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4.
이틀 전 11월 12일 오전 09;40분에
환자용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실 조명은 차가운 빛을 내뿜고,
수술대 바닥은 오싹한 냉기를 내 등판에 옮긴다.
PA 간호사가 좌안(左眼)을 고정시켜 마취액을
점안하고 소독제를 뿌리더니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한두 번 겪은 거도 아닌데 수술대에만 오르면
몸이 경직되고 긴장을 하니 아직도 어른아이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19번째 눈주사를 맞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워
긴장 속에 떠 오르는 상념들,
오늘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까.
10여 분 후 주치의가 눈을 아래로 보라 하고,
몇 초 후 눈에 통증과 함께 주사액 한 방울이
황반에 퍼지는 걸 느낀다.
20분 전 안과 주치의가 CT 검사결과를
모니터로 보며 오늘도 눈주사를 맞으라 했다.
'바비스모' 세 번 주사에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지만 군대에서 말하는 '확인사살'이 필요
하다며 주사를 한번 더 맞고 2개월 정도 진행
과정을 지켜보자는 거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거니 하면서 마음을
편히 먹고 왔는데 또 눈주사라니,
당황해 몇 초간 답변을 하지 않았더니 "맞기
싫으냐"라고 되묻는다.
환자 입장에서는 주치의 말은 절대적 권위라
거절할 수가 없다.
지난 5월 30일이었지.
민 전 은행장과 함께 남산둘레길을 걸을 때
망막출혈이 왔다.
어느 순간 검은 핏덩이가 눈알을 감싸며 그나마
겨우 남아있던 시력을 빼앗아 가버렸다.
이대로 실명(失明)이 되면 어떻게 살지,
치료비는 얼마나 들까, 온갖 걱정 속에 내 인생
역정을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나에게 세 번째 온 위기다.
첫 번째 위기는 2005년 철산지점장 시절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때다.
이미 마비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3개월 이내 전신마비에
이어 6개월밖에 살지 못하며,
수술을 하더라도 수술 중 사망(Table death)률이
70%라는 예비 사망선고를 받으며 절망에 빠졌을
때가 첫 번째 위기였지.
수술 후 천운으로 살아남았고,
은퇴 후에도 등산과 운동으로 체력을 유지하던 중
시력에 갑자기 위기가 왔다.
2009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사물이 우그러지고 끊어져 보이고 군데군데
지우개로 지운 듯 보이지 않는다.
혈압과 당뇨 등 다 정상인데 느닷없이 황반변성이
시작된 거다.
레이저로 3회를 치료받아도 호전되지 않아
눈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1회당 300만 원이 넘는 '아바스틴', '루센티스'등을
맞다가 의료보험이 적용되자 겨우 한숨을 돌리고
10여 회를 맞았지만 호전은 되지 않았고 관리만
될 뿐이었다.
다시 '아일리아'라는 눈주사를 4회 맞고 안정화가
된 지 7년 만에 망막출혈이라는 합병증이 찾아와
실명 위기에 내몰리게 된 거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몇 번째 위기가 온 건가,
사실 두 번째 위기는 2년 전인 2022년 10월에
찾아왔다.
전조증상이 없었는데 내시경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어 위암선고를 받던 날 당황해서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지만 보호자로 따라온 아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위점막하 박리술'로 암세포를 도려낸 후 2년 간
추가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고 통증도 없고
처방도 없고 항암치료도 없다.
유일한 치료법은 위에 좋다는 음식이나 민간
요법을 일절 금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거다.
그런데 등산 중 느닷없이 출혈이 왔고 실명
위기라니, 세 번째 찾아온 위기는 참으로 난감
하게 만들었다.
사물이 삼차원의 입체가 아닌 2차원의 평면으로
보이며 초점이 맞지 않으니 당구는커녕 손으로
물건을 잡기도 힘들고, 걸을 때도 균형이 깨져
뒤뚱거린다.
시력을 잃게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산에도 못 가고 글도 쓰지 못하는 인간 폐품이
된다는 불안으로 점점 우울해진다.
예전 머리수술 후 장기 및 시신기증 등록을 했고,
위암진단 후 사전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했지만
실명에 대한 불안감으로 내면적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초조해졌다.
겉보기에는 건강하고 활기가 넘치지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내 머리와 심장을 서서히
점령해간다.
그 와중에 어떤 동창은 위로한답시고 전화를 해
전광훈 목사와 이재명을 욕한 걸 두고 "내가
뒷구녕에서 남 욕을 잘해 죄를 받았다"는 등
염장을 지른다.
이어서 또 한 친구가 " 너는 돈이 많아 비싼
주사를 맞아서 좋겠다"라고 비아냥대는 말을
듣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꼭꼭 숨겨놓은 감정은 언젠가는 고개를 들고
다시 찾아온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일은 매우 쉽다.
특히 어려움에 처해 절망에 빠졌을 때 따뜻한
말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또한 나이가 많을수록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6월부터 눈주사로 집중 치료가 시작되었다.
삼성바이오에서 나온 카피 주사제인 114만 원
짜리 '아멜리부'를 황반에 맞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부담이 된다고
주치의에게 이야기하니 보험이 적용되는
'바비스모' 주사제를 3회 1세트로 진행하자고
한다.
1회 비용이 114만 원에서 14만 원으로 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3회를 지나 4회로 늘어나니
이 또한 부담스럽다.
6월부터 5번 눈주사에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고 망막을 가렸던 검은 장막이 사라지자
비로소 살맛이 난다.
삶에서 평화가 계속 유지 된다는 게 쉽지만은
않고 때때로 위기가 오는 게 인생이다.
맞다,
생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요,
또한 삶이란 위기라는 바람 속을 걷는 길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마음(心)은 수백 번 바뀐다.
이젠 마음을 비우고 또 다른 것으로 채울 때가
된 모양이다.
의(意), 지(志), 사(思), 려(慮), 염(念) 중 어느
것으로 채울까.
금년 여름엔 더위도 실컷 먹었고 나이도 먹고,
욕도 먹었으니 이젠 제대로 된 마음을 먹어야겠다.
그래야 세 번째 찾아온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겠지.
일제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아무리 힘든 일도 때가 되면 지나간다.
명의 반열에 들었다는 어느 의사가 "치료받기
위해 사는 건지, 아니면 살기 위해 치료받는 건지
마음을 확실히 정해라"고 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위기를 극복하려 최선을
다한다면 이 시련을 극복하겠지.
2024. 11. 14.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석천! 화이팅! 힘내라~으샤~으샤~으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안타까워ㅡ
잘 치유되기만을 ㅡ
힘내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