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私見聞錄 간행의 말씀 어떤 儀範(의범)과 鑑戒(감계)가 될 만한 일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는 곳은 매우 뜻있는 일로서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자료를 발.굴하여 세상에 널리 펴서 널리 옛 선현(先賢)의 뜻을 선양(宣揚)한다는 것은 매우 보람된 일이라고 하겠다 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은 효종(孝宗)의 부마(駙馬)이었던 동평위(東平尉) 정 재륜(鄭載崙)의 저술(著述)로서일명(一名) 동평견문록(東平見聞錄),견한록(遣閑錄) 등의 異名도 있으며,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필사본(筆寫本)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본회에서 간행하게 된 것인데, 그내용에 있어서는 책명(冊名)에 나타나 있듯이,저자(著者)가 공사(公私) 간에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전해오는 말들까지 수록(收錄)한 것이다.그의 아저씨뻘 되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 지현(鄭之賢)의 서에 의하면, 선배(先輩)와 장로(長老)들과 50년 동안 조정에서 어께를 나란히 하면서, 듣고 본 아름다운 말과 참다운 의논,그리고 가정에서 들은 것까지 기록하였는데,비록 미천한 자들의 말이라도 세상을 경계시킬 만한 것이며 반드시 收錄하였다, 고 하였으나,동평위(東平尉) 정 재륜(鄭載崙)이 직접 보고 체험한 효종(孝宗),현존(顯宗),숙종(肅宗) 당시의 일은 물론,인조(仁祖),광해(光海),선조()宣祖 이전의 일자까지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대개 부마(駙馬)가되면 임금의 총애를 믿고 안일(安逸)에 빠져 향락(享樂)을 일삼기가 일쑤인데, 본 저자는 그렇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변화가 극심했던 역대 왕조(王朝)의 정국(政局)을 직접 듣고 보면서 세태에 따라 변천하는 인심(人心)이라든가 풍속에 따라 무너지는 교화(敎化)를 염려하였으며, 어려운 상황에 임하였을 때,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임금이나 제상들의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거의 다 기록해서 후세의 본보기기 되게 한 데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 책은 1972년도에 열운(烈雲) 장 지영(張志暎) 님의 제의로 그분의 소장본(所藏本)을 대본으로 삼아,당시 본회 국역 위원으로 일하시던 진 치원(秦治源)님이 번역한 것을 또한 장 지영(張志暎) 님이 감수(監修)한 것인데, 그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출판을 보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가지 심히 유감스러운 것은 번역을 맡고 감수(監修)하여 주시던 분들이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섭섭한 감회를 금할 수 없다,그러나 그분들이 남겨 두고 가신 손떼는 이렇게 출판을 보아 우리 국학계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니,본회의 국역 사업에 있어 또다른 계기를 열어 놓았다는 데서 축하하여 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 책을 출판함에 있어 여러모로 도와주신 분들과 원본(原文) 저본(底本)의 영인(影印)을 주선해 주신 서울대 도서관 당국에 감사 드린다. 1983 년 4월 일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이 관구 공사견문(公私見聞) 전(前) 1.세종(世宗) 때에 한 어린 행희(幸姬)가 총애를 받음이 후궁(後宮) 중에 제일이어서 언제나 임금을 모시고 있었는데,그 행희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작은 일을 청하였다.세종 대왕께서 하교(下敎)하기를,아녀자로 하여금 감히 간청하는 말을 나오게 한 것은 내가 은총을 열어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계집이 어려서도 이러하니, 큰 다음에 어찌 되리라는 것은 알 만하다. 하고 이에 물리쳐 멀리하고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이 말은 나의 8대조(代祖) 직제학공(直提學公 鄭賜) 이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였으므로 이 이야기가 가정에 전해 내려와 얻어들은 것이다. 2.성종 대왕(成宗大王)이 한 왕녀(王女)를 무척 사랑하여 일찍이 왜진주(倭眞珠)로 만든 귀걸이를 하사하였는데, 궁중에서 돌려가며 구경하면서 귀중한 보배라고 하였다, 자손이 대대로 전하여 지금까지도 보존되었는데, 내가 한 번 빌려보니 요즈음 세상에서 보배라고 하는 것에는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였다.그러니 그세에 사치를 숭상하는 것을 이로써 또한 볼 수 잇는 것이다. 3.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서연(書筵)을 열고 강관(講官)이 책을 펼치고 글을 읽어주는데, 홀연히 안색이 참담하여지면서 천천히 궁관(宮官)에게 명하기를, “글 읽는 것을 중단하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다시 나와 말하기를 “벌이 소매 속으로 들어가 몹시 쏘았는데,겨우 잡아버렸다.” 하였다. 당시 인종은 어린 나이로서 거룩하신 덕이 천성으로 이룩되어 침착하기가 이와 같았는데, 나는 젊었을 때에 가정에서 들었다. 4.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빈(嬪) 윤씨(尹氏)가 졸(卒)하였을 때에 빈소(殯所)를 창경궁(昌慶宮) 안의 통명전(通明殿)에 설치하고 장차 세자(世子)에게 부장(附葬)하려고 하였는데, 이미 날짜를 받아 놓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임금이 창황중에 서울을 떠나게 되자, 드디어 구덩이를 파고 임시로 후원(後苑)에 매장하였다.다음해에 환도(還都 도심으로돌아옴)하여 보니, 벌써 파내버려서 마침내 찿지를 못하였고, 그 구덩이는 지금도 움푹 패인 대로 두고 메우지를 않았다.내가 일찍이 눈으로 보고서 늙은 내시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순회(順懷)는 명종(明宗)의 세자이고 순회 世子의 빈(嬪) 윤씨는 참판(參判) 윤 옥(尹玉)의 딸이다.세자가 계해년(癸亥年 1563년明宗 18년)에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13 세였다. 빈이 동궁에 있을 때 마음이 신령스러워 앞일을 아는 것이 많이 있었는데, 한번은 시녀에게 말 하기를, “내 장차 어느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죽자 곧 장례를 하면 관이 땅속에 들어가겠지먄 만일 예절에 구애되어 장례지내는 날짜를 좀 더디게 하면 시체가 들판에 버려져서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다.” 하므로, 시중드는 사람이 헛소리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돌아간 연월일이 전에 말한대로 맞았고, 또 그 빈소에 있어서는 왜놈들이 갑자기 서울을 핍박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 또 그 말과 같았다. 효종(孝宗) 때에 선조조(宣祖朝)의 늙은 궁인이 있어, 궁중에 있을 적에 젊어서 순회빈(順懷嬪)의 시녀에게서 직접 들은 말을 말한 것으로, 청평(靑平) 심 도위(沈都尉 沈益顯(심익현))가 듣고 뒤에 나에게 말한 것이다. 5.선조(宣祖)는 검박한 덕을 숭상하여 입는 옷에는 비단이 없고 평소의 음식에는 두 가지 고기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한 번은 서교(西郊)에서 명(明)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할 때에 내시(內侍)가 점심 수라를 올렸다, 상을 물릴 적에 여러 의빈(儀賓)들을 불러서 하사하도록 명하였는데, 음식은 다만 물만밥 한 그릇과 생선말린 것 대여섯 토막에 초에 담근 생강과 물김찌와 간장뿐이였다,여러 사람이 먹기를 마치니, 임금이 명하여 남은 것은 꾸려서 싸가지고 가게 하면서 말하기, ‘이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이는 선군(先君 죽은 아버지) 익헌공(翼憲公 鄭太和)이 해숭위(海嵩尉) 윤공(尹公) 신지(新之)에게서 들은 것인데, 그는 선조의 사위로 시효는 문목(文穆)이다. 6.선조(宣祖) 때에 입시(入侍)하였던 대신(臺臣사헌부의 관원) 가운데 근래의 복식이 너무 화려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조는 속옷을 뒤집어 군신(群臣)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 옷도 무명을 쓰는데, 신자(臣子)가 입는 것이 어찌 나보자 지나치게 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다.그 뒤부터는 사치하는 풍습이 일제 변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세속을 교화(敎化)시키는 계기가 잠깐 사이에 있다는 말이 맞다. 나의 증조(曾祖) 좌의정부군(左議政府君 鄭 昌衍 정창연)이 친히 임금의 하교(下敎)를 받들었으므로 항상 가정에서 이야기하엿다.선조가 입었던 무명옷은 아직도 그 당시 왕자(王子)의 후손 집에 있는데, 본 사람이 많이 있다. 7.선조(宣祖) 때에 내시 이 봉정(李鳳庭)이 향상 임금 곁에 가까이 모시면서 붓과 벼루의 시중을 받드는 사이에 자못 임금이 쓰는 필법(筆法)을 배웠었다.동고(東皐) 이 준경(李浚慶)이 그 때에 영의정(領議政)이었는데, 이 봉정을 패초(牌招)하여 꾸짖기를 패초(牌招:승지(承旨)가 왕명(王命)을 받고 신하를 부름.명 자를 쓴 붉은 패(牌)에 부름을 받은 사람의 성명을 기입하여 승정원의 하례(下隷)를 시켜서 보냄) 너는 내시로서 임금의 글씨를 모방하는데,장차 무엇을 하려 하느 것이냐? 고치지 아니하면 마땅히 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하니 이 봉정이 크게 혼이 나서 송설체(松雪體)를 본받아 글씨체를 바꾸었으므로, 선조가 듣고 기뻐하였다. 나는 이 말을 선배(先輩)에게서 들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였는데,인흥군(仁興君)이 지은 월창야화(月窓夜話)에 또한 이 말이 실린 것을 보았다. 인흥군은 선조조의 왕자이므로 그 말은 마땅히 믿을 만한 것이다. 8.해승위(海嵩尉) 윤공(尹公 尹新之)이 향상 말하기를 선조께서 일찍이 여러 공자(公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내가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라고 여기느냐? 한 사람이라도 살아아갈 수가 업게 되면 모두 나의 걱정거리이다. 어찌 너희들같이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얽매인 데가없는 자와 갈겠는가? 나로 하여금 하성군(河城君) 녹봉(祿俸) 정도만 받아 조석(朝夕)이나 이바지하게 하고 마음에 걱정이 없게 해 준다면 반드시 남면(南面 임금의 지위를 말함)하는 즐거움보다 나을 것이다, 하였으니,이는 바로 황옥(黃屋임금의 지위를 말함)이 마음에 원하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나,능히 중흥(中興)시킬 대업(大業)을 가진 것이다.하였다. 하성군(河城君)은 선조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전을 일컬음) 떼에 작호(爵號)이다. 9.선조(宣祖)때에 상방(尙方)에서 초피(貂皮)를 중국(中國)으로부터 무역하여 난모(煖帽 방한모)를 만들어 올렸다, (尙方 尙衣院의 별칭으로 國王과 王妃의 의복을 만들어 바치고,궁중의 보화 등을 관장하였음) 임금이 그것을 쓰고 명(明)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하니, 명나라 조사가 묻기를 임금님의 초피(貂皮) 모자가 너무 덥지 않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배나 따뜻합니다. 하였더니, 명나라 조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초피(貂皮)가 아닙니다.중국의 아무 곳에서 나는 고양이 털의 빛깔이 초피(貂皮)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귀국의 사람이 속아서 사온 것입니다.너무 더워서 사람에게 해로우므로 오래 되면 머리가 아플 것이니, 빨리 벗어버리소서. 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말을 전하였던 역관(譯官)의 아들로 학문을 하는 늙은이가 나를 위하여 그가 들은 것을 이 같이 일려준 것이다. 10.선조(宣祖)의 태평 시대 때에 한 어사(御史)가 감사(監司)와 더불어 앉는 차례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재결(裁決)하여 줄 것을 청하니,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왕의 직속 신하는 비록 미미하더라도 서열이 제후(諸侯)의 위에 있는 것이니,어사(御史)가 당연히 윗자리에 있어야한다.하였다. 뒤에 감사(監司)가 어사(御史)와 더불어 앉는 차례를 다투다가 다시 아뢰니,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모두 명을 받은 신하이니,한결같이 자급(資級)에 따라 높고 낮음을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뒤에 강경(講經)하는 신하가 어탑(御榻) 앞에서 진달(陳達)하기를, 일에 의심이 있는 것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결정하게 해야 하는, 전하(殿下)께서 비답하신 앞뒤의 말씀이 크게 서로 어긋나니,봉행할 때에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읍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경솔하였다. 이 뒤로는 마땅히 경계하였다. 11.선조(宣祖)때에 근시(近侍)하는 중관(中官 내시)한 사람이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갈 때에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서 많이들 관대(款待)하였으나,예산(醴山)의 원 만이 법을 지키며 정해진 격식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더한 것이 없었다.중관(中官)이 양심을 품고 계교로써 중상하려 하여 돌아와서 임금에게 고하기를,여러 고을 중에서 아무아무 원들은 신을 대접하기를 모두 정해진 격식대로 하는데,예산(禮山)의 원 만은 신이 지존(至尊)을 가까이 모신다는 이유로 특별히 후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경계까지 맞이하여 문안하고 하찮은 시중까지 들어주어서 신의 동리에 영광(榮光)이 되었는데 ,이는 추호라도 모두 성상의 은혜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무아무 원들은 법을 잘 지킨다 하여 가상하게 여기고,예산(禮山)의 원은 중인(中人)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비루하게 여겨서 월등하게 올려주고 깎아내리고 하였다.그러므로 외간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나왔는데, 그것은 환관 대접을 후하게 하고 박하게 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뒤에 강경(講經)하는 신하 가운데 그 사실을 소상히 아뢰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그 속은 것을 깨닫고,이는 모두 중관(中官)이 흑백(黑白)을 변란(變亂)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유시하니,여러 사람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