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상규(한국디자인문화재단 사무국장)
“나는 카페 <어떤 날>에 앉아 있다. 기우뚱거리는 나무 탁자 위에는 두툼한 일요일판 신문 뭉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담긴 커다란 유리잔이 놓여 있다...”
- 리아 코헨, <탁자 위의 세계> 중에서
취향의 무력화
사람들은 제법 다양한 취향을 가진 것 같으면서도 사실 몇 가지 정도에 몰입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커피만 해도 그렇다. 바리스타가 인기 직종으로 떠올랐고, G7 국가들 보다 1.6배 비싼 커피 값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스타벅스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그런데도 또 커피믹스는 2006년 들어서 6,000억 원 이상의 시장규모를 갖게 되었다. 이것을 수량으로 따지면 한 해에 40억 개 이상이 소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커피프린스 1호점> 이후의 변화 국면을 고려하더라도, 인스턴트커피 소비율이 원두커피에 비해 몹시 높은 한국적 특수성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이야 사진가 윤광준 씨처럼 자센하우스 수동식 커피 분쇄기로 원두를 갈아 비알레띠에서 뽑아낸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내 손은 이미 커피믹스에 닿아 있다.
커피를 닮은 브라운 컬러를 중심으로 노랑과 빨강으로 분산되는 커피믹스 스틱의 컬러 스펙트럼은 인스턴트커피의 레이블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대에는 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가 커피 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벌였다. 스타벅스가 국내에 진출하기 훨씬 전이었던 그때는 커피가 곧 인스턴트커피를 의미했고, 다방에서는 맥심이냐 초이스냐에 따라 커피 메뉴가 양분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설탕 한 스푼에 프리머 두 스푼을 넣는 식의 기호가 있었지만, 이윽고 등장한 커피믹스는 많은 사람들의 간사한 혀를 표준비율에 맞추게 했다. 명절 선물 품목에서 커피선물세트가 뒤로 밀려나고 풍속커피, 설탕, 프리머의 3종 세트 뚜껑을 여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제 누군가에게 ‘설탕 몇 스푼?’이라고 선호하는 비율을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취향의 확인 절차가 삭제된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
디자인에서 취향은 몹시 중요한 문제다. 취향이 무시된다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데, 조금 억지를 부려보자면 이는 포드의 ‘모델 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본격적으로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으로 생산된 지 8년 만에, ‘모델 T’는 미국 자동차 시장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곧 시장에서 밀려났다. 어떤 이는 포드의 이러한 쇠퇴를 할리 얼(Harley Earl)이 주도한 GM 자동차의 스타일링 전략과 비교하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새겨보는 교훈적인 사례로 설명하기도 한다.
‘검은 색인 한 어떤 색이라도(You can paint it any color, so long as it's black)’ 가능하다는 한정적인 조건 속에서, 취향의 문제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헨리 포드 재단에서는 실제로 포드가 그렇게 말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검은 색이 가장 빨리 건조되는 페인트라는 장점 때문에 취향에 대한 배려를 뒷전으로 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포드는 뒤늦게 이런 문제를 보완하고자 ‘모델 A'를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색을 넘어서 스타일의 선호를 따지게 된 터라 몇 가지 색을 선택하는 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었다.
1998년 슈퍼탤런트 출신 송윤아를 내세운 맥심 커피믹스 광고. 설탕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주력했다.
선택을 허용하되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방식이 커피믹스에서는 낱개 포장지의 끝자락을 쥐어서 설탕과 프리머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송윤아가 등장한 CF에서는 세상사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중에 그래도 ‘내 맘대로 조절’되는 것이 있다고 위안하면서, 커피믹스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개인 편차가 수용된다는 일말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테이스터즈 초이스’라는 이름을 보면 분명 ‘초이스’가 있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배용준일 수도 있고 다니엘 헤니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의 선택이란 그들이 바로 이 회사의 커피믹스를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라, 회사가 그를 CF의 모델로 선택했고 그들이 출연하기로 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테이스터스 초이스는 ‘부드러운 맛과 풍부한 향’을 전달할 인물로 배용준을 선정했다.
암묵적인 합의
커피믹스는 낱개로 존재하기 보다는 묶음으로 제시되고 그렇게 보급된다. 유통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편의점과 대형할인매장에서 접하는 이미지, 즉 손잡이 구멍이 난 큰 봉지 또는 종이 상자에 보너스 상품이 붙어있는 패키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모습과 연결되곤 한다.
대형할인점과 쇼핑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포장
디자인비평가 카시와기 히로시는 일본의 편의점이 소비의 개인주의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소비를 이미 디지털 정보로 변환하여 데이터로서 처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되고, 스물 네 시간 끊임없이 물품 재고 수량과 물류 공급이 원활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트’로 대변되는 대형할인점도 결국은 철저한 물류 시스템을 통해 소비와 공급의 시간 격차를 최소화하는 과정으로 집약된다. 소비와 유통 과정 전체가 포드 시스템의 21세기 버전으로 진화한 셈이다. 커피믹스로 대표되는 ‘취향의 표준화’는 유통의 가상 컨베이어벨트에 올라가 사람들의 혀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패스트푸드의 매뉴얼에 의해 입맛이 길들여진 것처럼, 기호식품에서도 취향이 편의에 의해 유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실에서 더 이상 직급이 낮은 사람이 심부름을 맡지 않고 개인이 직접 커피를 타게 되면서 커피믹스와 종이컵으로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개인이 선호하는 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노동(?)에 투입되는 시간을 줄이는 편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커피 한잔
다시 리아 코헨이 풀어낸 이야기로 돌아가면, 코헨은 우리가 포장된 상태의 물건을 구입하게 되면서 원재료와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감추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저녁 식탁 위에 오르는 감자가 어느 땅에서 나온 것인지를 아는 것이 당연했고, 누구네 암소를 잡아 나온 가죽인지, 어떤 샘물 또는 우물에서 길어온 물인지 알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친 국가라면 이런 사실들은 먼 기억 속의 일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코헨은 ‘관계라는 개념은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아니다. 진정한 것은 오직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내 입 안에 담겨 있는 커피 그 자체뿐이다. 그것이 나에게 속하고, 나를 위해 존재하며, 내가 소유한 영역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현실을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정수기 앞에 서서 종이컵에 털어 넣는 한 포의 커피가 지닌 사연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친환경 공정무역 커피처럼 커피콩을 정성스레 재배한 농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가게가 생기는 것을 보면, 커피 한 잔에도 건강과 부의 분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 암울하지만은 않다.
미각의 산업화
현실적인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면, 커피믹스의 맛은 디자인과 제조과정을 거쳐 유통되는 상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화학물질의 인공적인 맛으로 전통적인 입맛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전의 조미료 ‘아지노모도’였고 이후 미원으로 대표되는 조미료 상품으로 이어졌다. 감칠맛이라고 표현한 조미료의 맛은 적은 양으로 맛을 내는 화학물질의 탁월한 효과로 포장되었다.
일본 화학자가 개발한 인공감미료 아지노모도 광고. 1910년대부터 국내에서 판매되었다.
조미료에 버금가는 커피믹스는 공업생산물의 균질한 맛을 내면서도 어떤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제시되는 안심(몸에 나쁘지 않다)과 합의(내 입맛에 맞다)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 수요에 따라 생산이 늘어나는 것이니 자발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느덧 표준화된 맛에 미각이 맞추어지는 것이 달갑지는 않다. 지금 눈앞에 있는 커피의 이력, 예컨대 어떤 노동을 거쳐서 어떤 제조 과정을 따라서 여기까지 흘러왔는가 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달짝지근한 커피를 찾게 되는 현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를 생각해보는 편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먹는 것에도 선택권이 몹시 제한적이다. 싫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그프리드 기디온(Siegfried Giedion)이 <기계화의 명령 Mechanization Takes Command>에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고전으로 19세기말의 소, 돼지의 도축 시스템을 설명한 지 딱 60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무역의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도 모를 고깃덩어리가 뿌려진다.
돼지를 잡아서 매다는 기계의 특허 신청 도판(1882년, 미국)
출전: 지그프리드 기디온 <기계화의 명령>
빅터 마골린(Victor Margolin)은 <인공물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the Artificial>에서 인공물의 복잡한 양상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룰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일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인공물이 자연 영역을 침투하는 불가항력적인 양상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거기에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오로지 투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단정했다. 투쟁이라고 해야 고작 몸에 좋지 않을 것이 뻔한 것을 먹지 않는 것,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인데 요즘은 그나마도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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