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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기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1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의로운 행위로 구원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흉악한 죄를 범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회개한 후 완전히 돌이키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 즉시 깨끗함을 받고, 의롭다 해주심을 얻으며,
하나님과 다시 화평한 관계가 되어 구원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와주신 이유이며, 하나님 사랑의 확증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할 일은 회개 외엔 따로 없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뿐이기에
‘은혜’라고 불려온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뭔가 큰 업적을 달성하고, 완벽히 의로워져서 어떤 행위를 해야만 하거나
100억을 예물로 바칠 수 있는 자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면
우리는 은혜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가장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가 바로 천국복음의 핵심, 그리고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완벽히 의로워져서 어떤 행위를 해야만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가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해라. 완벽한 자가 되라.”고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요일 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자신의 죄, 더불어 그동안 욕심을 따라 육신적인 것들을 추구하던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해주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은혜’ 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아직도 이 부분에서 확고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여
영적으로 갈팡질팡한 이들이 많기에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5:14 하
(14)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분은 쏙 빼고,
“원래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믿음만 있다면 구원 확정이지,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라면서
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후의
참된 회개와 돌이킴으로 이루어지기에
특정 행위를 해야만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신 것은
어떤 행위를 언급하신 것이 아닌 ‘참된 회개의 정의’를 내려주신 확실한 상위의 개념으로서
구원의 조건에서 최우선되는 항목입니다.
‘용서를 받은 이후에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구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그 모습’이
바로 돌이킴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그 돌이킴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입니다.
회개 후에도 쉽게 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회개와 돌이킴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히 12:3-4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같은 죄, 비슷한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면서 회개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하는 것은 시뻘건 거짓말입니다.
최소한 ‘아직은 연약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모습이 남아있기에 부끄럽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싸우고 있어야‘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과정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자신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도만 하는 (혹은 기도조차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너무 많다하시며,
하나님께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그 때 분명히 기도했잖아요? 기억하시죠?
근데 왜 이래요? 왜 이 모양 인가요? 제 기도는 안 들으시나요?
기도해봤자 소용도 없네...“ 이러고 있습니다.
마 22:14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눅 13:23-24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래서 구원 받게 될 자들의 수가 적은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대항하여 싸워온 자, 이제는 이기고 있는 자가 극소수이기에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은커녕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자들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사랑함이 점점 식어가고,
오직 욕심을 따라 자신의 이익만 챙기며, 세상을 사랑함이 만연할수록
죄에 물든 자들은 점점 많아지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기에
이 내용에 대하여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시 51:17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의 ‘상한 심령’은 ‘자기 연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슬픈 처지에 몰입하여 그 처지를 알아주시는 하나님께 위로를 받았다며
“오늘 예배 참 좋았다. 은혜 받았다.”면서 좋아들 합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은 채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아닌 자기 위로의 내용을 담은 ccm을 불러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선 기분이 후련하면서 좀 나아지니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아니라 그저 자기 위로 시간이었을 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란
예수님을 죽인 자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또 가서 죄를 범한 흉측한 자신의 정체,
예수님을 또 끄집어내어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한 자신의 사악함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해서 마음이 심히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마음을 품은 자의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참 예배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속에서 죄와 싸울 생각이 없고,
‘주중에 범한 죄들은 주일날 교회에 가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면 그게 신앙생활이지~ 그게 은혜 받은 거지~’ 하는 자는
예배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입니다.
히 6:4-6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나는 또 욕심과 쾌락에 이끌려 죄를 선택했구나.
내가 선택한 죄로 인해 내가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졌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가 바로 나구나.
예수님을 또 질질 끌고 와서 조롱하며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님의 옷을 빼앗아 팔아먹고,
예수님의 머리에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금속이 달린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쳐서 예수님의 뼈와 내장을 다 드러내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든 후 십자가에 못 박아 잔인하게 죽인 자가
다름 아닌 바로 나였구나.‘ 하며 진심으로 슬퍼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서
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시 34:18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자기 인생에 초점을 맞춘 어리석은 모습으로,
자기 연민에 취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만을 받고자,
마음의 평안과 안심을 얻고자 교회에 가고, 예배를 한 번 올려보려는 자의 그 종교의식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두려운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롬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모두 다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죄 사함을 거저 받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이제부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자, 소극적으로 싸우려는 자세만 취하다가
쉽게 욕심에 이끌려 계속해서 패배하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주신 일들을 기억하기에
죄를 이기는 자,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자가
바로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지키는 자이며,
예수님께서 다시 와주시는 그 날에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은 어떤 누구의 개인적 주장도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내용이기에 논란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해주심을 얻었다면
이제는 반드시 죄와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기에 계속해서 죄와, 마귀와 친밀하게 지내는 자는
각자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이 다 지나는 순간
불순종의 그 모습 그대로 지옥에 멸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약한지를 파악하여
죄를 범할만한 환경을 애초에 피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도 최대한 무던하게 (까다롭지 않고, 너그러우며, 수더분함)
하는 것도 이 부분에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쉽게 죄를 범할만한 환경에 두고, 또 죄를 범하면서 후회하는 것만 반복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은혜도, 구원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한 번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죄를 계속해서 범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 즉 듣기 좋은 은혜의 말씀은 삼키고
순종하기 싫은 말씀은 뱉어버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니라 ‘나’, 즉 하나님과 나 1:1의 관계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춰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넘어지고, 감정이 요동치며, 결국 죄 짓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며,
각자 자신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여 그 부분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이 부분에선 서로 중보기도를 청하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개념도 중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교회는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성도 각 사람이 바로 교회이기에)
자꾸 우리, 우리 교회, 내 가족, 내 자녀 하다보면 하나님과의 1:1의 관계성을 잃기 쉽고,
어느 날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채 공허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냉정하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인생은 결국 혼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 명씩 서서 각자가 행한 대로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속감, 다른 누군가에게 받는 지지와 사랑, 화목한 가정 등
이런 것들이 없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 외롭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특징 중 하나이며,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망치게 될
‘죄의 반복’을 능동적으로 거부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 하나님과 친밀한 분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긴 고통 끝에 부부가 끝내 이혼을 하고, 사랑하는 배우자가 먼저 죽음을 맞이하고,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는 패륜이 일어나는 등의 일들로 가정이 무너진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지
그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거나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는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신앙을 지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만이 진정한 불행이고, 슬픔이기에
그 어떤 존재도 그 사람이 가진 참 행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다. 우리이기 전에 나는 나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과 나의 길이지 다른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면
누구에게 그렇게 서운할 것도, 미워할 것도,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거나 적어질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행복과 만족을 기대하기에 실망이 있고,
우울과 슬픔도 자주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이 그저 혼자서만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옆에 누가 있든 없든 크게 상관이 없고,
있으면 감사하고, 없어도 그것대로 감사한 것,
그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고 계시니 나는 기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나는 앞으로도 죄와 싸워서 이기고 싶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입니다.
오늘날 가정이 불화해서 불행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고민과 문제가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내 얘기를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사랑해주는 사람,
서로 사랑하는 이가 없어서 외롭고 슬프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기준, 슬픔의 기준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친밀할 때 행복하고,
내가 다시 범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불행하고, 슬퍼져야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혹은 어떤 환경에 의해 삶 전체가 좌우되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자이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든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행복에 겨운 자가 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를 다 들어줄 이는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 제 마음속의 얘기를 들어본다면 누구라도 제게 측은지심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각자 인생의 깊은 사연이 다 있으실 겁니다.
사람에게 말해봤자 나중에 약점으로 돌아올 뿐이기에 하나님 앞에 가셔서 다 말씀드리면 됩니다.)
20대의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 함께 공부하던 학우 중에 늘 조용한 전도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만을 보이던 분이었습니다.
처음엔 사교성에 관심이 없는 분인가 했지만 클래스 내에 작은 분쟁이 있었을 때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 분이 입을 열고 하시는 말을 들어보니
‘예수님을 많이 닮은 분이구나.’ 하고 모두가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한두 달 내숭을 떨다가 나중엔 본색을 드러내는 보기 흔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 분은 함께 공부하는 몇 학기 동안 늘 한결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졸업 후의 진로와 관련된 주제로 얘기를 나눠보니 그 분은
어떤 작은 개척교회의 사모님이셨고 부군 되시는 목사님을 잘 보필하기 위해,
즉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신 것이지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만족감을 찾는 사람에 비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조용해지고,
꼭 필요한 말만하게 되며, 어느 순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드러나
모두가 그를 인정하게 되는 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기에
항상 언행을 주의하며 마음을 지키는 것에 애를 써서
‘다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매일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거의 안 하시는 분이기에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 사모님은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이제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 그와 같은 마음이 되셨을 겁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 잘하는 사람은 없고,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는 완벽한 사람도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한 자리에서 멈춰있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반면 행복의 필수요소가 오로지 세상적인 조건과 육신인 이들의 특징은
사랑하는 연인, 친구들과의 왁자지껄한 모임, 화목한 가정,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유지하게 해주는 돈 등이 갑자기 없어지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시 범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하지 않고, 우울하고,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면
반드시 이 부분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출 20:5-6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34:14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나 1:2-3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투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은 자기만 사랑 받기 원하신다는 내용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깊은 뜻입니다.
우리의 행복 기준이 세상의 것들, 마음이 잘 맞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라면,
그리고 죄와 싸워서 이기려는 순종의 마음은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니 다시 죄를 범해도 괜찮다며 삶의 기준을 잘못 잡고 있다면
질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것들(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것들)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라 해도 말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시하여 계속 죄를 범하면서도
지금의 이 믿음만 있으면 될 거라는 믿음은 애초에 잘못된 믿음이기에
그 잘못된 믿음을 거두시며, 고난의 훈련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진짜 믿음을 품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짓이겨 죽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욜 2:12-14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그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항상 집중하면서
행복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어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요동함 없이, 불행도 없이
하나님과 행복하게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어 나아가십시다.
구원은 특정 행위나 업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거저 받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는 자에게 그 은혜도 있는 것이지
‘어차피 다 죄인이야. 대충 살자. 나만 그래? 다들 그래. 인생이 원래 그래~’
하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지 않고,
“너희는 원래 죄인이니 어쩔 수 없다. 또 가서는 똑같은 죄를 범하겠지..
이번엔 내가 나서서 네가 죽지 않고 살았지만 다음에는 장담할 수 없다?
죄를 범해도 사람들에게 걸리지만 마라...안 걸리고 또 회개하면 괜찮을 거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죄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애쓰지 않고,
여전히 죄와 회개를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죄송하기 때문에
죄와 피 흘리기까지,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이제는 죄와 싸워 이김으로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는 사실은 성경말씀의 진리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항상 잊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자기 기분과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는
절대 죄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여 돌이킨 이후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과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아 택하심을 얻게 될 자들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자의 수가 지극히 적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디 다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자기 기분의 노예가 되지도 말며,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여 그 극소수중의 한 명이 되는 인생을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십시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새기고 즉시 삶에 적용함으로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매일 기억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죄와 싸워 이기고,
예수님께서 다시 와주시는 그 날, 혹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자, (예수님의) ‘내게 주신 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각자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후로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존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히 6:7-8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24.01.28. 주일설교
감사와 다짐의 노래
212장 너 성결키 위해
1.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너 주안에 있어 늘 성경 보고
온 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
2.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이 마다 주 생각하리
3. 너 성결키 위해 주 따라가고 일 다급하여도 당황치 말고
참 즐거울 때나 또 슬플 때나 너 주님만 믿고 늘 따라가라
4. 너 성결키 위해 늘 안심하며 네 소원을 주께 다 맡기어라
너 성령을 받아 주 섬겨 살면 저 천국에 가서 더 잘 섬기리
첫댓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깊은 사랑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많이 궁금한 구절이었는데 무식한 자를 가르쳐주시니 감사뿐입니다. 목사님께도 고맙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 이기시며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하는데 피는 커녕
너무나 안일하게 죄를 일상으로 여기는 제 모습이
괴롭습니다.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저도 죄를
대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악하면서도 교만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지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늘 겸손히 나아가는 사람이 솔직한 자로서 구원에 가깝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끝까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시며
예수님의 참 제자로 성공의 인생을 완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