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사랑과 》
살후 3:3~5
〈 나비효과의 실제 〉
제주시 조천읍에 가면 ‘거문오름’이 있습니다.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거문오름을 탐방하려면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합니다.
출발시간도 지정되어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그룹으로 출발하는데, 안내인이 동반합니다.
거문오름 트레킹 때는 까다로운 제약이 있습니다.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우산이나 스틱을 지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트레킹 중에 스틱이나 우산 꼭지로 땅을 찍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에게 그까짓 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틱에 찍힌 자국에 빗물이 고이면, 그곳이 나중에는 골짜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_ 지지난 주 설교할 때, 나비효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_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스틱으로 땅을 찍으면, 유네스코 자연유산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나비효과를 염두에 둔 조치입니다.
나비효과를 말씀드릴 때, 도서관에 빌린 책에 그어놓은 밑줄 이야기도 했습니다.
밑줄이 그어진 책을 볼 때 “공공질서 의식 없는 몰상식한 사람이군~”합니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책을 빨리 훑어야 할 때는 먼저 읽은 사람이 그어놓은 밑줄!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밑줄에도 나비효과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은 밑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오늘은 어떤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 함께 하면서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 신에 대한 첫 마디 〉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해달별 산강바다를 보면서,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만물을 만든 이는 신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 존재냐?’ 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나왔습니다마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한 마디가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400년 먼저 태어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신은 선하고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플라톤의 말은 두 가지 요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신은 선하다. 둘째, 신은 불변한다.
플라톤의 이 말이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큽니다.
‘브라질의 나비가 일으킨 바람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킨’ 정도는 약과입니다.
플라톤이 한 말을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말 중에서 두 번째 ‘신은 불변한다’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불변한다’는 말을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로 바꿉니다.
사랑은 ‘마음이 변하는 것’이고, ‘행동이 변하는 것’입니다.
_ 갑돌이가 갑순이를 소 닭보듯 했는데, 어느날 사랑에 꽂혔습니다.
_ 달이 떠도 갑순이, 해가 떠도 갑순이 생각뿐입니다. 생각이 변했습니다.
_ 갑순이 있는 곳에 눈길이 가고, 발걸음이 갑니다. 행동이 변했습니다.
_ 사랑으로 이렇게 변하니,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가 된 것입니다.
플라톤의 ‘신은 선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 두 마디를 기억합시다!
이 두 마디는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이 두 마디는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독교는 ‘신은 선하다’는 말은 수용하고,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부했습니다.
☞ 기독교가 이렇게 한 일이 잘한 것일까요, 잘못한 것일까요?
〈 하나님은 선하다? 〉
막 10:17~18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18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플라톤은 “신은 선하다”까지 말했습니다. 그후 400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선포했습니다.
플라톤은 신이 선한 것은 알았지만,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막 10:18을 진리로 믿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요?
“나만큼 착하게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합니다.
“신이 착한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나는 착하다. 나는 선하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성경이 옳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주장이 옳습니까?
☞ 재미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부모를 이야기할 때 자녀라면 누구나, “우리 부모님은 선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악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긴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불효자식’ 혹은 ‘후레자식’이라고 합니다.
자녀는 “우리 부모님은 선하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옳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내가 선한 사람이 되고싶다?’ 부모가 되면 선한 이가 됩니다.
부모가 되면 최소한 자식들로부터 “선하다!”라는 평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기 백성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도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에게 분명히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하면 ‘불신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 “하나님은 선하시다!”
자녀들이 육신의 부모를 “우리 부모는 선하시다!”나란히 평행을 이룹니다.
이것이 세상의 오묘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설계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님들, 자식 앞에서는 선하지만,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들 제외하면, 선하다고 평가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팎으로 선한 분은 딱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 하나님은 신자에게도, 불신자에게도 오직 선하신 단 한 분입니다. 할렐루야!
〈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 〉
☞ 육신의 부모님은, 자식에게는 선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도 선하시고, 불신자에게도 분명히 선한 딱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참으로 오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2천 4백년 전 플라톤의 한 마디가 날개짓이 되어 세상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로 선포되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뭘까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원인을 계속 추적하다보면 최초의 원인이 있습니다. 이것을 ‘제1원인’이라고 합니다.
_ 모든 이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부모가 있습니다.
_ 부모의 부모를 계속 추적하여 올라가면 ‘아담과 하와’에 이릅니다.
_ 아담과 하와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그들을 첫 사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원인’은 곧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제1원인’이라는 말을 철학적으로 ‘부동의 원동자’라고도 합니다.
아담 하와 이래 모든 사람은 움직이고 변해가면서 한평생 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창조한 신은 사람처럼 시시때때로 변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철학자들은 ‘제1원인’ ‘부동의 원동자’는 “사랑을 할까?”에 천착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왜냐면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한때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바꾸고, 액션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자 하나님, 만물의 제1원인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단정했습니다.
☞ 철학자들의 생각이 맞을까요?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 설교 제목을 여기서 따 왔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과 〉
우리가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알 수 없다면 매우 슬픈 일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 세상을 만드신 분이 누군지 알 수 없다면 역시 슬픕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에게 자기를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고아처럼 놔두지 않습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나님이 자신을 피조물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것,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기를 기꺼이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시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아버지가 되어주심”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되어주겠다” 여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자식인 너희가 나를 존경해야 한다거나, 효도해야 한다거나, 순종해야 한다는 등등…
이런 선행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낳아 자녀로 삼고 무한의 사랑을 붓겠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 세상 아버지들의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면서 조건을 붙이는 것을 봤습니까?
아무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낳아서 무한의 사랑을 쏟아부을 각오만 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를 향해 “우리 부모님은 선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에게고 선하신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자녀에게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완벽하게 선하신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는 최고의 복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오늘 설교 제목, 이 구절 근거로 정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과~”
〈 최고의 기쁨과 행복 〉
아재개그가 한 토막 떠오릅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대중탕에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온탕에 들어가서 “어~ 시원하다!” 그 소리를 듣고 손자놈이 텀벙 들어갔습니다.
어린 손자는 시원하다는 말에 들어갔다가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라 뛰쳐나옵니다.
나오면서 한다는 말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자식은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어버이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합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의 깊고도 넓고도 높디높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랐습니다.
부모 사랑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아있겠습니까?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없이 어떻게 인간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두 발로 땅을 짚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당부합니다.
먼저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3장 1절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를 위하여 간구합니다.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는 것,,,
이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최고의 복이며, 최고의 기쁨입니다.
오늘은 《 하나님의 사랑과 》 설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 그리스도의 인내에 》입니다.
☞ 최고로 기쁘고 행복한 표정을 우리 모두 지어봅시다!
☞ 우리의 얼굴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