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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도행전 9장 1-9절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 자신이 부딪치는 일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 중에 신앙생활은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결국 좋은 인생을 만들길 원한다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풍요로운 인생이 되어 집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받아드리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그분을 공경하고 섬기는 한, 그 분이 인도하신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적,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재제사장의 공무를 받아 살기등등하게 다메섹 원정길에 오릅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동상에서 그는 갑자기 하늘로부터 비추는 강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박해하러 가던 사람들이 섬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돌아간 사울을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1-2)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합니다. 끝없이 올라오는 자기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1-2)
사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울이 극적으로 변화된 사건을 세 번이나 소개합니다. 본 9장은 앞 장에서 박해자로 등장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열정적인 전도자가 된 사건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은 8장에서 다룬 주제의 확장입니다. 본 장의 핵심 요점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변화를 통해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 땅 끝까지 확산되게 할 새로운 인물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장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개종 사건과 13장부터 전개되는 바울의 선교 사역은 복음이 땅 끝으로 향해 나아가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줍니다.
⑴ 혈안이 된 정통 유대인 사울(1)
당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 잔당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하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 집사까지 죽였습니다. 박해 때문에 믿는 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어려 지역과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도망한 곳에서도 여전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 들려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사울을 통해 그 감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한 사울은 지나친 극렬한 박해자로 마치 먹기를 발견한 맹수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모습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하다고 평합니다(1).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 신앙을 깨뜨리는 사악한 괴수였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어리석은 이단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표현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 대한 충분한 열정적인 헌신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단자들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잘못된 열정으로 한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일이었습니다.
⑵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사울(2)
잠시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면을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으니, 이곳에는 당시 종교적인 생각을 중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종교적인 과격한 열정은 철두철미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어지럽힌 이단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모두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과 같은 열정적인 성도들을 죽이는데 찬성했고, 숨은 성도들을 찾아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 박해의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박해를 피해서 각 지역과 각 나라들로 흩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잠잠한 것이 아니라 피신한 곳에서까지도 열심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고 열정만 있는 사람들을 선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아무도 열정 가득한 바리새인 청년의 질주를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를 바르게 지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추종하는 이단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땅 끝까지라도 가서 모두 잡아 박해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추종하는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2a)라고 오늘날 체포영장 같은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받으러 갔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외국으로 도망친 범법자 유대인들을 강제 송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주후 18-37년)였습니다. 도시 다메섹은 약대 상인들의 무역 교차로에 위치한 중요한 고대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2km 떨어진 거리며 걸어서는 6일 정도 걸립니다. 유대 땅은 아니지만 수리아의 주요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상당수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길을 나섭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복음을 알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신의 행동에 유대인으로서 정당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 외에, 또 다른 신을 신봉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척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3-7)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기용할 때는 많은 스펙과 훌륭한 능력 그리고 탁월한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때로는 나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까 라는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면서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회복시켜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그리고 완전하게 사용하십니다.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3-7)
사울은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보기 좋게 잡아올지 엄중한 마음으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납니다. 상당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나름 훌륭한 체포 작전을 무장한 사람들과 논의했을 것입니다. 오 일이나 육일 째인지 다메섹에 거의 도착할 어느 날, 때는 해가 중천에 걸린 정오쯤이었습니다. 갑자기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밝은 빛은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그의 상태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던 그를 밝은 빛으로 비추셨습니다.
⑴ 뜻하지 않는 만남(3-4)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울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습니다. 강렬한 빛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지고 순간 눈이 멀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고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방법이 바로 ‘빛’과 ‘음성’입니다. ‘밝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기 위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릅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에게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울에게 밝은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 소리는 저주 받아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주님의 음성 앞에서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건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우리가 조롱당할 때에 예수님도 당하신 것입니다. 눈을 멀게 할 만큼의 영광과 극심한 고난을 동시에 한 몸에 가지고 계신 분이 사울이 만난 예수님입니다.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는 낮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나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과 착한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속에 비추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⑵ 자신을 밝히신 예수(5-6)
사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압도할만한 경험은 하나님께서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신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금방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주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의 질문에 하늘에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이 들려옵니다. 십자가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자신에게 신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순간 눈만 멀었던 것이 아니라 지적인 모든 부분이 마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신학이 깨어지고 꿈이 깨어졌을 것입니다. 아니 그는 이 순간에 그는 진짜 주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울이 박해한 자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극열한 반대자를 포용하시고 구제 불능처럼 보이는 사울을 일꾼 삼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해박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깨트리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와 사울을 만나신 것입니다. ‘참된 빛’ ‘참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자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던 자에게서 그리스도에게 결박당하는 자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내었던 사울을 예수님께서는 만나주셨고,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모든 삶을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울은 결국 복음 앞에 그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것도 쓸모없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급기야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전히 내 안에는 자존심이 남아 있습니다. 우쭐거리는 마음과 시기와 질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또한 세미한 계획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내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믿음이기를 소원합니다.
⑶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7)
놀라운 것은 정작 사울이 쓰러지고 눈이 먼 과정 속에서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울 자신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나에게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교의식 속에서 낙심하여 한숨만 내 쉬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함이 하늘의 비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베섹으로 돌아간 사울(8-9)
회심은 자신을 이끄는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나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8-9)
의의양양하며 위풍당당하게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이제 눈이 감기여 누군가에게로 갑니다. 그의 인생도 예수님께 매어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가게 됩니다. 회심은 자신을 이끄는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변화시키길 축복합니다. 사울이 땅에서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8).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그가 참으로 무기력하게 사람들의 손을 잡고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강한 힘을 지닌 핍박자가 아니라 복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동안의 잘못된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사울의 그 모습이 변화와 부흥을 바라는 나에게 오늘 가장 필요한 신앙의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이미 사도행전 8:3에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의 모습을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본 단락은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사울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아직 충분한 헌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편지’를 받아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이 편지는 다메섹에서의 활동을 허락하는 공식 문서였을 것입니다(참조, 행 26:11). 마카비 1서 15:16-21에 나오는 로마 공문은 당시 로마 당국이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인 대제사장에게 탈주범을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특권이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에게 있음을 재확인해줍니다.
어쨌든 누가는 흩어진 신자들이 다메섹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있고, 그들을 송환할 수 있는 권한이 대제사장에게 있음을 전제합니다. 누가는 2절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그 도’는 직역하면 여기서는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의 길 도(道)자에 있는 함의와 맥을 같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들을 가리켜 이 도에 속한 자, 혹은 이 도를 따르는 자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기독교를 가리켜 그 도에 호도 스)라고 부르기도 하고(사도행전 19:9,23; 22:4; 24:14,22), 주의 도면 18:25-26) 혹은 ‘구원의 길’(사도행전 16:17)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명칭 사용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한 방식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진리를 일종의 합의된 교리의 집합체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따랐던 기독교는 믿음(교리)과 삶(행위)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삶이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믿음의 삶을 그들은 좇았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을 보고 음성을 듣게 됩니다. 3절은 사울이 본 빛을 단순히 ‘하늘로부터 빛’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2:6은 ‘하늘로부터 큰 빛’, 26:13은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9:3과 22:6은 이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다고 말하고, 26:13은 같이 가던 동행자들도 비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단순히 성경 저자의 오류가 아닙니다. 누가가 의도한 문학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4절은 사울만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7절은 같이 가던 자들도 들었다고 말하고, 22:9은 동행자들은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26:14은 사울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누가의 실수나 성경의 오류로 보아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가 사용한 ‘소리’라는 헬라어 ‘포네’의 용례입니다. 헬라어 명사 ‘포네’는 단순히 귀에 들리는 ‘소리’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말하는 ‘음성’ 혹은 ‘말’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 본문이 말하려는 의도를 종합해본다면,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모두 들었지만, 그 ‘소리’ 혹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은 사람은 사울뿐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치고 음성이 들렸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빛과 음성이다. 밝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을 보고 눈이 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2장에서 주의 사자가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참조, 마 17:5). 밝은 빛을 보고 땅에 엎드려진 사울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음성도 신적 계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출애굽기 3:1-6; 이사야 6:8; 누가복음 3:22; 9:35).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 대신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나중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주님은 자기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다고 고백합니다(26:14). 이 사실을 생생한 언어로 보여주려는 듯 누가는 하늘에서 부르는 사울의 이름 을 일반 내러티브에서 사용하던 ‘사울로스’ 대신 히브리어 음역을 사용합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놀란 사울은 엉겁결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것은 사울이 순간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여’는 단순히 윗사람을 높이는 존칭어일 뿐이다. 이에 하늘에서 예수의 답변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순간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울이 이 충격 적인 만남으로부터 그 의미를 깨닫는 데까지 꽤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애써왔던 과거의 열심과 삶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임을 뼈아프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나중에 이 순간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라고 회고합니다(갈 1:16), 사울은 또한 자기가 박해하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또한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가 직접 예수를 박해한 적은 없지만, 그를 따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그분을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절은 사울의 극적인 경험이 그와 동행하던 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26장에서는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므로 그들도 땅에 엎드려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시 일어나 말없이 서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더 많은 충격을 받은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목적지인 다메섹에 도착합니다.
그가 눈이 먼 것은 하나님의 형벌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정면으로 대적하던 자의 무력한 모습을 상징할 것입니다. 누가는 사울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금식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기 위한 목적인 동시에,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의 과거는 다 재정립되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주도하던 인생이 이끌려 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과거가 죽고 무너질 때 그분이 새롭게 자신을 지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