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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2월 21일 토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풍족하게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당신은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이가 ‘회개’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잘못을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이 전하는 회개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은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회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친다’와 ‘돌린다’는 분명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고친다.’는 뜻의 회개는 잘못을 없애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은 다릅니다. 오히려 잘못을 계기로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회심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죄는 어떻게 되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아도 그저 하느님만 찾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개념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것도 죄이지만, 더 근본적인 죄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이어 갈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고자 하면서도 되풀이하게 되는 잘못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약함일 뿐이며,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힘과 자비를 청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참 다양한 곳에 초대를 받아 강의를 했습니다. 교도소, 군부대, 대학교, 본당이나 교구 여러 단체, 수도회, 수녀회...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이 있습니다. 한 기업체 신입사원 연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신입사원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깎아놓은 밤톨처럼 반듯하고 늠름하던지? 어찌 그리고 예의 바르고 성숙한지! 꿈에도 그리던 성소자들이 거기 우르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고스란히 단체로 성소의 길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생사고락은 물론이고 미래와 운명을 함께 할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꿀 것입니다. 지적이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고, 균형이 잡히고, 능력도 탁월하고...
그런데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한점 흠 없고 무죄한 청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신앙심 깊은 젊은이를 제자로 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을 보십시오. 그분의 파격적인 선택, 말도 안되는 선택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 인간 세상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금징수권을 목돈을 받고 매도했습니다. 세금징수권을 매입한 개인이나 회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목돈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의 악용은 가난한 백성들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세리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마도 세리들은 적정선의 세금이 아니라 두배, 세배로 세금을 후려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리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도둑!” 키케로는 세리를 향해 “인간 군상들 가운에 가장 천한 족속!” 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세금이 결국 침략자인 로마 제국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세리들을 향해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 칭했습니다.
세리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세리는 언제나 이방인들과 접촉하였기에, 상시적으로 율법을 어겼으므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레위의 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오랜 친구 레위가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동료 세리들, 죄인들, 나름 한 주먹 한다는 사람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인들 사이에 태연히 앉으셔서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잔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자칭 의인들인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쫌생이, 찌질이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고,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칭찬 받음보다 비난 받음이 이득인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첫 토요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며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왜 건강검진을 잘 안 받을까요? 겉으로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주 고약한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병원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제일 잘 알지, 의사가 뭘 알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착각합니다. 무엇보다 싫은 건, 병원 가서 제 치부를 드러내고 의사에게 "술 끊으세요, 살 빼세요" 하는 잔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의사의 지시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그 오만한 마음, 즉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은 그 교만이 저를 병원 문턱에서 돌려세웁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지, 꾸중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혹은 성당에 나오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번듯해진 다음에 주님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레위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가 봐도 죄인이었고,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숨길 가면조차 없는 절박한 상태에서 자신을 치유해 줄 단 한 분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바로 레위가 가졌던 '솔직한 겸손함'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죄인이었기에, 거룩한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거룩함을 증명하느라 주님의 자비가 들어갈 틈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다 보면, 결국 나 자신조차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당에 나와서도 내 상처를 내놓는 게 아니라, 내 거룩함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병원에 와서 내시경을 받는 대신 복근을 자랑하는 환자가 되는 꼴입니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먼저 나를 죄인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 자신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곤 합니다. 가면이 완전히 찢겨나가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정직해지는 것이지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거룩했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9세기 프랑스의 왕이었던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의 이야기입니다. 833년, 그는 정적들과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수아송(Soissons)의 성 메다르도 수도원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주교들은 그에게 만천하에 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루이는 수많은 군중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려한 왕의 예복을 벗어 던져야 했습니다.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위선을 하나하나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아송의 치욕'이라 부르지만, 영성적으로는 '수아송의 부활'이라 부릅니다. 루이는 온 나라가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하자, 더 이상 '위대한 왕'이라는 가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그의 가면을 벗겨버리자, 그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정직한 단 한 명의 죄인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솔직함이 그를 지옥 같은 절망에서 끌어올려 하느님의 자비를 붙들게 만든 것입니다. 레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죄인이라 불렀기에, 그는 오히려 자유롭게 예수님의 청진기 앞에 심장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이 파격적인 통찰은 교회가 이미 깨끗해진 사람들의 전시장(Casta)이 아니라, 창녀와 같은 죄인(Meretrix)들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순결해지는 중'인 병원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당은 이미 치유된 사람이 자신을 뽐내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을 존중하는 길은 내가 아플 때, 혹은 아프지 않더라도 내 영혼의 숨은 병명을 찾아내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눕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등장하는 '위스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생아를 둔 술꾼이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해를 들어주다 잡힙니다. 처형 전날 그는 감옥 바닥에서 절망합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께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갑니다." 그는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독한 죄의 통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천하에 죄를 드러내는 겸손함이야말로 주님의 자비를 가장 선명하게 듣는 청진기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닙니다. 고해성사하듯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칭찬해주는 '마약'에 취해 삽니다. 그 달콤한 칭찬은 우리 영혼의 암세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이 마약에서 깨어나려면, 나를 비난하고 나의 허물을 지적하는 타인을 '나의 죄를 알려주는 고마운 스승'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스페인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역시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Pati et contemni pro te."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받고 멸시받게 하소서.) 왜 성인은 이런 당혹스러운 청을 드렸을까요? 타인의 멸시가 내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을 부수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수술 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우리를 부풀게 하지만, 멸시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사막 교부들의 일화집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아바 모세(Abba Moses the Black)의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날 수사들이 그를 시험하려 "저 검둥이 죄인 출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모욕했습니다. 회의 후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 덕분에, 나는 내 영혼이 그보다 훨씬 더 시커멓다는 진실을 떠올렸소. 그들은 내 영혼의 때를 벗겨주는 고마운 비누들이오."
마지막으로 성 요한 클리마코(St. Joannes Climacus)의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그대들의 잘못을 꾸짖고 허물을 드러내는 자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십시오. 그들의 혀는 그대들의 영혼에 묻은 교만의 비계를 도려내는 의사의 수술 칼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다이어트 끝내고 검진받겠다는 영적 교만을 버립시다. 타인의 칭찬이라는 마약을 끊고, 나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드러냅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제 안의 병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시고 고쳐주십시오!"
이 정직한 절규가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는 전능한 의사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비참한 환자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고타 여행 중에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준비해 준 가족이 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안나 자매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센터와 신부님을 도와주시기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와 같다고 해서 미리 세례명을 정해 드렸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기꺼이 저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우스팅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갔을 때 세례명을 미리 정해 드렸는데 지난 성탄 무렵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교민들의 민원을 잘 해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요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식당을 축성 받았습니다. 신자인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성당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이번도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센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과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콜롬비아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같은 성씨였습니다. 족보를 따지니 저에게는 조카와 같았습니다. 이름이 저의 조카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으니, 저와 같은 돌림 자였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조카와 같은 신부님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위해서 좋은 술을 가져왔고, 저도 신부님을 위해서 용돈을 드렸습니다. 교황 대사관에서 사목하는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몬시뇰은 르완다에도 있었고, 벨기에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콜롬비아로 왔다고 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아는 신부님과 로마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신부님과 몬시뇰과 대화하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외국에 살아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외국에 살면서 ‘주눅’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신부님은 ‘K Culture’의 세대였습니다. 몬시뇰도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콜롬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과 공동체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다미아노(Peter Damian)
신분 :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지역 : 오스티아(Ostia)
활동연도 : 1007-1072년
같은이름 : 다미아누스, 다미아니, 다미안,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는 어릴 때에 고아가 되어 형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형은 라벤나의 사제였는데, 그에게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파르마(Parma)로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교수가 되었으며 1035년에는 베네딕토회 회원이 되었지만 자신은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이 된 그는 은둔소를 다섯 군데나 더 세웠다.
그는 특히 이 세상을 초탈한 인물로 또 성직매매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1057년 그는 교황 스테파누스 9세(Stephanus IX)로부터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수도자의 위치로 돌아온 그는 주로 교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대립교황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연옥, 성체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하여 사제들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즉시 그에 대한 지역교회의 공경이 시작되었고, 1823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며 보편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Robert Southwell)
활동년도 : 1561-159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영국 노퍽(Norfolk)의 호샴 세인트 페이스(Horsham Saint Faith) 출신인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Robertus Southwell, 또는 로베르토)은 궁중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유학을 떠났다가 파리(Paris)로 건너갔고, 그 다음에는 로마(Roma)로 가서 예수회원이 되었다.
그는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그 길로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런던(London)에 살던 애런델(Arundel)의 앤(Anne) 백작부인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앤의 남편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목적 외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장례식에서 흘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 '위로의 편지' 그리고 '죽음을 이긴 승리' 등의 글을 남겼다.
그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복자 노엘 피노트(Noel Pinot)
활동년도 : 1747-179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나딸레, 나딸리스, 나탈레, 나탈리스
노엘 피노트는 프랑스의 앙제(Angers) 출신으로 교구사제였다.
그는 한 두 본당의 보좌신부를 거치는 동안에 병자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 존경받는 사제로 통하였고, 1788년에는 루루 베코네(Louroux-Beconnais) 성당의 주임사제로 활약했는데, 그의 뛰어난 열성과 신심은 많은 영적인 결실을 맺었다.
1790년 루이 16세에 의하여 반포된 소위 '성직자의 시민헌법'은 가톨릭의 체제를 뿌리부터 흔든 악법이었기 때문에 많은 성직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노엘 신부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앙제 법원에서 2년간의 자격박탈을 강요당하였으나 비밀리에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윽고 방데(Vendee) 지방의 봉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을 때 그는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하며 항거하기 시작했으나 재차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926년 10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나탈리스 피노트(Natalis Pinot) 또는 나탈레 피노트(Natale Pinot)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