=冠婦) 및 다시(重=千里)옴(來)"으로 글자들을 풀이한 후, 글의 메세지는 志安이라는 인물이 장래에 다시 돌아올 것을 뜻하는 예언적 표현임을 스스로 해석해 내었다. 그 후 환성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안으로 부르게 되었다. 환성은 그가 해남의 대둔사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진설할 때, 공중으로부터 세번 부름을 받았음을 가리키고,
그 때마다 응답하였던 사연을 기념하여 삼략이라 자를 삼았다고 전한다. 승속에 두루 알려진 특이한 일화들의 예를 들면, 백일기도 시행중 꿈에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이 싯귀를 주었는데 "수미산 같은 '불법을' 짊어지고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 '중생들을 위해' 큰 법문을 베풀되 들어나지 않게 시행하라(擔得須彌渡大海 大施門開草裡行)"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된 후 일주일만에 입적하였을 때에는 사흘동안 한라산이 울고 인근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이변을 보이자, 제주도 사람들은 그를 '삼성(三聖)의 한사람'으로 전해 오는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즉 제주도에는 옛날부터 성자(聖者) 세 사람이 그 곳에 와서 생애를 마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한라산 상봉의 석불의 배면에 "삼성의 입적처 : 한 분은 와서 살다가 입적하고(來居入寂), 또 한 분은 들어와 살다가 열반을 보이고(入居示寂), 다른 한 분은 유배되어 살다가 열반을 보이리라(流居示寂)"고 쓰여 있었다는 예언을 가리키며, 중국의 정법보살과 허응 보우(虛應 普雨 ?~1565)대사와 함께 환성이 지목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말 나옹을 수도권에서 영남지방으로 좌천시키는 과정에서 입적한 사례와, 조선 중기에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다 유신들의 핍박으로 순교한 허응의 사연과 함께, 환성 스님도 당시 정치 및 종교상황의 희생이 되었으나 이는 개인이 어쩔 수 없었던 역사전개의 필연처럼 보인다. 아마 나옹 스님이 기도 중에 현몽하여 "큰 법문을 베풀되 들어나지 않게 시행하라"고 시구로 암시하였지만, 환성의 법문이 너무 들어난 까닭에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되었던 것 같다. 환성의 선종 법맥을 살펴보면, 그의 법사는 월담 설제이다. 월담은 풍담 의심(楓潭 義諶 1592 ~ 1665)에게서 법맥을 받았고, 풍담은 편양 언기(鞭羊 彦機 1581~1644)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편양은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의 법을 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허는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오늘날의 전통 승단은 대부분 그의 문손으로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청허의 1,000여 제자들 가운데 출중한 인물이 70여 명이다.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편양은 가장 정통을 잘 이어 받아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편양 문하에도 수백명의 제자가 있었지만, 풍담이 상수였고,
풍담의 많은 제자 가운데 월담이 으뜸이었다. 그러므로 환성은 태고와 청허로 이어져 내려온 한국불교 선법의 정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환성의 교학적 위상을 보면, 그는 모운의 강맥을 이었는데, 모운은 청허와 함께 양대문파를 형성했던 부휴 선수(浮休 善修 1543~1615)의 상족이었던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의 제자로서 강학에 뛰어 났었고 특히 화엄의 대가였다. 기록엔 환성이 모운에게 직접 사사한 적은 없고 다만 그의 강석에 나아갔으나 모운이
그의 경지를 알아보고 그에게 강좌를 넘겨준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환성의 자증적 참선 체험의 깊이와 독자적 연학 및 강설 능력의 확보는 이른바,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을 함께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환성은 선문의 체험을 화엄교학의 방편을 통해 정법을 효과적으로 선양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선대의 대표적 인물들인 청허와 부휴계 양대 전통을 아울러 섭수 전승한 선교의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현존하는 저술 중 『오종강요』는 제목이 말하듯 오종 즉 임제종, 운문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의 종지를 순서대로 요점정리한 것이다. 그의 독창적인 글이라기보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대목과 구절들을 발췌수집하여 후학들의 수행에 참고하도록 간결하게 편집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그의 안목과 사상이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바인 임제종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전통의 전승과 선양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환성시집』은 그가 시문에도 자질과 소양이 뛰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순수 문학적인 것은 적고 대부분은 승속을 포함하여 설법과 포교의 성격을 띤 것들이다. 환성의 영향은 호암과 함월 등 훌륭한 직계제자들의 활약 및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10~1791)과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등 문손의 번창에 의하여, 그의 선교구족의 가풍과 그 유산의 전승이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조계종의 역대 종정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을 문도로 배출하고 종풍의 중흥을 주도해 온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스님이 그의 법사를 환성에 이은(遠嗣喚惺) 점 등을 보더라도 그는 당대를 초월하여 후세의 모범으로서 신망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성은 구한말과 일제하의 피폐하던 전통 선법의 중흥은 물론, 강경 설법과 역경사업 및 전계 율사로서 교단쇄신에 공헌한 근래의 고승이었지만, 전통 법맥과 수행가풍이 부실한 실정에서 정맥의 복원과 청정승풍 부흥을 시도하며 결국 마땅한 법사로서 환성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통과 설통을 구족했던 환성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탄압과 핍박으로 산고를 겪던 조선후기의 척박한
불교상황에서 불 속의 연꽃처럼 피었다 사라진 불교계의 기린아요 풍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불우한 역사 속에 원력으로 태어나 선대로부터의 법등을 전승시킨 후, 자신을 역사의 제물로 헌신하고 간 보살의 화현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종교와 정치 관계를 생각해 보도록 시사하는 바 크다.
감로법 전하며 중생 교화한 선지식
15세에 미지산 용문사에 출가후 모운스님 강석 이어 대중교화 매진
‘화엄대법회’ 모함받아 1729년 제주유배후 ‘어시오름’서 7일만에 입적
환성 지안 스님은 배불숭유(排佛崇儒)하던 조선조의 숙종 때 수많은 대중들을
교화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성씨는 정(鄭)씨로서 강원도 춘천에서 조선조 현종 5년(1664)에 태어났다.
1725년 전라도 김제의 금산사에서 연 화엄대법회에 대중이 1천4백여 명이
모이는 등 영향이 크자 유생들의 모함으로 1729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제주도에서
7일 만에 입적하였다.
환성스님은 15세에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다.
미지산은 경기도 양평에 있고 지금은 용문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미지산이라 불린 것은 ‘고승대덕들의 덕풍지광(德風智光)이 미만(彌滿)해 있다’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도 하나, 오히려 그 보다는 순우리말로 용을
‘미리’·‘미지’·‘미르’라 불렀던 것과 연관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덕풍지광’과 ‘용’ 두 가지 다 환성지안 스님을 연상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이미지이다.
환성 지안 스님은 쌍봉정원(雙峰 淨源)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월담(月潭)스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의
발(衣鉢)을 환성에게 전해준다.
헌헌장부(軒軒丈夫)로 성장한 환성스님은 용모부터 특이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27세 되던 해에 스님은 모운진언(慕雲震言)대사가 금산(金山: 금릉)의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간다.
모운진언(광해14, 1622∼숙종29, 1703)스님은 벽암(碧岩)스님의 제자로
당시 화엄학의 대종장(大宗匠)으로 이름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모운스님은 환성스님이 찾아와 법담을 나누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비록 자신보다 20여년 연하(年下)의 선지식이었지만 그를 공경해마지
않으며 강석(講席)을 물려주고 자신은 홀연히 직지사를 떠났다 한다.
이때부터 환성 지안스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날 모운스님의 강석을 이어받은 환성스님의 법문을 들은 수백 명의 대중들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거침없는 그의 설법에 크게 감화되어 막혔던 의문이
시원하게 뚫리고, 이 때문에 그 뒤로 환성스님의 회상(會上)으로 많은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금산사에서의 화엄법회 영향으로 제주도로 귀양 와서 입적한 것이다.
즉 1725년 전라도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환성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운집한 대중이 무려 1400여명에 이르자
유생들의 그를 심각히 경계하고 모략을 일삼았다.
결국 1729년 마침내 화엄대법회의 일로 인하여 모함이 들어가서 지리산에 주석하던 중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 후 풀려났으나 다시 제주도로 유배가 7일만인 1729년(영조5년) 7월7일에
제주도 어시오름 아래에서 부좌입적(趺坐入寂)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66세 법랍51세였다. 일설에는 입적할 때 한라산이 울고 바다가
끓어오르기를 삼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 환성지안스님을 기리는 순교비가 서있다.
스님의 부도는 해남 대흥사에 있다.
지안스님의 저술로는『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網要)』1권이 있으며, 문집이 3권 있다.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網要)』는 임제종과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등의 선문오종의 핵심을 요약하고, 나름대로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환성스님이 여러 종파를 두루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슨 일로 무심히 수서에 누워 있는가, 다만 세상을 잊고 깊숙한 토굴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차 솥은 객을 위해 깊은 아궁이를 열었는데, 약초밭은 사람들을 꺼려 조그만 시내를 격해 있노라. 비개인데 뿌리는 비 소리는 소나무 늙고 또 젊었는데, 찬 서리 다가오는 가을빛은 산 높고 또 낮다. 숲 속의 새가 또 와서 잠을 깨게 하는구나, 산승이 자니(紫泥 : 세속)의 꿈을 꿀까 두렵다.
게송
西 來 密 旨 孰 能 和 서 래 밀 지 숙 능 화
處 處 分 明 物 物 齊 처 처 분 명 물 물 제
小 院 春 深 人 醉 臥 소 원 춘 심 인 취 와
滿 山 挑 李 子 規 啼 만 산 도 리 자 규 제
서쪽으로부터 온 은밀한 뜻 뉘라서 능히 화답하랴
곳곳마다 분명하고 만물은 들어났네.
뜰에는 봄이 짙어서 사람은 취하여 누웠는데
온산에는 복숭아 자두 꽃이요 두견이 울부짖네.
幽居(유거) -그윽한 곳에 살면서
底事無心臥水西(저사무심와수서)
어찌하여 무심히 누워 있는데 물은 서쪽으로 흐르는가?
只緣忘世愛幽棲(지연망세애유서)
다만 세상 인연을 잊고 그윽한 곳에 사는 것을 사랑할 뿐
茶爐爲客開深竈(다로위객개심조)
차 화로는 손님을 위해 깊은 아궁이를 열었는데
藥圃諱人隔小溪(약포휘인격소계)
약초밭이 사람을 꺼려 작은 계곡 건너에 있네.
선불교의 법맥과 환성 지안 (喚惺志安 )스님
우리 나라의 법맥은 크게 해인사와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거나 덕숭산 정혜사나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맥을 이어온 두 불교계의 큰 집안이 있습니다.
물론 총림을 중심으로 이런 법맥으로 분류한다는 게 흐름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가급적 확실히 정리 되는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