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한계
사람들이 저를 소개할 때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임을 강조하시는 분이 간혹 있습니다. 많이 읽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에 저는 칭찬도 핀잔도 아닌 그 말씀을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입니다.
한국에 살 때는 기술 서적 외에는 별로 접할 여유가 없었기에 통상 이야기하는 책을 가깝게 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 기술 사항이 요구하는 바대로 사는 우리의 삶은 참으로 팍팍하지 않으냐.
- 마침표 하나 빠트린 것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브라운관을 쳐다보는 신세가 딱하지 않은가!
- 토목 공사 현장은 몇 미터를 다루고, 건축은 몇 센티미터, 그리고 플랜트틑 몇 밀리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는데, 다루는 단위의 따라 인간의 그릇이 바뀌지 않는가! 우리는!
같은 또래의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을 찾았습니다. 회사가 인사동 근처에 있었기에 근처에 즐비하게 많은 미술관 순례를 주기적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부서에는 회사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직원도 있었고, 지금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친구는 그때부터 출사를 다녔는데, 그런 환경이 남은 자들에게 계기를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순례자들은 간혹 전시된 작품의 이름을 맞추는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더러 알아맞히기도 했으나, 순례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순례자의 길을 언제나 어려운가 봅니다. 생각의 틀을 벗기도 쉽지 않지요.
제가 아마 그때쯤 전공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을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하기 전에 형이 읽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았던 책이었습니다. 이름하여 무협지라고 하지요.
아버지 책 장에 즐비하게 꽂혀있던 그 많은 책 중에서 제가 기억하는 책이라고는 "동물기"가 전부였고, 최근에 같은 판본의 바로 그 책을 보았을 때, 심하게 낡았음에도 어찌나 반가웠던지, 한동안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책은 반가웠지만 실상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머리 크고 접했던 "무협지"도 다양하게 읽지 못했습니다. 그 한 질의 무협지도 소화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줄거리도 기억해 내지 못했으니까요. 어찌 다른 책을 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월급을 타면 안국역 지하에 있는 "세리 음반"에서 CD를 한 장씩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도 있었거니와 고교 시절 친구들과 광주 시내의 몇몇 음악 카페에 들락거렸던 기억이 도움이 되기도 했지요. 그렇게 한 장 두 장 CD가 모였습니다.
그러나 책이나 CD 모두 저의 머릿속에 담아 두기에는 저의 기억 용량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머릿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필요한 시기에 꺼내기에는 저의 CPU 성능이나 운영체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생활이 단순해서 구글 달력 정도에 유지하는 나의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기 없지만, 사실 일정이라고도 부를만한 것이 없지요, 그땐 매일매일 적은 다이어리가 없었다면 사회생활을 하기에 저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을 겁니다.
지금, 음악에 대해서는 아내가 저의 보조 기억 장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어디 음악뿐이겠습니까? 책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읽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아쉬우니까 기록을 남기자, 해서 시작한 것이 다음 북카페에 독서 노트를 남기는 것입니다. 이 작업도 한국에서는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이처럼 인터넷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으니까요.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독서에 대한 기본 생각은 언제나 아버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제일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물은 모두 빠져나간다. 하지만 콩은 자라 콩나물이 된다. 이런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더 멋있게 말씀하셨는데, 전하고 표현하는 데에 있어 저의 한계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영화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장면이 몇몇 있을 뿐이지요. 더불어 영화에 대한 총체적인 감정이 남아 있지요. 좋다. 다시 보고 싶다. 그러니 보고 싶지 않은 영화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책도, 음악도 같습니다.
책의 한 부분, 또는 전체적인 느낌이 좋아서, 나는 그 책이 좋습니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고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도 좋지요. 차례만 보고 덮어도 그 차례를 보고 느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어느 정도 읽다 보면 언젠가 읽었던 책 같아서 기록을 뒤져봅니다. 어떤 때는 읽은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물론 좋은 책을 접하기 위해서 나름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콩나물시루에 좋은 물을 붓고자 노력하는 자세와 매일반입니다. 왜 콩나물시루인지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 때 같은 마을 친구 집이 콩나물을 길러 파는 집이었거든요. 그 깜깜하고 축축하고 싸늘한 기억이 아버지의 말씀과 엮여 큰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고 봅니다.
주로 검증된 책을 선택합니다. 발간된 지 몇 년이 지나고 계속 읽히는 작품들, 클래식 반열에 오르는 책도 누군가의 추천이 있으면 리스트에 올립니다. 온라인 서점의 보관함에는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이 가득합니다. 목록에서 책을 넣고 빼는 작업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평상시에 생각했던 우선순위와 무관하게 간택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책장에 들어간 친구들은 언제나 나의 눈에 들어가기를 목 놓아 기다리지요. 그렇게 구해놓고 읽지 못한 책이 상당하단 이야기입니다.
늘 책을 구매해서 읽은 것은 아닙니다. 나의 독서 인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뉴질랜드에 와서 도서관에서 발견한 우리글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소수 민족이지만 그들을 위해서 책을 비치해 주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클랜드 전역에 널려 있는 도서관에 비치된 한글책도 한 장소에서 빌려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그래서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초기에 많이 빌려 보았습니다. 도서관의 책은 그때그때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한 책이 많이 있지요. 최근작 위주의 장서입니다.
기억의 한계라고 제목을 정해놓고선, 저의 독서 성향에 대해서 주절주절 적은 글이 되었습니다. 저 친구는 책을 읽고 그 내용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핀잔하신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내 몸에 새겨진 모든 상처의 내력을 기억해 내지 못하듯이 내 마음, 정신,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친 말이나 장면, 느낌을 나는 다 기억해 낼 수 없습니다.
헤세의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를 읽고 나도 한 번쯤 나의 책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책 장을 덮은 지 며칠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을 따져보니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동안 100년 전의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를 위로해 주는 구절을 만나기도 했으니, 다시 한번 내 생각을 확인받고, 또 다른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시 읽을 책 목록에 이 책은 넣는 것과, 그가 쓴 책을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실로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그의 저작을 책꽂이에 몇 권 보관하고 있지만 더 늘어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함께하는 것 또한 나에게는 참으로 자연스럽습니다.
나에게 책은 내가 수준 미달인 기억공간을 가졌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우쳐 줌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는 이가 빠진 동그라미임을 자각하게 하는 밉지 않은 친구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이 친구 관계가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댓글 왜 책을 읽는가? 이 물음에 수많은 대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책을 읽고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거나 비워 내는 작업을 하리라.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살아 있는 한 그렇게 하리라, 자신의 방식대로.
왜 산에 오르는가? 산이 거기에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