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한 아이가 살아간다. 아이는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껏 달렸다. 한번 달렸다하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린다. 하느님과 따님이 주신 모든 에너지를 매일 매일 쏟아부었다. 죽은 듯 자지만, 다음날 새생명을 얻은 듯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아무런 간섭 없이 거침없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 체제에 적응하고자 노력했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벗어나고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함정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땐 학교 다녀오면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교육대학엘 갔다.
교육대학에선 약간의 자유가 있었지만, 대학 체제 외에서 자유로울 뿐, 그 안에서는 더욱 답답했다. 그래서 대학 2학년 1학기 화창한 봄날에 자퇴를 심각하게 결정하고 있었다. 그때 미동초등학교의 이규형 사범님을 만난 것이다. 우연히. 어머니께선 늘 나의 안녕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하셨는데, 그 덕분에 사범님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하다. 사범님께선 중고등학교와 교육대학에서 찌든 본성을 회복시켜 선천의 가능성을 북돋우셨다. 아이는 다시 초등학생 시절의 발랄한 개성을 회복했다. 교육대학 학생이었지만 정체성은 태권도 사범이었던 것이다. 사범님께서는 아이를 태권도 사범으로 한껏 북돋았던 것이다. 교육대학 졸업 이전에 태권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사범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교대 졸업 후 아이는 곧바로 교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태권도 사범으로서 정체성을 놓은 적이 없다. 교사로서의 가능성 중의 하나로 무술 사범을 스스로 만들고 지켜낸 것이다. 거꾸로 무술 사범이 초등학교 교사로 파견되어 무술을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녹여내고자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아이는 전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일류의 무술 사범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으로 이미 20년 이상 살아왔기에 의식의 지향성에서 뚜렷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스승인 이규형 사범님이 그러하기에 나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만큼 스승 만나는 복은 무엇보다도 크다. 하지만 스승 복만 누리기에는 더 큰 도전이 있다.
이제 이 아이는 스승을 벗어나고자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범님께서 꿈 속에서 계속 붙잡는다. 아이는 이미 태권도로 돌아갈 수 없다. 태권도를 벗어나 현재를 適時적시한 무술을 추구하기에 기존에 매어서는 안된다. 당연히 사범님과의 師承사승 관계도 해체하고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
한 아이가 새로운 설계도를 가지고 영토를 구획하고자 한다. 백두산을 오르다 멀리 만주벌판을 바라보면 거칠 것이 없다. 눈길 닿는 곳이 모두 나의 땅이 된다. 꿈을 遠大원대하게 갖고 도전하는 것이다. 어차피 과정 아니던가? 文筆문필의 힘은 설계도에 있다. 머리 속 세상을 글로 지으면 설계도가 마련된다. 글짓기 시간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무술은 내 건강을 擔保담보하고 追求추구할 수 있다. 건강을 기원한다면 무술을 해야 마땅하다. 건강을 擔持담지하는 운동이라면 무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아이가 벌거숭이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처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를 스쳤던 소중한 인연 중에 스승들이 있다. 앞으로도 아이에겐 소중한 스승이 다가올 것이다. 이젠 원한다면 언제든 스승을 만날 수 있다. 상대를 스승으로 모시는 건 제자로 모시는 것보다 아직까지 아이에겐 더 쉽다. 한 아이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도무지 그 정체가 일정하지 않아 종잡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변한다는 것, 좋은 방면으로 변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성장이라고 해두자. 성장하기 위해 살아가는 한 아이가 있다. 늙더라도 그런 아이가 되고 싶다. 이젠 스승을 떨치고 갈 길을 가야한다. 아이의 길, 어릴 적 소풍 전 날의 설레는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달리기 힘들 때 걷고, 더 힘들 땐 상상한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꿈처럼, 다가올 豊漁풍어의 꿈을 상상한다. 한 아이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