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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하나님앞에서(창 6:9-12)
어느 도시에 빵을 구워 파는 제빵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어떤 농부에게서 버터를 구입해다 썼는데 어느 날 1파운드 단위로 포장된 버터가 왠지 1파운드보다 조금 적은 것처럼 생각되어 무게를 달아보니 실제로 조금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만 그러겠지 싶어 다음날도 재보니 또 그만큼 부족합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제빵업자는 그 농부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를 재판하던 재판관은 농부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사실 그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제빵업자가 만든 1파운드짜리 빵을 가져다가 그와 똑같은 크기로 버터를 만들어 공급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농부가 일부러 버터의 양을 적게 한 것이 아니라 제빵업자가 만든 1파운드짜리 빵 자체가 조금 양이 적게 만들어진 까닭에 저도 모르게 양이 부족한 버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제빵업자는 그 잘못이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모르고 농부를 비난하고 고발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즈음 세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을 보십시오. 죄에 대해 두 가지 태도가 지배합니다.
첫째 태도는 “다 너 때문이야”라는 태도입니다. 서로 네 잘못이라고 합니다. 서로 상대방만 탓합니다. 한 사람도 내 탓이라고, 나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서로 남탓만 하며 상대방을 무너트려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서로 대적하니까 우리가 보면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는데 상대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남탓만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크고 적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 때마다 서로를 탓하기에 바쁘지 내가 문제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그 문제는 절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둘째 태도는 “남들도 다 하는데” 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것 같기는 한데 너도 나도 다 하는 일이니까 뭐 그리 문제가 되겠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나 혼자 안 하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바보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남들도 다 하니까 그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죄는 죄요 의는 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절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남들이 다 해도 죄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일이라도, 그래서 너무도 당연시 되고 죄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사람도 안 빼도 다 한다 해도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1절과 12절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 때에,” 앞 절을 보면 그 때란 노아의 시대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썩어서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악’이라고 번역된 낱말은 히브리말로 ‘하마스’인데 ‘폭력, 부당행위, 불법, 죄’라는 뜻입니다. 물론 뜻은 다르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해 각종 테러와 폭력행위를 하는 조직 이름이 ‘하마스’인데 이 조직이름과 똑같습니다. 즉 노아의 시대에는 의인인 노아 한 사람만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썩고 부패해서 모두가 죄를 범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부당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절에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습니다. 너도 나도 노아 단 한 사람만 빼고 다 죄를 저지르고 다 썩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요즈음 사고방식으로 하면 이건 죄도 아니지요. 남들도 다 하는데요? 전부다 하는 일인데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것도 죄라고 말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죄는 죄입니다. 의는 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만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11절에 나온 ‘하나님 앞에’라는 말입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 앞에’가 바로 히브리어로는 ‘리프네 엘로힘’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입니다. 온 땅이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썩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9절에 보면 노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볼까요?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뒤에 나오는 내용과 완전 반대 되는 내용입니다. 뒤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썩고 부패해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고 했는데 노아는 반대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완전한 자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물론 죄를 안 지었다는 뜻도 있고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예수님 빼고 결코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노아가 의인이지만 그 뜻은 그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요 죄를 전혀 안 지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 답은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렇습니다.
노아가 의인인 것은,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사람인 것은 오직 하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행했다’는 말은 본래 단순히 ‘걷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걷는다는 말이 도대체 왜 그리 중요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 말이 바로 뒤 11절에 나오는 말과 관련이 있구나.”
11절에서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온 땅에,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죄와 동행하고 죄의 길을 걸어갈 때 노아는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 죄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더란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또 한 번 코람 데오의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아는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인이 되고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된 것이고, 반대로 그 시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고 썩었고 죄를 밥 먹듯이 짓고, 하나님이 아닌 죄와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고 이들 때문에 세상이 죄로 가득 차게 되어 하나님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죄는 무섭습니다. 그런데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당연시 하고, 너도 나도 죄인인데, 다들 그 짓 하는데 뭐 어때 하며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나를 파멸시키고 내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그리고 최후에는 이 세상 전부를 망하게 하는 결과까지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의는 죄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의인이라고는 노아 단 한 사람이었지만 이 의인 한 사람 때문에 노아와 그 가족을 다 살리시고 또 그를 통해 온 인류를 구하시는 일까지 일어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단 열 명이 없어 멸망했지만 노아 시대에는 노아라는 의인 단 한 사람으로 세상을 구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니 이 의가 얼마나 강하고 중요합니까?
이 시대의 노아가 필요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노아의 시대가 오늘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데 죄를 죄가 아닌 것처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 한 사람이 세상을 거꾸로 살았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살았습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코람데오란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과 청교도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코람데오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넘어서, 신앙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코람데오의 의미
1) 하나님의 임재: 코람데오는 신앙인이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예배시간이니 기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모든 활동, 모든 관계, 모든 결정, 그리고 모든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성봉목사님이 강조했던 것처럼 “순간순간 하나님과 호흡하고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주권: 코람데오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내 뜻대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은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바로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나도 거룩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3)진실성과 성실성: 코람데오는 신앙인의 삶이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진실성과 성실성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의도를 보시기 때문에, 신앙인은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진 노아,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조롱하고 핍박해도 전혀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것도 120년동안이나 방주를 지었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혜도 필요했습니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계도도 없이 거대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더욱 방주의 설계자이신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 사람,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던 노아 한 사람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쪽에 속합니까?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인 노아에 가깝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썩고 모두가 죄를 지으면서 죄를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세상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의롭게 살려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교회는 다니지만, 신자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휩쓸려 함께 이리저리 구르며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렇게 함께 죄짓고 함께 타락하고 함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힘들더라도 노아의 편에 서서 의롭게 산다면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라도 나 자신 뿐 아니라 내 가정을, 내 가족 모두를, 교회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이 세상을 구해 나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편에 서서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산다면 나는 그 어떤 하나님의 역사도 일으키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그들과 함께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이 너무 가깝게 느껴지고 너무 포근하고 좋지만 그러나 동시에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또 한 가지 일어나는 현상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데,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 저 멀리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코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계신데 어떻게 그분 앞에서 감히 죄를 짓고 감히 딴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한편으로 두렵습니다.
그리고 조심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는 성도는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코람 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가시고 내가 하는 일을 코앞에서 지켜보실 터인데 우리가 어찌 가서는 안 될 곳을 가겠으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심지어 코람 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이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다 들으시고 내 생각까지 읽으시는데 우리가 어찌 막말을 하고 어찌 함부로 허튼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코람 데오의 신앙의 가진 성도는 딴 짓, 딴 생각, 딴 말을 절대로 못 해야 정상입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데도 성도인데도 갈 데 못 갈 데 다 가고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 한다면 그것은 내 신앙이 정상이 아니요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인 말고 ‘거룩한 무리’라는 뜻을 가진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아입니까? 세상 사람들, 보편적인 사람들 편입니까? 하나님은 이 시대의 노아를 찾으십니다. 단 한 사람으로도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거창하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단지 내가 하나만 지키면 가능합니다. 바로 올바른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세상을 구할 것입니다.